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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롱(賣弄)

소요유 : 2017.11.10 10:47


오늘, 문득 한 글귀를 떠올린다.


而親近倖臣,未崇斷金,驕溢踰法,多請徒士,盛修第舍,賣弄威福。道路讙譁,眾所聞見。地動之變,近在城郭,殆為此發。

(後漢書)


이 글은 양진(楊震)이 황제에게 간하는 글이로되,

간신들이 황제의 총애를 믿고, 교만하고, 법을 무시하며 별 짓을 다 저지르고 있으니,

지진이 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빗대고 있는 것이다.


이중, 특히,

賣弄威福。道路讙譁

이 글귀는,

위세와 복을 팔며, 자랑하기 바쁘니, 

길가에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다는 뜻이다.


매롱(賣弄)이란 말은 요즘 잘 사용하지 않지만,

현대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듯,

예전에 곧잘 사용하던 말이다.

사전에 따르면,

‘뇌물을 받고 권리를 파는 따위로 농간을 부리다.’라 풀이 되어 있다.


하지만,

賣弄이란 자의를 자세히 따져보면, 

사전의 표면적 풀이 외에, 

숨겨진 깊은 뜻을 건져 올릴 수 있다.

賣는 본디 으스대며, 자랑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弄은 상대를 멋대로 놀리며, 깔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賣弄威福은,

잔뜩 위세를 부리고, 복을 팔지만,

이게 진심으로 상대를 존중하여 그리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내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든가, 필요치 않으며,

언제고 마음이 뒤바뀌어 도리어 해를 끼치게 될는지 알 수 없다.


威福은 威와 福이니,

구체적 현실 세계에선,

곧 관직과 재물로 대표된다.

주위 사람에게 관직을 높여주고, 재물을 푸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을 것도 없이 수족처럼 부리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작금의 정치 현실을 보라.

남재준, 김관진, 故변창훈, 故정씨, 방송사 대표 등등을 보면,

이 모두는 威福의 제물이거나, 示威와 降福의 주체인 것이다.

하지만, 그 정점을 거슬려 올라가면 당시 정권의 꼭짓점에 位한 자가 있음이다.

이 모두는 賣弄하고, 기꺼이 威福에 阿諂하던 이에 불과하다.


賣弄은 때론 위세를 부리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저 체면을 차리며, 생색을 내는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체면을 차리고, 생색을 낼 때는 잠시 우쭐해질 수 있다.

하지만, 대개 범인(凡人)은 남에게 복을 나눠주고, 도움을 주는 데엔 한계가 있음이라,

저들은 일정 선을 넘는 정도까지 부담을 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부담을 견딜 정도를 넘어선다면,

체면을 차릴 이유가 없어진다.

체면이나 생색은 어디까지나,

철회하기 직전까지의 피로 한계가 있는 것이다.

賣弄은 바로 이런 경계 선상 안짝에 서있는 사람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엔 곧잘 모금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지키고,

뜻을 모아 행동을 일으키곤 한다.

가령 어떤 발의자가 무엇을 하자며 동참을 호소하게 되면,

사람들은 십시일반(十匙一飯) 푼돈을 쾌척하여,

힘을 보태며, 그 뜻에 호응을 하게 된다.

여러 사람이 많이 참여할수록,

이 일의 성공은 밝다.


헌데, 큰 목돈을 요구 받는다든가,

아무리 작은 푼돈이라도 누차 지속적인 거출(醵出, ≒갹출)이 예정된다면,

그 모금의 목표 활동이 앞에서처럼 잘 진척될는지는 미지수다.  


갹출금을 잘게 쪼갤수록 참여하는 개인의 부담은 적어지며,

체면, 생색의 기회를 널리 뿌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럴수록 더 많은 사람이 참여가 없으면 모금의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런즉, 모금은 ‘賣弄’을 파는(賣) 형식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고, 활동을 연대하는 장치가 된다.


대단히 교묘한 일이 아닌가?

뜻을 모으거나, 아름다운 사업에 동참을 함에 있어,

실인즉 賣弄이란,

결코 작위적 주체의 내심의 실질, 그리고 그 견고함은 묻고 있지 않고 있다.

외려, 악의는 아닐지라도,

선전과 꾐이,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질펀하니 뿌려진다.


참여하는 개별 주체들의 실질 내용은,

개인 스스로의 양심이 점검해야 할 노릇이나,

이게 어느 정도 수준에서 이뤄질는지는 아무도 그 끝을 전망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저런 형식의 모금은 언제나 일시적이며, 불안함을 내포한다.


모금에 참여하는 개인 입장에서 보자면,

참여의 지속성은 그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외왕(外王)으로써,

그리고 내심의 실천 의지의 굳건함은 그 내성(內聖)을 반영한다.


賣弄은 본질적으로 비열한 짓이지만,

이게 짐짓 아닌 척, 선의로 포장되어,

개인의 위선을 위해, 또는 다수의 대중을 동원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賣弄은 어떠한 경우라도,

의지할 것이 되지 못한다.

이를 깨닫지 못하면,

수파(水波)에 몸을 맡기고,

짓까불리는 지푸라기 신세를 여의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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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보농군 2017.11.15 17:40 PERM. MOD/DEL REPLY

    그래도 하지 않는것 보다 그나마도 그때그때 참여 하다보면 나중에 습관이 되지않을까요?
    또 그러다 보면 도를 깨우쳐 진정한 마음이 혹여 들지 않을까
    위로해 봅니다

    bongta 2017.11.16 00:03 신고 PERM MOD/DEL

    옛말에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

    설혹, 시누이가 말짱한 이치를 꿰고,
    제 어미의 지나침을 알고 말렸다한들,
    며느리의 입장에선 이를 바로 받아들이기 용이치 않습니다.
    대개는 말리는 척하지만,
    실인즉, 의뭉스럽게 제 마음을 숨기고,
    시어머니의 나무람을 즐기고 있기 십상이기에,
    이런 속담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말씀은,
    설혹 인정한다 하여도, 최소 베푸는 이의 진정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거짓이 아니라, 진정일지라도,
    받아들이는 이는 슬프고 아픈 입장에 놓여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문에, 마음은 잔뜩 당긴 활처럼 긴장되어,
    조그마한 일에도 놀라고,
    사소한 짓에도 곧잘 상처를 입습니다.

    베푸는 이가, 애오라지 상대를 의식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선행의 축적, 기록을 꾀한다면,
    순간 바로 지옥불에 떨어질 것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만,
    저들의 문법을 빌어 비유로 말씀드린다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베푸는 일은,
    베푸는 이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처지를 진정으로 아파할 때,
    무조건, 비보상적, 반거래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즉,
    베품에 있어서,
    베푸는 이를 고려할 일도,
    그의 설 자리를 챙길 일도 없습니다.
    다만, 상대를 향한 베푸는 일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헌즉, 베풀 때는,
    나를 잊고, 상대만을 의식하여야 할 노릇이며,
    결코 보상을 기대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세 때 면죄부를 팔며,
    교황, 교회는 뭇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겠다 하였지만,
    실상은 주교의 사치와 농탕질로 파탄난 재정을 메꾸고자 꾸민 짓에 불과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에 응하여,
    다투어 재물을 바치며,
    내생의 복을 구하였습니다.

    장미십자회니, 성당기사단 역시, 십일조를 거둬,
    거만의 재물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이 비밀리에 힘을 기르고 있다,
    언젠가는 일어나 다음을 도모하리란,
    소위 음모론이 지금도 끊임없이 나돕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도 거의 대기업, 재벌의 탐욕을 방불할 정도로,
    거만의 재물을 쌓으며, 이도 모자라 세습적 권세, 목사직을 자손에게 물려줄 일을 획책합니다.

    이런 교회, 목사 아래에서 무릎 꿇고,
    면죄부 사고, 연봇돈 바치며, 내생의 안락을 구하는 신도들은,
    또한 과연 올바른가?
    저는 이런 물음을 던지고 싶습니다.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은 것이란 생각에 앞서,
    그 함이 순전히 과연 하느님의 말씀에 합당한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 함이 나의 선행을 쌓는 것으로 유효한 것인가?
    아니면 오직 남을 위한 것이었는가?
    이 물음에 솔직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내 선행을 입증하거나,
    미래의 복덕을 거증할 것으로써 그 함이 기능한다면,
    이는 여간 슬픈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독일 알브레히트는 대주교가 되기 위해 돈을 풀며, 재정이 파탄나자,
    교황에게 면죄부 판매권을 요청합니다.

    "상자 속으로 던져 넣는 돈이 짤랑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구원받는다"

    이리 신도들을 향해 거짓 선전을 합니다.
    하지만 신도들은 앞 다투어 돈을 던져 면죄부를 삽니다.
    결국 주교나 신도나 모두 도적질에 동참함에 있어 하나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를 두고 마틴루터는 이리 말합니다.

    "돈이 상자 속에 딸랑하고 떨어지면, 욕심과 탐욕도 분명히 증가한다"

    교회 일이,
    신앙 생활이,
    오직 자신의 선행을 기록하는 일로,
    그리고 내세의 안락을 구하는 짓으로 타락한다면,
    이는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지적하신 습관이 아니라,
    다만 단 한 순간일지라도,
    참다운 각성으로 성립된다고 생각합니다.
    축적이 아니라,
    Now and Here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바로 행할 뿐인 것입니다.

    저의 다른 글들을 여기 소개해둡니다.

    무상보시(無相布施)
    http://bongta.tistory.com/436

    시불망보(施不望報)
    http://bongta.tistory.com/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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