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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은 누구에게 참불하는가?

소요유 : 2012.10.20 12:00


‘왕자불추(往者不追) 내자불거(來者不拒)’

‘가는 자는 쫓지 않고, 오는 자는 막지 않는다.’

도(道)를 향(向)하는 마음으로 오면 받아들일 뿐,
허나 떠난다한들 쫓아가며 붙잡지는 않는다.

절집 역시 오는 사람은 그저 맞이할 뿐,
간다고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매달리지 않는다.

이게 우리네 습속이다.

여름에 농원 앞을 지나던 사람 하나를 예기치 않게 사귀게 되었다,
아침 일찍 한결같이 앞을 지나는 것을 바라보고는,
근실(勤實)한 분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부러 거래를 튼 적은 없다.
그런데 그 날은 바로 도로가 옆에서 일을 하다가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쳤다.
하여 내가 먼저 가볍게 인사를 차렸다.

그 날 이후 이 분과 수 개월간 교우(交友)하게 되었다.
성경을 거의 줄줄이 꿰고 계신 분이다.
무슨 말이든 상관(相關)된 성구를 장귀(章句) 차서(次序)까지 챙겨 꺼내든다.

나는 예수는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예수교를 믿지는 않는다.
허나, ‘내자불거(來者不拒) 거자불추(去者不追)’인즉,
내치지도 붙잡지도 않고 그저 허허로니 들을 뿐 가타부타 논하지 않는다.

원래, ‘왕자불추(往者不追) 내자불거(來者不拒)’
이 말은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맹자 스스로 말씀하신 것이다.

헌데, 저 분은 본디 내게서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나를 가르치려 함이니,
저 맹자의 말씀을 내가 취할 까닭은 없다.
허나 어찌 배움과 가르침의 위치에 따라,
마음보를 달리 가질 필요가 있으랴.

어느 모임에서 어떤 분이 한 이야기를 생각한다.
시골엔 다문화 가정이 적지 않다.
외국에서 건너온 이들 부인네들을 적극 상대 하는 이가 있는데,
그게 ‘여호와 증인’이라 한다.
홀로 떨어져 나와 있어 외롭기 짝이 없다.
게다가 우리네 인정은 이들을 그리 너그럽게 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가운데 간절한 정성으로 접근하는 여호와 증인은 제법 반갑기까지 할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서 지금 여호와 증인을 만나고 있다 하며,
한바탕 가가대소(呵呵大笑)한 적이 있다.

내가 이야기를 꺼낸 그 분이 바로 여호와 증인이다.
우리가 보기엔 그저 전도(傳道)활동에 다름없는데,
저들은 전도라 하지 않고 봉사(奉事)라 이른다.
하느님의 뜻과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을 위해,
우정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여 하루 종일 저 일을 치러내고 있음이니,
아닌 게 아니라 저들 입장에선 봉사라 일러둔들 무슨 잘못이 있으랴?

수 개월밖에 만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지는 못하겠지만,
저들은 부활을 믿고 가열차게 저리 거리를 나서,
가가호호(家家戶戶) 닫힌 문을 두드린다.
군(郡) 전체를 통틀어 일 년에 기껏 한 둘을 입교(入敎)시키는 모양인데,
저들은 온 교인 모두가 나서 사납고 매운 한서(寒暑)를 가리지 않고,
칭하여 이르는 봉사에 갈심진력(竭心盡力) 일로매진(一路邁進)한다.

저들은 내세를 위해,
현세를 저리 단속하고 있음이고뇨.
하느님의 종으로써,
오늘을 그이에게 다 바치고 있음이다.
아, 저 간절함이라니,
애틋하다 못해 마음이 저려온다.

허나, 저분의 말씀에 내가 가끔씩 에둘러 가며 슬쩍 초를 치곤 한다.
어제 들려드린 내 이야기 하나를 여기 남겨 둔다.

“장삼은 매일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
그는 원(願)을 세우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친견(親見)하는 것이었다.
정성이 통하였음인가?
어느 날, 드디어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장삼은 너무 기뻐서 수없이 절을 드렸다.
그리고는 평소 궁금한 것을 여쭈었다.

‘관음보살님도 혹시 참불(參佛)을 하십니까?’

‘그렇다.’

‘어느 佛을 모십니까?’

‘관음보살이니라.’

‘관음님은 자신이 관음이시지 않습니까?’

‘남에게 비느니 자신에게 빌어라.
사람은 부처께 빌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빌어야 하느니,
자신이 바로 부처인 게야.’

천도교의 가르침,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것,
역시 이 자리를 하나로 꿰고 있음이다.

(그리고는 자등명 법등명에 대하여 말을 덧붙였다.
이에 대하여는 지난 글을 참조할 사. ☞ 2011/03/08 - [소요유] - 개골창의 연등 )”

Here & Now

지금, 이 자리를 저당 잡혀,
미래를 겨냥할 것인가?
아니면,
오늘, 자신과 법(法) 즉 진리에 등불을 밝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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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0.29 00:20 PERM. MOD/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2013.02.28 17:44 PERM. MOD/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bongta 2013.02.20 00:49 신고 PERM MOD/DEL

    자기 신념에 빠진 이들은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지요.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순교자라 불리우게 되는 이들은,
    급기야 이를 지키기 위하여 신명까지 바칩니다.

    저는 진심으로 저들의 순혈 열정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진짜배기 순교자라면 제 신념에 투철한 다른 국외자(局外者)를,
    강제로 자신의 세계로 끌어 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만큼 상대의 신념도 존중할 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교는커녕 얼치기 신자도 되지 못할 자들이 제 종교를 빌어,
    곧잘 상대를 능멸하거나, 소맷자락을 강제로 당겨 끌곤 합니다.

    그래서, 남의 사찰에 가서 땅밟기를 하고, 단군상 목을 자르며,
    제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악마라 부르기도 합니다.

    선교까지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불교 신자들 중엔 이런 이들이 거의 없는데,
    유독 기독교 신자들 중엔 선교를 넘어,
    거의 강매(强賣)하듯 억지를 부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제가 사귄 여호와 증인은 성경에도 비상하니 밝지만,
    그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극도로 긴장감을 유지하며 행동하더군요.
    물론 저들의 성경 해석이라든가, 신념 중에 받아들일 수 없는 점이 있지만,
    저들의 실제의 삶 현장에서 흔들림 없는 철저한 태도는 사뭇 놀랍더군요.

    저들이 선교 열정은 거의 처절할 정도인데,
    그래도 뭇 기독교인들처럼 예의는 저버리지 않고 금도는 지키더군요.
    그래서 외려 저분을 꺼리지 않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성적 망언을 내뱉은 목사가 오명을 스스로 뒤집어쓰고서도 버젓이 활동하고,
    이들 밑에 수많은 신도들이 들끓고 있는 것을 보면서,
    종교란 뭐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것이, 우리들의 취약한 틈새에 자리 잡고,
    자라는 음습한 병리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설혹 저이의 궁색한 변명을 믿어준다고 하여도,
    명색이 성직자라는 이로서는 치명적인 불명예일 터인데도,
    아직도 기고만장 설치며 나다니고 있지요.

    예수 정신의 반의 반만 따른다 하여도,
    치욕스러워 저 자리에 단 일각도 서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자들 역시 당장 저이를 쫓아내고 새 교회를 열고 새 목사를 모셨을 터인데도,
    저 지경인 것을 보면 저들이 따르고 있다는 저것을 어찌 종교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저 병리현상의 하나로 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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