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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법집(我法執)

소요유 : 2017. 11. 2. 12:46


아법집(我法執)


내겐 친한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와 지금은 결별하였다.


그는 너무 자존심이 강했다.

이것은 전부터 알았으나,

나중엔 이게 고집(固執)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엔, 그게 그의 자부심이자, 굳건한 자랑스런 자기 확신인줄 알며 이해했다.

하지만, 

달이 차고, 

해가 빛나며,

한참 어렸던,

나의 사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자,

저것은 안일함이 아닌가 여겨졌다.


안일하면,

자신을 돌보지 않게 된다.

安逸이란 마음이 한가로와 편안한 상태를 이른다.

사람이 안일을 구하며, 

쾌락을 찾고자 하면,

미처,

다른 것을 돌볼 틈이 없다.

이 때 마음엔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 사이에 물이 차오르고,

끝내 추운 겨울을 맞이하면 얼음이 얼게 된다.

급기야 얼음은 틈을 어겨 벌리고,

동체(胴體)를 깨뜨려 조각을 내고 만다.


사람의 고집, 집착엔 두 가지가 있다.

아집(我執), 법집(法執)이 그것인데,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선 이를 이중장(二重障)이라 하였다,

즉 두 가지 장애라 하였음이다.


아집이나 법집은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모두 다 아나, 

내가, 법이 실체라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깨우침이 없는 이 역시 마찬가지이듯,

원래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

상좌부(上座部) 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선,

법유(法有)를 주장했다.


하지만, 일체의 존재는,

상의상대(相依相待)하는,

즉 연기(緣起)로 보며, 

내가 실재한다는 아집(我執)과 

법의 실재를 믿는 법집(法執)을,

그릇된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는 반야경(般若經) 계통 경전에서 익히 확인할 수 있지만,

내 개인적 경험으로서는 세칭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용수(龍樹, Nāgārjuna)의 중론(中論, Madhyamaka-śāstra)에서 더욱 확실히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의 논리학을 뛰어넘는 그의 논(論)은,

그 앞에 서면, 심장을 두근두근 한없이 뛰놀게 한다.

제물은 서로 관계를 맺기에, 공하다는 이론은,

결국 공, 연기, 중도가 한 가지임을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眾因緣生法 我說即是無

亦為是假名 亦是中道義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中論)


“여러 인연에 의해 법이 생긴다.

나는 이것을 실체가 공(無)하다고 말한다.

또한 가명(假名)이라 이르며, 중도의 이치라고도 말한다.

일체의 법이란 인연에 따라 생기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은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항차,

이러함인데,

명명백백(明明白白)한 객관적 사실 앞에서도,

자신의 고집을 버리지 않는 사람을 마주할 때,

나는 

어제 실망했고, 

오늘 절망했다.


사실이 제시되고,

바른 깨달음이 일어날 때,

회오(悔悟)가 생기며,

이 때,

새롭고 바른 바위 위에 서서,

새벽 고추자지처럼,

어제를 버리고,

오늘, 곧추 서게 된다.


이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다만,

진리 아니, 사실 앞이라도 매 한가지다.


이 앞에 서서,

제법이 공한 것을 인정함에,

이내 어제의 나를 눈물 흘리며, 

오늘의 나를 춤출 수 있다.


이게 아니 되는 인간은,

지 아무리 배움이 깊고, 능력이 뛰어나도,

내겐 한낱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아, 무명(無明)의 바다 속을 헤매는 중생이란,

얼마나 안타까운가?


도대체,

왜 명명백백한 사실 앞에,

자신의 위신을 지키려 아등바등 함이 눈에 찰 수 있음인가?


나는 이런 이들과는 친할 수 없다.

그저 한 때의 허물을,

덮고 지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종국엔 이런 무명(無明)이 온 세상을,

어둠 속에 묻히게 하며,

사람 간의 믿음을 훼손하게 된다.


내가 한 때,

어떤 사이트에서 탄질율을 두고 논의가 한참 일던 지점에 서있던 적이 있다.

모두들 횡설수설 하던 차,

내가 한 의견을 내었던 적이 있다.


탄질율이란 한 물질의 탄소와 질소의 비율을 말한다.


물음 하나가 있다.


‘탄질율 a와 탄질율 b인 두 물체를 합치면 최종 탄질율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물음 자체가 엉터리라.

답을 낼 수가 없다.


이것 제대로 하자면,

이리 다시 물어야 한다.


‘탄질율 a인 A kg, 탄질율 b인 B kg 두 물체를 합치면 최종 탄질율은 어떻게 되는가?’


이리 물어야 답을 낼 수 있다.


그런데 전자의 물음이나, 후자의 물음을 구별할 수도 없는 이들이,

이리저리 구차한 의견들을 내고 있으니 얼마나 딱한가?

나는 진작에 탄질율 계산 프로그램을 발표한 적이 있다.

(※ 참고 글 : ☞ 탄질율 계산기)


이 양자의 차이를 모르는 한, 

그는 탄질율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모두는 과시 군맹무상(群盲撫象)이라, 

맹인이 되어 저마다 코끼리 상을 그리며, 

제 무릎을 껴안고 자위하고 있었을 뿐이다.


최근에도 이와 유사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현장에서도,

고집을 목격하였다.


나는 기시감(旣視感)을 떠올리며,

전과 다르게 단호히 그 고집을 대하였다.

이 고집을 받아들이면,

종국엔 더 아픈 사태를 맞을 수도 있다.

차라리 나는 오늘 그저 솔직해지고자 하였다.


若一切不空 則無有生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


만약 일체가 공하지 않다면,

생멸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있음이 없는 것이,

사성체의 법이다.


대개 있음의 존재는,

있음을 추구한다.

하지만, 있음이,

매양 나고, 

바로 죽음에 이르름은,

실로 일체 제법이 공하기 때문이다.


제법이 공하지 않다고 믿기에,

고집을 피우며,

땡깡을 피게 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알고 있다.

이들이 나를 떠나고, 다시 다가옴이란,

실로, 

객주들이 들병이집 드나듦과 매한가지라,

아랫도리가 뻑쩍지근 차오르고, 전낭(錢囊)이 두둑해지면 오고,

아래가 시들해지고, 쩐이 떨어지면 돌아갈 밖에 없는 법이니.

이는 실로 시답지 않은 일일 뿐.


다 이는 인연 因緣所生法을 따르는 것이라,

내맡겨둘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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