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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犧牲羊)

소요유 : 2014.02.08 21:43


나는 한자를 파자(破字)하며 뜻풀이를 하는 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유튜브에서 한자 강의하는 영상을 보았다.
강사는 가히 파자의 달인이라 마구 달려 나가며 제 멋대로 파자놀음에 열심이다.
배우는 자에게 한자를 익히기 좋게 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지만,
전거도 전혀 없는데 현대인의 감각에 맞게 꾸며댄다면,
이는 망령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엔 또 ‘새로 나온 한자성어’니 갱상도 버전이니 하여,
해괴망측한 한자어 놀음이 횡행한다.
내 이 따위 것들은 제목만 보고도 그냥 외면해버리고 만다.
오늘 글을 위해 이들을 잠깐 끌어들여 본다.

★臥以來算老 (와이래산노)
 – 엎드려 오는 세월을 헤아리며 기다림은
  (인생무상, 늙어감을 헤아린다는 뜻)

★雨夜屯冬 (우야둔동)
– 비오는 밤에 겨울을 기다리듯이

이런 한심한 작자들,
할 짓이 없어서 이런 짓거리로 아까운 세월을 눅이는가?

이러함인데, 오늘 희생양(犧牲羊)을 앞에 세우고 말을 잇자하니,
犧자에 눈이 가고 있음이다.

여기 보면 소(牛), 양(羊)이 또렷이 들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신에게 제물을 받칠 때 소나 양 또는 돼지를 희생물로 삼는 것은,
중국 고대인들의 제천의식 일반이였음에 비출 때,
희(犧)자에 이들 동물들이 등장하는 것은,
과히 그로써 실상을 짐작하는데 무리가 없다.

犧, 牲, 牷
이 삼자는 거지반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모두 완전체를 뜻한다는 것이다.

가령, 온전한 모습을 牲라 하고,
이게 해체되었거나 상한 것을 牛라 한다.

기르고 있는 중일 때는 축(蓄)이라 하지만,
이제 제물로 쓰려 할 때는 牲라 이른다.

色純白曰犧,體完曰牷

순색일 때는 犧라 하고,
몸체가 완전 할 때는 牷이라 한다.

여기서 순색이라 함은 잡색이 섞이지 않은 털을 가진 소를 일컫는다.
예전 제물로 쓸 소는 치질이 걸렸어도 아니 되고,
특히 흰 털이 섞여 있으면 쓰질 않았다.

제사에 지낼 동물은 사양(飼養)도 특별히 잘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잘난 것들만 엄선하였다.

犧牲不成,粢盛不絜,衣服不備,不敢以祭

희생물이 제대로 완전치 못하고,
젯밥이 정(淨)치 못하며,
의관이 갖춰지지 않으면,
감히 제를 지낼 수 없다.

맹자의 제물관(祭物觀)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가장 최상의 것을 제물로 쓰지 않는다면,
어찌 신을 바로 모실 수 있겠음인가?
그러하다면,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모심은 무엇인관대?

犧牲小我完成大我

희생은 작은 것을 버려 큰 것을 구하고자 함이라,
간절한 정성으로서 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함인데,
나는 오늘 왜 희생의 뜻을 생각해보는가?

3년 전에 구제역을 핑계로 수백만 축생들을 생매장 시킨 나라.
이 지지리도 못난,

야만적인 나라에서,
오늘 날 다시 AI를 빌미로 새들을 몰살 시키고 있다.

애꿎은 철새들이 온갖 핑계의 화살을 맞고 죽어나가고 있다.
언제는 철새 도래지를 보호하여야 한다든가,
희귀종을 아껴 살펴야 한다고 게거품을 물지 않았던가?
그러함인데 이들에게 갖은 허물을 뒤집어씌우며 생매장 시키고 있다.

犧牲小我完成大我

말로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희생물을 고대에 어찌 대하였는가를 이리 비추어보면,
지금 저리 아까운 목숨을 앗기고 있는 중생들은 결코 희생물이 아닌 것이다.
최소 희생물은 제단에 올려지기 전까지는 극진한 보살핌으로써 대접하여 모신다.

저들 가여운 새들을 감히 희생물이라 칭할 수 없는 이유가 예에 있음이다.
저들은 희생물이 아니라, 위정자들에 의해 급조된 핑계의 무덤일 뿐이다.
공무 담임자들은 책임질 무엇인가를 구하려 하였음이고,
그 때 마침 곁에 있던 무주공산 철새들에게 뒤집어씌워지고 만 것이다.

마침 여기  여기 좋은 글들이 있다.

  ☞ 정치 철새는 유죄지만 생태계 철새는 무죄다 

  ☞ 철새가 AI 주범이 아닌 이유... 공장식 축산이 더 문제다
 
공장식 축산업을 거국적인 차원에서 근원적으로 재검토하고,
사태의 원인이 인간인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은가 솔직하니 살펴 되우 반성하여야 한다. 

그리 잘났다는 인간의 탈을 쓰고,  
몇 년마다 되풀이 되는 이 야만적 살륙행을 이젠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블루베리 업계의 사정을 들어보아도,
저따위 공장식 농축산업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는 미뤄 비춰 자명하다.
내 아는 농장주 하나는 이리 토설한다.
비닐하우스에 키우는 한, 농약을 하지 않고 견딜 수 없다.

실제 노지와 하우스 지역이 다른 격지의 두 곳에서 재배를 병행하고 있는 이의 증언이다.

내가 초기에 외부로부터 묘목을 들여왔는데, 혹파리가 묻어 들어왔다.
이게 차츰 노지까지 퍼져갈 기세인데,
약을 칠 수도 없고 도무지 방도가 서질 않는다.
그러함인데 이듬해에 보니 삽목장 하우스 안에는 조금 남아 있었지만,
노지는 거의 혹파리가 보이질 않는다.

을밀농철의 주축인 초생재배의 위력이다.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는데,
풀이 자라자 포장 전체의 환경이 살아나면서,
생물 다양성이 확보되고,
이들 간 자연스런 견제와 균형으로,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갔기 때문이리라.

공장식 축산은 한 때 남보다 좀 더 돈을 벌 수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되우 댓가를 치러야 한다.
게다가 가여운 생령을 무참히 짓밟고 착취함으로써,
그 죄를 쌓아가고 있음이니 이 얼마나 흉하고, 딱한 노릇인가?

부디 크게 마음을 돌이켜,
바른 길로 나아가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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