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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만들기’ 유감.

소요유 : 2012.10.24 20:07


가을이 되니깐 추억이란 말이 절로 귓가에 들린다.

‘OOO산 어디에서 고은 추억을 만드세요.’

‘가을이 가기 전에 추억을 많이 남기기 위해 이리 놀러 왔어요.’

전자는 관광 선전용 문구요,
후자는 관광객이 놀러가서 하는 말이다.

정녕 추억이란 이리 만들어 내는 것인가?

추억(追憶)을 추수(追隨)하는 한 현재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것.
오늘 거기에 있으면서도,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빌려,
이미 지난 과거를 소비하기 위해,
오늘을 짐짓 내쳐버린다.

하지만,
기실 현재는 과연 있는가?
현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얼음 지치듯 바삐 흘러가 이내 과거가 되어 버리고 만다.
손아귀에 쥔 물이 빠져 나가듯,
그리 그렇게 현재란 실체는 단 일각도 거머줘 느껴 볼 새가 없다.
그러하려니 차라리 아직 뒤로 흘러가지 않고 여전히 앞 서서,
아른 거리는 미래란 것이 한결 더 확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래는 최소한 현재처럼 당장 없어지고 마는 상실감을 유예시킬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기에,
이리 견고한 지점, 아니 그리 느껴지는 지점에 서서,
사라진 것들을 추상(追想)하는 것은,
늘 아쉬운 현재를 조상(弔喪)하기엔 제법 위로가 되는 것임인가?

게다가,
한참 흘려보내고 난 먼 훗날이 아니라,
당장의 오늘에 서서,
내일을 앞 당겨 끌어 쓰며,
오늘을 과거로 밀어 넣는다.

시간을 이리 왜곡시켜가며,
사람은 애써 사라지고 말 오늘을 겨워하고 있음이다.

왜 사람은 오늘을 직접 마주하지 못하는 것일까?

알리바이.
부재증명(不在證明).

오늘 거기에 임하지 않았음을 열심히 증언하고 있는 형식.
추억은 이리 오늘을 살고 있지 않음을 선언함으로써,
비로소 아름다움을 획득하고 마는 것이 아니랴.

아,
이리도 우리네의 지금은 실낙원(失樂園)으로 채색됨으로서만 구원된다.

마치 ‘여호와 증인’이 부활을 믿음으로써,
현실을 유보하듯이,
그렇게 현재를 담보하여,
미래를 꾸어,
과거를 갚는다.

여긴 늘 현재가 방기(放棄)된다.
현재를 버림으로써,
기어이 미래를 훔치겠다는 기도(企圖)가 있다.

사뭇 비릿하다.
왜?
오늘을 썩혀 버려야 내일을 꾸밀 수 있기 때문이다.

팔 하나를 잘라,
몸뚱이 전체의 안전을 구하는 형식을 일러 보험이라 한다.

하지만,
부활을 믿는다는 것,
추억을 구매한다는 것은,
보험보다 곱절은 단작스럽다.

왜냐?
저것은,
몸뚱이 전체를 제단에 바쳐,
팔 하나를 구하겠다는 욕심에 다름 아니니까.

부활을 믿는다는 것,
추억을 만든다는 것.
나는 이 소리 앞에 서면,
토악질이 난다.

이 현재 부재증명,
그 알리바이는,
결코 그자의 살인 혐의를 가리지 못하고 있다.
역겹다.

여기 이들은 의도적으로 과정을 제각시킨다.
결과를 얻기 위해선 오늘의 모든 것을 잃는 것조차 용인한다.
저들은 거죽으로는 추억이니 부활이니 읊조리면서 사뭇 고상한 척하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기실 욕(慾)과 욕(辱)으로 점철되어 있다.
본바탕은 욕망, 욕심 그리고 이기심이 쫙하니 깔려 있다.
이 얼마나 욕(辱)된가 말이다.

그러하기에,

내일 부활하기 위해 오늘을 기꺼이 버리고 만다.
추억을 사놓기 위해 현장을 기록하기 바쁘다.
도대체가 단풍을 감상하러 온 것인지,
사진 찍으로 온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추억을 강매하거나 증명하기 위해서,
저들은 저리도 안달이 난 것이 아닌가 나는 의심해본다.
블로깅도 때에 임하여 적어나가는 그 행위가 아니라,
남에게 한 건 보여주기 위해 동분서주 분주한 모습을 보곤한다.
제 블로그에 적어 올리기 위해,
사진 찍기에 바쁜 이를 목격한 적이 있다.
나라면 저리 정신 사납게 나댈 틈이라면,
차라리 내 눈 속에 더 친근하게,
내 머릿 속에 더 깊게 새겨두는 시간을 갖고 싶다.
저들은 신분이 기자가 아니면서도,
왜 블로깅에서 남을 그리 과도히 의식하고 있는가?
blog = web log.
블로그란 웹을 통해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log하는 것.
물론 sharing하는 뜻도 무시할 수 없지만 본질적으로 개인 블로그라면,
자신에 충실한 것이 먼저가 아니겠는가?

차라리,
살부살조(殺佛殺祖)는,
얼마나 가을 단풍처럼 찬란하니 붉디붉은가?
아무렴.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는 것.

과연,
삼세개공(三世皆空)이런가?
삼세가 텅 비었는데,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눠 따진다는 것,
이 역시 부질없는 짓임인가?

그러함인데,

그대는,
여전히,
어느 마음에 점을 찍을 것인가?
점심(點心).

‘추억을 만든다.’

현재를,
과거에 팔고,
미래에 사는 것이라면,
그대는,
과연,
어디에 점을 찍고 있음인가?

어쩔거나,

다만,
엊그제 다녀온 연천 내산리,
그날, 현재 아기 단풍은 혼줄을 놓을 듯이 찬란하고뇨.
그러하듯이,
그날의 오늘은 여여(如如)할 뿐인 것이니.

난, 오늘을 버려 추억을 만들지 않는다.

'추억을 만든다'는 것은,
마치, 미혼모가 제 핏덩이를 버려,
자신의 안일을 구하듯 사뭇 구차스럽기 짝이 없는 짓임이라.

어느 날,
한참 세월이 지난 후,
자연 어제의 오늘은 내일의 추억이 될 뿐인 것을.

마찬가지로,
부활 역시
난 믿지 않지만,
행여라도 만약 있다면,
도적이 담장 넘듯이,
그리 불각시에 다가오는 것이 아니랴.

어찌 그를 겨냥하여,
좌판 벌여 오늘을 팔아 넘길 수 있음이랴.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역겹다.
그 욕망, 이기심, 위선, 기만 따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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