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포텐셜'에 대한 단상 하나.

농사 : 2012. 12. 13. 13:41


포텐셜

물에 대하여 공부하다 보면 ‘수분 포텐셜’이란 용어를 접하곤 한다.
최근 내가 가입한 카페의 OOO님이 올려주신 글에도 등장한다.

당연 수분은 잘 알겠지만,
포텐셜이란 말은 좀 아리송하다. 
해서 그냥 이 말을 그냥 무시해도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있는 말 하나를 그냥 버린다는 것은 왠지 개운하지 않다.

과연 필요 없다면 그 말을 왜 사용했는가?
버리고 난 후 잃는 것은 과연 없을까?
혹, 이런 염려가 들지는 않는가?

포텐셜 potential
이것 사전식으로 정의하면 실로 간단하다.
잠재적인, 가능성이 있는 ...

하지만, ‘수분’과 함께 이런 뜻을 지닌 potential을 결합하려 보면 도무지 요령부득,
용어 정의자가 애초 품었을 상 싶은 뜻을 짚어내기가 영 막연해지는 것이다.

수분 포텐셜이 팽압, 삼투압 ... 따위의 합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 이런 항목들이 주 관심사가 아니고,
‘포텐셜’이란 말에만 주목하고 있다.

그냥 압력이라 하지 않고 왜 포텐셜이란 낯선 말을 쓰고 있는가?

설명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자, 우선 여기 3단 폭포가 있다고 가정하자.
(위로부터 아래로 각기 1단, 2단 3단 폭포라 명명.)

각 단 마다 소(沼)를 이루고 있다 할 때,
그 소에 머무르고 있는 물은 높이에 따라 각기 다른 위치에너지를 갖는다.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물이 큰 위치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런데,
내가 1단 폭포 바로 옆에서 지켜본 沼에 괴인 물이나,
2단 폭포 바로 옆에서 지켜본 물이나,
이들 물 자체에 무슨 특별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沼에 괴인 푸른 물임엔 하등 차이가 없다.
그러한데도 가장 높은 곳인 1단 폭포 물은 2단 폭포 물에 비해,
위치 에너지가 높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치에너지 = 질량 * 중력가속도 * 높이

물은 1단이든 2단이든 하나도 다른 것이 없는데,
다만 높은 데에 있기에 1단이 에너지가 크다고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만약 저 물이 아래로 흘러 떨어지면서 수차를 돌려 발전을 한다고 할 때,
단 아래로 물이 떨어질 때라야 비로소 가용 에너지가 산출된다.
물이 그냥 1단에 머물러 괴어 있는 한,
저것은 아무런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반면 2단에서 3단으로 물이 떨어지면 이 물은 전기 에너지로 전환된다.

1단이 2단보다 위치에너지가 크다고 말하고 있지만,
3단으로 떨어진 2단의 것보다,
현실적으로 1단의 것이 뭐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위치에너지라는 것은,
여기 예에서는 전기에너지화 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보지(保持)하고 있는 정도를 재는 척도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나는 잠재태(潛在態) 또는 가능태(可能態)라 부른다.
이런 잠재태가 실제 전기에너지화 될 때를 나는 현실태(現實態)라 칭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만의 명명법이니,
혹여 공공의 자리에 임하여서는 그 사용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물이 1단 沼에 괴어 머무르고 있는 상태는 잠재태,
그것이 아래로 떨어져 전기를 실제 생산할 때를 현실태라 이해하면 된다.

量[잠재태 E] = 量[현실태 E]

이 양자의 에너지는 양적 크기는 갖지만, 실현 유무가 서로 다르다.

위치 에너지를 potential energy라고 하는데,
나는 처음에 이게 참 이상했다.
가령 site, location, position, height – energy라 하지 않고,
왜 potential energy라 하였는가 상당히 궁금하였다.

그러했던 것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나름 그 뜻과 의미가 생생히 지피어졌던 것이다.

그 경과는 조금 있다 몇 가지 소개하기로 하고,
여기서 또 하나 등한히 해서는 아니 될 중요한 점을 마저 지적하고자 한다.
저 잠재태라는 것은 어떤 절대적인 수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대적인 위치, 지위에 따른 가치로 측정된다는 점이다.

가령 물 높이 100m와 101m 이 둘 사이의 위치에너지 차이나,
1000m와 1001m 이 양자 간의 위치에너지 차이나 동일하다.

101m 높이에다 댐을 쌓고 그 1m 아래로 물을 떨어뜨려 전기를 생산하나,
1001m 높이에다 댐을 쌓고 그 1m 아래로 물을 떨어뜨려 전기를 생산하나,
그 전력 양은 같은 것이다.

1000이란 숫자는 아무런 위엄이 되지 않는다.
  (이 숫자에 속으면 그대는 천년 두려움 속, 그 옥에 갇혀 살아야 한다.)
다만 그것과 견주는 상대에 따라 위력의 크기가 측정될 뿐인 것이다.

이렇듯 절대치가 아니라 상대치로서 평가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다 정확히 말하고자 한다면,
기실 potential이라 부르기보다는 
potential difference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더 근리(近理) 하리라.
하지만 여러 사정 상 그냥 potential이라 약하여 칭하는 것이다.

지구상의 경도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0도로 기준 삼아 나머지를 재어 나간다.
이것을 사실 서울의 우리집 뒷간을 기준으로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어떠한 이유로 그리 정한 순간 0도가 절대 기준인 양 통용된다.

마찬가지로,
전기는 ground를, 
위치에너지는 천체(지구)의 질량 중심을 0으로 하여 재어 나간다. 
하지만 이것은 다 여러 사정상 그러한 것이지,
그게 꼭이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potential에서 잊지 말고 건져 올려야 하는 것은,
잠재태(潛在態), 그리고 상대성(相對性),
이 두 가지가 되겠다.

***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흔히 듣는다.

이 명제가 바로 potential, 즉 잠재태로서의 언명이다.

싯다르타(悉達多)가 태어난 후,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은 후, 손가락으로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외쳤다고 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석가가 내뱉은 말이지만,
이는 석가 하나에게만 유일하니 전속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체중생 실유불성인즉,
모든 중생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부정하면,
불교는 문을 닫아야 한다.

나는 지금 종교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잠재태에 대한 비유를 들자하니,
문득 이게 아주 적절하다 싶었을 뿐이다.

불성을 누구라도 다 가지고 있다. - 잠재태.
하지만 현실적으로 누구나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고,
깨우쳐야 부처가 된다. - 현실태.

沼에 물이 괴어 있다 – 잠재태.
沼에 갇힌 물을 터서 아래로 흘려야 전기를 생산한다. - 현실태.

물은 산, 
물은 물.

이 경지가 이쯤에서 지피지 않는가?

절집에 가면 여자 신도들을 두고 너나없이 보살님이라고 부른다.
원래 보살은 좁은 의미에선 오로지 부처만을 두고 이를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게 그 특유의 관용 정신이 흘러넘치는 대승불교에선,
뭇 중생 일반에게까지 통용이 된다.
사실 보살은 대승불교 용어이기도 하다.

참 내,
부처가 아닌데도 보살로 불리우는 중생들이라니.

(사실 오늘 날의 대승불교는,
부처가 처음 펴던 교설의 뜻을 지나쳐도 너무 많이 지나쳤다.
타락한 모습이라고 지적하면 내게 달겨드는 땡중, 사이비 교도들이 벌떼처럼 나타날까?
그러거나 말거나.)

이 때, 비웃음을 날릴 것이 아니라,
‘아, 잠재태로서의 부처를 이르고 있구나’라고 이해를 하면,
어느 정도 애교로 봐줄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기 재미있는 점 하나를 특히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일천제(一闡提)라 하여 절대 부처가 될 수 없는 중생이 있다.
실유불성이라 하였는데, 이를 빗겨가는 자들이 있으니,
이를 일천제라고 한다.
사뭇 의론이 길어지니 일천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쯤에서 그치고 더는 약하련다.
(※ 참고 글 : ☞ 2011/05/10 - [소요유] - 놀부전은 논픽션이다.

그런데, 식물의 경우 토양이 말라 위조(萎凋)점을 넘게 되면,
제 아무리 수분을 공급해주어도 다시 회복이 되지 않는다.

수분 포텐셜과 관련되어,
나는 바로 저 위조점이 일천제와 대비되어,
이 자리에 잠깐 머물러 서서 가만히 이를 음미해보는 것이다.

천하의 농부들은 따라서 물주기를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된다.
위조점을 넘어서도록 관수를 태만히 하면,
식물들을 일천제로 만드는 격이 아니랴?
이 보다 더 중한 죄업이 어디에 있으랴?
사뭇 두려운 노릇이다.

조주선사는 어는 곳에서는 개에겐 불성이 없다 하였으되,
또 어떤 곳에선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 분이 실성을 하였음인가?
이를 알아내는 것은 내 몫이 아니고,
이 글을 읽는 이들의 몫일 뿐인 것을.

시인 김춘수는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내가 이름을 부여하기 전까지는 가능태의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이름을 지어 부르는 순간 그는 현실태로서 내 앞에 현전하는 실존이 된다.
김춘수로 인해 꽃이 피어난다.

포텐셜이란 말을 적용한 말씨들을 그래서 나는 사뭇 사랑한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깊은 천착과 애정이 없으면 저러한 명명법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위치 에너지보다 potential energy는 사뭇 본질적이고 귀한 명명법이다.
마찬가지로 수분 압력지수 따위가 아니고 water potential로 그냥 사용하는 것이,
실답고 꽃다운 일이라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천하의 모든 사물에 그에 값하는 제 이름을 붙여야 한다.
이게 아니 되면 천하는 이내 혼란에 빠지고 만다.

이런 사정에 대하여,
순자(荀子)의 정명(正名)처럼 적실하게 잘 드러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여 간단히 소개하며 마치고자 한다.

그에 앞서 여담이지만, 순자의 문하에 이사, 한비자 등 법가 사상가가 배출되었다.
비록 유가에서 이단시 되는 순자지만 현실에 밀착된 실체적 영향력을 가졌음이니,
실제 진시황의 천하통일의 초석은 실은 법가에 의해 닦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제나라의 직하학파(稷下學派)는 순자의 학문이 전판을 장악하였는데,
이게 역사의 명운에 의해 스러지고 말았다.
당시 전국시대, 제나라의 직문(稷門)은 천하 학문의 총 집결지였다.
혹여 순자를 고리타분한 변방의 인물로 오해할까 저어되어 이리 짚어둔다.
 

순자(荀子) 정명편(正名篇)

고로 왕자는 이름을 지으니, 이름이 정해지면 바르게 분별이 되고, 도가 행해져 뜻이 통한다. 그런즉 백성을 하나로 신중히 통솔할 수 있게 된다.그런고로 말을 분석하여 제 마음대로 설명을 만들어 이름을 혼란시키고, 사람들을 의혹하게 하고 쟁송을 일으키는 것을 대간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은 부절이나 도량형을 속이는 죄와 같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기괴한 말에 따라 바른 이름을 혼란시키지 아니하므로 성실하고, 성실하므로 부리기가 쉽고, 부리기 쉬우면 공업을 이룰 것이다. 그 백성들이 기괴한 말로 이름을 혼란시키지 아니하므로 오직 법을 따르고 영을 좇을 것이니, 그러면 치적은 오래 지속될 것이다. 치적의 영속과 공업의 완성은 다스림의 궁극이요, 이것이 이름을 하나의 약속으로 지킨 공이다. 이제 성왕이 없고, 이름 지킴을 태만히 하고, 기괴한 말로 이름과 실의 일치가 어지럽고, 옳고 그름의 구별이 분명하지 못하여 법률을 다루는 관리나 경서를 외는 유자조차 모두 혼란 중에 있으니...

...
故王者之制名,名定而實辨,道行而志通,則慎率民而一焉。
故析辭擅作名以亂正名,使民疑惑,人多辨訟,則謂之大奸,其罪猶為符節度量之罪也。
故其民莫敢托為奇辭以亂正名,故其民愨。愨則易使,易使則公。
其民莫敢托為奇辭以亂正名,故壹於道法而謹於循令矣,如是則其跡長矣。
跡長功成,治之極也,是謹於守名約之功也。
今聖王沒,名守慢,奇辭起,名實亂,是非之形不明,則雖守法之吏,誦數之儒,亦皆亂也。


일견 순자가 정명을 통한 치자의 도리를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숨은 뜻은,
말의 혼란은 말 자체의 혼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미혹시키며, 옳고 그름의 시비조차 그르치며,
사회통합을 저해한다고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들의 화법을 가만히 들여다봐라,
말과 실제가 다르고,
名과 實이 어긋나 있지 않던가?

수분 포텐셜 역시나 더하고 뺄 것 없이,
water potential 이리 바르고 온전하게 써야하지 않을까?

덧붙임)
글을 다 마치고 나서 water potential을 검색하니,
정작 뒤늦게서야 좋은 링크 하나를 얻었다.
소개를 해둔다. (영어)
제 글의 미진한 부분은 이곳을 참조함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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