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록(淡綠)
담록(淡綠)
내가 며칠 전 농원으로 들어가는데,
주변 경관을 쳐다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농원 근처엔 이웃 농부들의 고추 밭도 있고, 고구마, 호박 밭도 있다.
고추 밭은 그 동안 율무를 심어왔는데 올해엔 고추를 심었다.
타산이 맞질 않는 듯 작물이 수시로 바뀐다.
올봄 저들은 가느다란 젓가락 같은 것을 심더니만,
묘목마다 비닐 멀칭 위 한 켠에 큰 구멍을 내었다.
필시 비료를 줄 요량이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라기 시작하는데,
폭발하듯 하루 하루 몸체가 커갔다.
징그럽다.
무섭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곁을 지나다 흘깃 보니,
엽색(葉色)은 짙푸르다 못해 아연(啞然)케도 검은 빛이 돈다.
질소분이 과투입되어 그리되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길 건너편 근래 지은 별장을 보니 그 집 텃밭 역시 마찬가지로 짙푸르다.
쥐어 짜면 검푸른 물감이 뚝뚝 떨어지고 말 것 같다.
가족끼리 주말마다 들려 키우는 양 싶은데,
비료를 얼마나 처넣었기에 저리 잎 색깔이 짙은가?
다시 시선을 옮겨 언덕 위 우리 농원을 둘러보니,
물색(物色)이 너무도 곱다.
연한 녹색으로 은은히 물이 들어 있는 것이다.
내가 뽐내려는 것이 아니다.
나도 놀랐기 때문이다.
순간 깨달음이 전광석화처럼 찾아왔던 것이다.
담록(淡綠)
블루베리 잎은 물론 잡초까지 색이 짙지 않다.
음전한 여인네를 대하는 듯 마음까지 정갈해진다.
요즘 들이든 밭이든 그 물색이 검푸르러,
마치 누항(陋巷)의 화냥년이 밤일 나가려 쳐바르며 꾸미듯,
꼴 사납기 짝이 없다.
봄 역시 마찬가지다.
그 계절인즉슨 신록이 온 들녘을 덮어야 할 터이지만,
요새 밭 꼬락서니는 왼통 검은 색 일색이다.
밭을 갈고는 바로 검은 색 멀칭 비닐로 도배를 해놓기 때문이다.
숨구멍 하나 없이 온 대지를 꼭 봉해놓는다.
그야말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인 게라.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아, 왕소군(王昭君)은 한(恨)이 깊어 풀을 보고도 이리 애닯히 탄(歎)하였을지리라.
나는 풀도 없는 검은 들녘을 보고 망연자실(茫然自失) 그저 사라진 님을 그리워 하노라.
농원 가근방 일대는 하나 같이 검은 빛이 점령을 하였으되,
오로지 우리 밭만이 신록으로 여여히 빛난다.
도대체가 만물이 생동하는 봄날,
검은 색으로 온 동네가 빛을 잃고 있는 게 가당키나 한 노릇이냐?
우리 밭은 그 가운데 의연히 초록색 빛을 발한다.
현대인의 폭력에 의해 억압된 자연의 섭리를 홀로 기억해내며,
외로히 봄의 전령이 되어 대지의 귀퉁이를 지킨다.
지금 우리 밭은 거의 풀밭 수준이다.
요즘 구역을 나눠 예초 작업을 하는데,
시간 여유가 없어 작업 진척이 잘 나가지 않는다.
우리 밭은 비료를 전혀 투입하지 않기에,
물색이 짙지 않고 자연스럽게 고유의 연녹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색(物色)이란 무엇인가?
물 자체가 본디 성품대로 생을 영위할 때,
나타나는 표징(表徵) 색인 게라.
이게 구체적으로는 털색이라든가, 잎이나 가지 색으로 발현된다.
때론 이를 넘어 형상(形狀)이란 뜻으로 전의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 무엇이 되었던 물색이란 제 존재의 동일성(identity)을 외적 표식으로 드러낸다.
헌데 과연 우리가 사는 현대에,
각물(各物)이 제 고유 물색을 유지하고 살아가는가?
인간에 의해 제 물색을 잃어버린 생명에 대한 감상(感傷)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주변과 극명하니 대비가 되는 모습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봄날은 검은 빛에 슬펐지만,
여름 날엔 담록의 순수의지에 귀의한다.
나의 을밀자연농법은 이리 스스로를 구원한다.
우리 밭 블루베리는 비료없이 자라기 때문에,
당연 성체 내에 질소분이 적다.
비료는 N(질소), P(인), K(칼륨)이 주요 성분이데,
그 중에서도 질소분이 가장 많이 들어 있다.
주변 이웃 밭들은 질소분 비료를 많이 투하하기 때문에,
당연 성체나 열매에 질소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저 짙푸르다 못해 검은 빛이 도는 잎색은,
바로 이 질소 분이 과잉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니깐 하다못해 농진청이라든가 농업기술센터에서 권하는,
표준 시비량만 넣어도 다소 나으련만 보통은 이게 잘 지켜지지 않는다.
농민들이 비료를 넣다보면 욕심이 발동하여,
과투입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게 옳지 않다는 것은 이곳에서 몇 차 다룬 바 있어 재론하지 않는다.
다만 저리 비료를 많이 넣는 모습을 보자하니,
작금의 공장식 축산업의 작태가 오버랩되고 있는 것이다.
동물들을 좁은 울 안에 구겨 넣다시피 하고서는,
각종 성장 호르몬이라든가, 항생제를 써가면서,
증체량 제고에 유리한 사료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먹인다.
이에 따라 증체 목표는 빠르게 달성되지만,
그 동안 동물들은 각종 병에 노출되고 건강은 약화된다.
거기 묶인 동물들은 슬픔으로 하루를 시작하여,
분노로 하루를 마감한다.
이 현장엔 질병 예방약 처방 프로그램이 필수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병 주고 약주는 격이다.
병이 날 지경으로 성장과 증체를 꾀하는 조작질을 하고서는,
병을 우려하여 각종 약을 한껏 처먹이는 것이다.
슬픈 현실이다.
난 일반 농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과정이 재현되고 있다고 느낀다.
수확량 제고에 목을 맨 사람들은 비료니 영양제니 하며 과투입을 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성체는 제 품성 한계를 넘어 한껏 자라고,
열매는 비정상적으로 많이 달리게 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식물체를 약하게 하고 병충해를 끌어들이게 된다.
그러자니 의당 농약이 뒤를 이어 밭에 투입된다.
비료만 가지고는 절대 현대 농업이 유지가 아니 된다.
비료로 인한 부작용을 농약으로 재쳐 막지 않으면 저 체제는 이내 쓰러지고 만다.
이렇듯 비료와 농약이 커플링 되어 현대 농업이 유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욕심과 자본의 작동 원리에 의해,
사육된 동물이나, 재배된 식물은 슬픔과 분노의 산물인 게라.
결코 사람 몸에 들어가 온전한 역할을 할 수 없다.
저들 생명은 슬픔과 분노로 인해 분비된 각종 호르몬으로 젖어 있고,
약화된 면역 체계를 갖고 있는 성체인지라 가까스로 명을 부지하고 있을 뿐,
내적으론 이미 결단이 나 있을 것이다.
식물체를 놓고 볼 때 잎은 광합성(光合成)을 한다.
즉 빛으로 빚어낸 그 결정, 즉 탄수화물은 태양의 선물인 게라.
이를 취함은 곧 태양신의 자애와 위신력(威神力)을 전이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
블루베리 열매 역시 구연산, 호박산 등의 유기산과 당질(糖質, glucide),
즉 탄수화물의 구현체인 것이다.
영혼이 깨끗한 이는 이 절대 순수 앞에 경건해지고 만다.
아, 위대한 태양신의 은혜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가만히 멈춰 의식을 집중해보라.
빛으로 만들어진 탄소 화합물이라니.
도대체 이런 기적 같은 일에 당신의 감수성이 일깨 일어나지 않는가?
헌데 밭에 질소 비료가 과잉 투하되면,
엽체(葉體)나 과실(果實)은 잔류 질소로 인해 오염(汚染)되고 만다.
이 잔류 질소 즉 아질산염은 1급 발암물질임을 알아야 한다.
산출량을 늘리기 위한 인간의 욕망은 비료나 농약 투입으로,
일응 상업적 제 만족을 얻을지 모른다.
허나 저들이 만들어내 산물은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영혼 또는 순수라 하여도 좋다 바로 이것이 거세되어 있다.
게다가 대개는 잔류 질소 등의 건강 위해 물질이 섞박혀 있다.
아, 참람스럽구나.
처음엔 농장 구석 진 곳에 돼지 풀이 조금 자라고 있었다.
이를 열심히 제거를 하여 지금은 거의 없어져 버렸다.
다만 하우스 측편 이웃과 접한 한줌 뱀허리 같이 좁다란 곳은,
연신 씨앗이 날라와 아직도 자라고 있다.
농장 전체로 퍼지는 것을 하우스가 막아내고 있으니 그냥 참아내고 있다.
어느날 이들을 보니 하나 같이 벌레가 먹어 잎에 구멍이 숭숭 나있다.
저들 곁을 지나자면 똥냄새까지 나는 것 같다.
내 자세한 조사를 해보지 않았지만,
돼지풀 성체엔 아마도 질소분이 상당량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풀인 주제에도 사람 키를 넘게 자라지 않은가 말이다.
이리 자람이 빠른 것은 그 원인 성분이 질소분이 이끈다.
여긴 필연적으로 병충해가 들끓게 된다.
병충해 입장에서 질소분으로 채워진 성체를 공격하기 좋기 때문이다.
조직 밀도가 소(疏)하여 약하기 때문에 병충해가 해를 입히기 용이하다.
탄질율이란 무엇인가?
식물체의 성체 조성비로되,
오로지 탄소와 질소간 상대 비율을 정량화한 것이다.
(※ 탄질율은 탄소동화 작용으로 만들어진 탄수화물과, 뿌리에서 흡수한 질소의 상대 비율이,
화아 형성내지는 그 이후의 생식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토양 유기물내 탄소와 질소의 비율을 재는 척도로 많이 쓰인다.)
식물체마다 탄질율은 차이가 난다.
가령 벼과 식물의 탄질율은 20:1 이상, 콩과 식물의 탄질율은 20:1 이하이다.
하지만 제 고유 품성을 넘어 외부 요인에 의해 탄질율이 변하면 질적 변화가 나타난다.
가령 질소분이 많아지면(탄질율이 낮아지면) 여축없이 비료가 과잉 투하된 것이다.
이런 것은 건강을 생각한다면 취하지 않는 것이 좋다.
최근 유기농을 넘어 자연농법이니 탄소농법이니 하며 여러 생소한 농법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 탄소농법이란 바로 질소 비료 과잉 투하에 따른 반성에서 출발한 것이다.
저들 밭은 상대 탄소비율이 높다.
현대 농학 이론으로는 이러한 밭에선 농작물 재배가 어렵다.
하지만 저들은 일반 관행농이나 유기농을 능가하는 실적을 올리고 있다.
이는 현대 농학 이론이 잘못 되었거나,
아직 이론이 완전히 정립이 되지 못한 소이가 아닌가 한다.
‘작은 고추가 맵다.’
작은 것이 결코 험이 되지 않는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무엇이든지 커야 알아준다.
슈퍼 복분자, 왕자두, 대왕매실 ....
도대체가 엊그제까지 접하던 과실들은 이젠 만나기 어렵다.
오늘 처와 함께 붉은 물고추를 사러 장에 갔었는데,
장바닥 좌판 위엔 모두 가지만하니 큰 것만 진열이 되어 있더라.
예전처럼 아담하니 얌전하게 진열대를 지키고 있던 것은 이제 씨알 하나 없이 자취를 감췄다.
품종 개량이란 명목하에 모두 다 큰 것을 향해 달려들 가고 있는 것이다.
夫香美脆味,厚酒肥肉,甘口而病形;曼理皓齒,說情而捐精。故去甚去泰,身乃無害。
무릇 향기롭고 보기 좋은 진한 술과 고기는 입에 달지만 몸에 병이 되고,
보드라운 살결과 흰 이를 가진 미인은 욕정을 일으키지만 정력을 해친다.
고로 너무 심하거나 넘치지 않으면 몸에 해가 없을 것이다.
크고 곧은 고추가 얼핏 보기엔 그럴 듯하지만 몸에 좋으리란 보장이 없다.
살구만한 매실, 대추 만한 오디, 오이만한 대추 ...
슈퍼, 대왕 따위의 수식어로 장식된 거대 과일들은 제 본디 품성을 잃고 있다.
슈퍼, 대왕의 다음, 저들은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내 생각엔 그 다음은 괴물(怪物) 외에 더 될 것이 없다.
이들은 사람의 눈을 현혹 시킬 뿐, 결코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저 제 품성을 오롯히 하여 절의(節義)를 지키는 본디 제것, 그 예전 것만 못하다.
진실(眞實), 이야말로 진짜배기 열매는 바로 이러한 것에 기(基)하리라.
팽창조대소(膨脹粗大素)
내가 앞서 쓴 글에서 말하였듯 이런 것들은 다 병의 원인들인 게라.
(※ 참고 글 : ☞ 2013/09/16 - [소요유] - 슈퍼호박 단상(斷想))
질소 비료를 왕창 넣어 뻥 튀기듯 부풀려 놓는 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DNA 자체를 조작하여 개체 조직 자체를 팽창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묻지 않아도 병충해에 취약하다.
게다가 인체에 들어가면 발암 기제의 토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다.
암세포 역시 이상 팽창하는 것을 상기하라.
질소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탄소가 많이 든 농산물을 취하는 것이 건강에 이롭다.
또한 끔찍할 정도로 커지고 있는 개량 품종보다는,
본래의 크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좋다.
이런 농산물은 섬유질 함량이 높다.
장을 깨끗이 하고 쾌변을 유도하는데도 유리하다.
특히 현대 우리나라 여성들은 거지반 변비에 시달리고 있다.
하룻 밤 사이 잠자리에서 전전불매(輾轉不寐)하며,
빌딩 서너 채를 지었다 허무는 것쯤은 저들에게 일도 아니다.
게다가 주변에 먹거리리라는 것은 모두 해괴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사태가 이러함이니 변비가 어찌 생기지 않으랴?
이러고서야 얼굴에 칼질을 골백번 한들,
어여뻐질 까닭이 있을쏜가?
질소분이 많은 농산물은 잘 부패하고 보관도 어렵다.
잔류 질소는 아질산염이 되어 암을 유발하곤 한다.
원소로 따지자면 탄소 비율이 높을수록 섬유소가 많이 들어 있다.
질소분은 살(肉)을 불릴지언정, 정(精)과 기(氣), 나아가 신(神)을 기르지 못한다.
블루베리에 비료를 주지 않고 키우고 있는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여늬 농장의 것에 비해 단단하고 맛이 있다.
저들에 비해 소출량은 좀 적지만 나는 괘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저들은 한껏 용을 써서 증체를 기도하지만,
이게 건강을 담보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농장의 경우 나무가 조금씩이라도 자라기 때문에,
명년엔 당년에 비해 소출량이 늘어난다.
시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소출량은 염려할 절목(節目)이 결코 아니다.
진.선.미.(眞善美)는 역사에 복무하는 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다(歸依).
우리 밭의 블루베리는,
비료나 농약 따위의 인위적 욕망 장치에 묶이지 않고,
해, 달, 물, 바람의 세례를 받아,
제 품성대로 생을 구가(謳歌)하고,
아름답고 진실된 열매를 맺는다.
허우대만 멀쩡한 여늬 열매와는 다르다.
내실(內實)을 기하자는데, 어찌 거죽을 탐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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