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피로(疲勞)

소요유 : 2017. 11. 13. 14:00


피로(疲勞)


예전에 어떤 카페에서 나와 다른 이와 논쟁이 붙었다.

그런데 차차 논쟁의 당사자 외에 객들이 들러붙으니,

처음에 활기를 띄던 논쟁 판은 아연 난장판으로 바뀌고 말 조짐을 보였다.

이 때, 한 이가 나타나 이젠 피로하니 그만들 두라며 짐짓 점잖은 양, 조빼는 말을 뱉었다.


지금 양 당사자는 자신을 변호하고, 상대를 꾸짖으며, 한껏 달아오르고 있는데,

이런 김빠지는 말을 뱉으니 녀석이 얼만 미웠던지 모르겠다.

아마 곁에 있다면 녀석에게 언어의 따발총을 쏘아대며 궁지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추’ 란 책에 등장하는 다음 글이 생각난다.


「마 가브떼 라 나타, 마개를 뽑아 김을 좀 빼란 말이야.」

잔뜩 화가 나 있는 사람, 머리 뒤꼭지에 있는 코르크 마개 때문에 머리의 혈압이 아주 높아져 있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한다. 코르크 마개를 잠깐 뽑으면, 피시시시시,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벨보의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아주 덧없는 것으로 보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내게는 그게 재미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그런 태도를 오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런 말투가, 다른 사람의 범용함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경멸의 표현으로 본 것이었다.

아블라피아의 비밀, 벨보의 영혼을 깨뜨리고 들어와서야 비로소, 인생의 비밀에 대한 그의 접근 태도, 그의 인생철학이 모두 멜랑꼴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지적인 방약무인은 실은 절대자에 대한 갈증을 위장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았다.


한껏 긴장하고 있는 사람에게,

‘김을 빼란 말이다.’

라는 말은 얼마나 멋진가?

무책임한 크기만큼 더욱 빛이 나고,

무엇에나 꺼리낄 것이 없는 방관자의 멜랑꼴리란 얼마나 멋진가?


주인공은 벨보의 이런 모습을 보고 경멸의 표현으로 보았으나,

이게 실인즉 그의 기질적 멜랑꼴리에 기반한, 

절대자에 대한 갈증을 위장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기실, 절대자에 대한 갈증에 비하면,

누항(陋巷) 끝에 박혀있는 목로주점에서,

술꾼들이 술이 떡이 되어,

떠드는 말이란 게 얼마나 하찮은가 말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당시 붙은 논쟁의 내용 역시 절대자에 대한 갈증이었다면,

피로하니 그만두자고 간단히 말할 수 있었겠는가?


내 논쟁의 상대는 제 자존심에 관련된 것일는지 모르지만,

나에겐 절대적 신념에 대한 문제였으니,

내겐 절대자에 대한 갈증과 진배없었다.

이것 거꾸로 여겨도 좋다.


그러니 ‘김을 빼라는 말’은 곧 절대자를 모욕하는 독신(瀆神)에 다름 아니며,

‘피로하다는 말’은 절대적 신념을 능멸하는 얼마나 교만한 말이 아닌가?


가령 세월호 유족들의 절규 앞에서,

‘김을 빼라’, ‘피로하다.’ 이리 태연히 뱉어내고 있는 불한당들이 있다면,

녀석들은 모두 독신(瀆神)의 죄로, 죽어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그리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살아생전에 뇌옥(牢獄)에 갇히리라.


게다가 단식 투쟁하는 이들 앞에서 폭식 폭거를 자행한 저 패륜 집단을 생각하면,

나는 저들을 단죄하는 일에 결코 피로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내일이 아닌,

남의 일 앞에선,

결코 자신의 멜랑꼴리에 젖을 일도 아니며,

설혹 절대자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다한들,

함부로 ‘뚜껑을 열어 김을 빼라’, ‘피로하다’ 따위의 말을 뱉을 일이 아니다.


그 누구도,

자신이 구하는 또는 믿는 신을 이유로,

남의 신을 독신(瀆神)할 자격은 없다.


※ 피로(疲勞)와 피로(披露)는 다른 것이니,

나의 다른 글(link)을 여기 남겨둔다.


☞ 피로(披露)와 피력(披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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