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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낭콩

소요유/묵은 글 : 2008.02.26 14:55


* 이글에 대한 소종래는 말미에 첨언함.

강낭콩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남콩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오랜 옛날, 저의 대학입학시험에 나온 시입니다.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를 기리고자 시인 변영노는 이 시를 지어 바쳤습니다.
당시 저는 일지사에서 나온 국어 참고서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거기 있던 문제라 쉬이 풀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 시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아,
지금, 식은 재같이 타성에 젖은 나태함 앞에,
당시의 의기가 강낭콩꽃 보다 더 푸르렀음을 알겠음인저.

작취미성, 해장하러 여기 주막을 기웃거리다 보니,
몇몇 선객들의 꽃씨처럼 떨어지는 말씀 받아,
심상에 웬일인지 이 시가 절로 떠오르더군요.
해서, 눈밭에 찍힌 꿩 발자국 따라가듯
제 마음 밭 고랑을 무연히 쫓아가보았습니다.

이하는 그 사연들입니다.

시 처음에 마음을 충격처럼 때리는 글
“거룩한 분노”가 종교보다 깊다라는 말을 맞납니다.

분노는 마음의 에너지를 짧은 시간에 급격히 연소시키는 것이기에,
어디인들 아니련만, 특히 불가에서는 극히 경계를 합니다.
탐진치 삼독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시인은 외치고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가 종교보다 깊다”라고 말입니다.
분노도 다 같은 게 아닌가요 ?
시인은 ‘거룩한’이란 한정사로 분노를 체(篩) 거르고 있습니다.

저는 작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농사라 감히 이르기 부끄러운 농사를 지어봤습니다.
들깨를 조금 심었었는데, 김 매는 것도 감당키 어려웠습니다만,
나중에 거둘 때도 아주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어렸을 때, 엄마가 키질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이게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더군요.
결국 이웃밭 할머니께서 도와주셨습니다.
키 가득 검불, 흙이 섞인 들깨를 넣으시더니만,
쓱쓱 몇 번 까부르니 마술 부리듯, 담박 들깨만 거둬지더군요.

시인은 손 익은 농부라도 된단 말입니까 ?
키질하여 종교보다 더 거룩한 분노의 正金을 석발라내었음입니까 ?

저 자신을 포함한 우리들 얘기입니다.
자신은 정작 사소한 것에도 싸움을 하면서,
막상, 남의 싸움엔 뒤늦게 나타나,
온 우주를 품어야 한다고 의젓하니 점잖을 빼기도 합니다.
때로는 좁아터져 송곳 꽂을 뺨 땅 하나 없다고 조(操)빼기도 합니다.
어차피 남의 일엔 제 손을 더럽힐 까닭이 없습니다.
이게 당초(當初) 수지 맞는 장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교를 빗겨 거들며,
분노를 꾸짖는 소리를 들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이 때 저는,
시인이 키질 하던 저 종교 보다도 더 ‘거룩한 분노’를 되새기며,
저의 ‘흉악한 분노’를 못내 부끄러워 합니다.

저들은 화해를, 용서를
거룩한 성자처럼 외칩니다.
하지만, 화해와 용서 밑에 버려진 제것 아닌 남의 상처는 누가 어루만져줄까요 ?
달님이, 바람이 호호 불어주실까요 ?

義人은 없고 情人만 있는 세상은 일상에선 그럴 듯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하지만 정작 일이 터지면,
돌 들어내자 쏜살같이 도망가는 가재처럼 뿔뿔히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점잖은 개가 똥을 먹는다’고 ....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이 아름답지만,
종내 벼락치며 빗줄기를 쏟아내는 것은 바로 그 구름이기도 합니다.

***

당송팔대가의 하나인 한유가 그의 文友인 유종원의 묘비명에 쓴 글입니다.

"..... 사람이란 곤경에 처했을 때라야 비로소 절의(節義)가 나타나는 법이다.
평소 평온하게 살아갈 때는 서로 그리워하고 기뻐하며 때로는 놀이나 술자리를 마련하여 부르곤 한다.
또 흰소리를 치기도 하고 지나친 우스갯소리도 하지만 서로 양보하고 손을 맞잡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이며(肝膽相照)' 해를 가리켜 눈물짓고 살든 죽든 서로 배신하지 말자고 맹세한다.
말은 제법 그럴듯하지만 일단 털 끌만큼이라도 이해 관계가 생기는 날에는 눈을 부릅뜨고 언제 봤냐는 듯 안면을 바꾼다.
더욱이 함정에 빠져도 손을 뻗쳐 구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이 빠뜨리고 위에서 돌까지 던지는 인간이 이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다."

저는 TV를 보지 않은지 한참입니다만,
예전에 차민수를 모델로 한 올인이란 드라마에서,
아버지역 이덕화가 이리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넘어진 너에게 손을 내미는 놈이야말로 위험한 놈이다,
그 놈이 언제고 너를 제일 먼저 쓰러뜨리리라."

세상은 이치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정분도, 사랑도 마지막 제 자존을 지켜내지는 못합니다.
제 이해(利害)는 사랑보다 더 모질게 우리를 복속시킵니다.

슬프게도, 배반은 존재의 끝에 나타납니다.
사물이든, 인간사이든 있음의 마지막 여로에서 맞닥뜨리는 그것.
이게 문제입니다.
신뢰의 막다른 골목, 마지막 순간에 드러납니다.
맨 앞도 아니고, 중간도 아닌 마지막에 죽음처럼 나타나,
신뢰의 멱줄을 따버립니다.
관계가 끊어진 자리,
그래 저는 배반을 존재의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때문에,
배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감히 정이 마냥 아름답다고
正金이라도 된 양,
은방울 소리로
찰랑 찰랑
노래하는게
심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

명명백백 그릇된 현장에서
함구하며, 고상한 척 흘려내는 미소가 정녕 위선이 아니라면,
최소 義로움을 비웃지나 말아야 할 것입니다.

義人은 그래서 외롭습니다.
아니 실은 외롭기에 義人일런지 모릅니다.

독립운동가 김산은 이리 말했습니다.
"테러는 폭력이 아니고 자유에 대한 열망이다"라고 절규했습니다.

테러를 비난하려면 상실된 자유에 대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독립운동가는 모두 두 번 자유를 잃고 맙니다.
독립이 되지 않았다고, 그들의 운동이 무용한 것이 아니듯,
독립이 되었기에, 그들을 잊어야 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제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두 번 자유를 잃고 싶지는 않습니다.
공정하지 않은 자리는 누구에게나 슬픈 것이기에.

독립투사 자손들이 아직도 셋방을 전전하고 있다면,
김산의 테러란 도대체 무엇인가 말입니까 ?

제 감정의 사치스런 소비만 있고,
정당한 평가가 실종된 세상은 지하 셋방처럼 쓸쓸합니다.
나는 그래서 홀로 산에 오릅니다.
산정도 쓸쓸하긴 매한가지입니다.

“하지만, 최소 지하는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거기엔 하늘만큼은 가까이 내려와 있다.”

***

제 글인즉슨,
거룩한 분노에, 미쳐 미치지 못하는 우수마발에 불과한즉,
몇몇 말미후 이내 지울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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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은 모모 사이트에서,
다소 문제가 있는 상황이 발생했는데도,
이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분들이 없기에,
객인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나서서 몇마디 말품을 판 이력 중에 하나입니다.

자세한 말씀은 약하거니와,
얼추 줄이면 이러한 사연입니다.
주인장을 중심으로 꽃다운 얘기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곳이었는데,
어느 날, 그 주인장을 트집잡는 인사가 나타납니다.
물론 제 눈에 그리 보였습니다.
다른 분들 중에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리 주인장을 꽃 본듯이 대하던 사람들이,
정작 그 현장에 대하여 비판적인 대응을 하는 사람이 당시 하나도 나타나지 않더란 것이지요.
하여 제가 우정 객인 주제에도 불구하고,
나서서 그 트집 잡던 인사는 물론, 그리 냉담한 그곳 선참자들을 향해
한 마디 하게 됩니다.
이게 이리 저리 걸치적 거리며 사연을 만들어냄에,
잠시 들렸던 제가 그곳에서 지체하게 됩니다.
이 글은 그런 과정 중에 생산된 것 중에 하나입니다.

앞으로 당시 그곳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몇차, 옮겨 싣고자 합니다.

다만, 시제라든가, 이곳 블로그의 이식 적합성을 위해,
글 뜻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조금 수정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한정된 사이트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어디 매인 특수한 글이 아니라,
두루 미칠 수 있는 일반적인 내용들이므로,
이리 옮겨 놓은들,
그리  큰 폐단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차후 이어질 글들에서는 이런 주석없이
다만 "모모YS 사이트에서 겪은 일"이란 intro 글과 함께
소개될 예정입니다.

아울러, 당시 그곳에 연루된 분들에겐 추호도 사감이 없을 뿐더러,
이곳에서도 그 분 신상이 노출되지 않도록 은휘하였습니다.
그리 신분, 사이트 등을 탈색, 탈향 처리하였기로,
이 글, 또 향후 이어질 글들은 그저 추상화된 하나의 독립된 얘기거리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또한, 그런 기대하에, 은휘 처리에 만전을 기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 분들에게 혹 폐가 되지 않을까 염려도 있습니다.
이러할 경우에는 아낌없이 연락 주시면,
경우껏 적극 의견 반영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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