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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여우 補(비상명)

decentralization : 2018. 3. 8. 10:27


꽃과 여우 補(비상명)


내가 전일 ‘꽃과 여우’란 글을 썼는데,


당시 미처 다루지 못한 이야기를 이제 보태두려고 한다.

(이 글은 일부 내가 전에 썼던 내용과 중복되기도 한다.)


내 글을 통으로 베끼어 어느 곳에 올려놓고는 자신의 것인 양 행세하던 인간이 있었다.

그곳에 들려 몇 자 글을 남겼다.

그러자 거기 똬리를 틀던 쉬파리, 각다귀들이 날뛰는데 가관이더라.


그 중 하나가 설을 푸는데,

이것은 뭐 한문은커녕 한자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화상 하나가 이리 이르고 있다.


그는 도올을 한참 탓하고 있었다.

개나 소나 쥐뿔도 학문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는 이가 곧잘 하듯,

도올 같이 널리 알려진 이를 까내리면,

자신의 위상이 한껏 높아지기라도 하는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道可道 非常道

이 구절에 대한 도올의 풀이가 한마디로 엉터리라는 것이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그러면서, 구름이의

‘노자를 웃긴남자라’ 책을 읽고는 큰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식이다.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노자는 문장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구사하는 사람이지 애매하고 모호하게 적는 스타일이아냐.

"가(可)" 자는 '무엇을 할 수 있다" "해도 좋다" "가하다" 는 의미를 가진 글자다.

그래서 "도가도(道可道 )" 라는 말은 "도를 도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 라는 뜻이다.

그리고 "비상도(非常道)" 는 '하지만 언제나 도라고 할 필요는 없다' 가 된다.

즉 '도를 도라고 불러도 좋지만 꼭 도라고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소리다.


이 첫 문장은 노자가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무엇에 대해서 이름을 '도(道) 라고 붙인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자기가 지금부터 그것의 이름을 '도(道 ) 라고 하기는 하지만 꼭 그것의 이름이 '도(道 ) 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후대의 엉터리 학자들이 그 말을 못 알아먹고 2천 년 동안 헛소리만 해온 거라.

이름을 '깨달음' 이라해도 좋고, '섭리' 라 해도 좋고, '법칙' 리라 해도 좋다는 말이다.

그냥 이름을 붙이다 보니 '도(道)' 라 했을 뿐이니 이름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지 않은가 고민하지 말라는 친절한 설명이다.


그것을 첫줄부터 못 알아먹고 딴 동네 가서 놀고 자빠졌으니 그 담부터는 볼 것도 없이 죄 횡설수설이 될 수밖에 없지.


나도 구름 아줌마의 글을 읽어 보았지만,

좀 들척이다가 그를 더 이상 쫓지 않았다.

나와는 가는 길이 다름을 알기에 더는 그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도올 같은 이를 제 성정에 맞지 않는다고 함부로 폄하하거나,

구름 아줌마 같은 이의 새로운 해석에 대하여 무작정 경도되는,

그 무학(無學)내지는 천학(淺學)들의 경박함을 대하면,

그저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하여, 위 글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밝혀두었다.

기왕에 내가 써내놓은 것이니,

여기 그 부분을 남겨두려고 한다.


구름 아줌마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 분 주장을 존중을 하고 아니고는 별론으로 하고,

저는 그 분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이와 같이 독창적인 의론을 펴는 일에 대하여는,

마음을 열고 즐거이 받아들입니다.

더 많은 이가 나서서 학문에 윤기를 더하고 다양한 꽃을 피우기를 바랍니다.


구름은 쉽고 단호하게 문장을 번역하는데 장기가 있지만,

은밀하고 깊은 곳에 이르러는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더군요.

바로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

이 해석도 그러한 예가 되지요.


'도(道) 라고 하기는 하지만 꼭 그것의 이름이 도(道) 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해석은 이러하다며,

구름이에게 흠뻑 빠져 그가 옳다며 무작정 추종하고 계신데,

그리 서책을 많이 보셨다는 분이,

어찌 남의 이야기는 잘 하시면서 스스로 깨우친 바는 소개를 하지 않으시는지?


나는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을 이리 이해합니다.


도라는 것은 입을 열어 설명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가 있기에 그러하기도 하지만,

도라는 것의 본질적 성격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저 글귀를 이해하는 핵심어는 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道란 고정 불변적, 항구적인 게 아닙니다.

그러니 조동아리를 헐어 말로써 도라고 이를 수는 있지만,

그 순간 특정되어 고정되어 버리고 마니,

도의 본성과 바로 어긋나 버리고 맙니다.

道可道,非常道

이 말은 바로 이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봄철 아지랑이처럼,

손아귀로 잡았다 하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립니다.

이렇듯 도란 결코 대상화 되거나,

고정 불변한 실체가 아니란 소식을 저 글귀는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色無常,受、想、行、識無常,一切行無常


불교에서도 그렇기에 이리 無常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격의불교라는 것도 도가가 불가와 비슷한 측면이 있기에,

꽃다히 아름다운 종교철학적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 그자는 또한 현장(玄奘)의 역경에 대하여 얕은 식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내 이를 대고 따끔하게 나무라주었기도 하였으나, 이에 대하여는 약하기로 한다.)


구름이 식으로 도란 이 이름으로도, 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이리 해석하면 설혹 그 뜻을 어설피 얻을 수는 있을는지 몰라도,

문장을 바로 해석하였다 볼 수는 없습니다.


가령 ooo님께서 좋아하는 똥에도 도가 깃들고,

밥에도 도가 있을 수 있은 즉,

그 어떤 이름을 두고 도를 말 할 수는 있겠지만,

구름이는 최소 저 문장 앞에서,

非常性을 즉각 언급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無常性이니 아예 상조차 부정해버리고 맙니다만.


活句翻成死句


활구는 이내 뒤집어져 사구가 되고 마는 법.


道可道,非常道


여기서는 바로 이 장면을 어떠한 식으로도 그려내야 합니다.

이를 소홀히 하면 구름이처럼 그저 재치있는 재주꾼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다만 구름이의 공덕은,

直顯離言之妙라,

전통적으로 도란 말을 떠나 신묘한 것으로 해석을 하곤 하였는데,

이를 지상으로 낮춰 끌어내려 직절적으로 해석을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


名可名,非常名。


이름을 붙이는 순간,

常名의 세계로 들어가고 만다.

이로부터 비극이 잉태된다.


돼지가 태어나면 축산업자는 귓바퀴를 뚫고 표찰을 달아맨다.

과학 축산이란 명목으로 이리 관리하여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말한다.

돼지가 이를 달가와 할까?

나는 돼지가 화를 내고 있음을 안다.


야생 돼지에겐 이름이 없다.

집돼지에게 야생돼지와 집돼지 하나를 택하라면,

아마도 모두가 야생돼지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몰이꾼에게 쫓기고, 사냥꾼 총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최소 좁은 우리에 갇혀 사육 당하다 도축되는 정해진 운명을 벗어날 수는 있지 않은가?


번식용으로 키워지는 어미 돼지가 사는 곳은 ‘스톨’이라고 불리는 금속 틀이다. 

스톨의 폭은 단 60cm, 길이는 200cm이다. 

어미 돼지는 좁은 스톨 안에서 평생을 산다. 

그것도 자연 수명의 1/20에 불과한 생.

한편으론 욕된 일생을 단축 시킬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스톨(stole) 안에선 뒤돌아서거나 움직일 수 없다. 

평생 취할 수 있는 동작은 앉았다 일어서는 것뿐이며, 

평생 보는 물체는 양돈장의 검은 벽뿐이다. 

(돼지의 한평생 참고)


게다가 새끼를 밴 돼지는 gestation crate라 하여 딱 자신이 몸을 눕힐 상자곽에 갇히고 만다.

귓바퀴 뚫리고 이름을 얻은 댓가는 이리 혹독하다.

인간은 돼지를 이리 기호화, 객체화한다.

그대 이 잔인함에 대한 감성이 아직 남아 있다면,

이름이란 폭력의 비극성도 함께 각성하라.


사람이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린다.

하여, 아이 이름을 짓기 위해 유명한 작명소에 의뢰를 한다든가,

집안에 한학에 조예가 깊은 이를 찾아 좋은 이름을 짓고자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이름 외에 학급 번호가 더 주어진다.

이름도 부족하여, 이젠 아예 무기미한 기호로 객체화 된다.

성인이 되면 주민등록번호를 부여 받게 된다.

이 모두는 주체성를 제각하기 위한 절차에 불과하다.


어떠한 권력이든, 폭력이든, 상대를 객체화하려 의욕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왕은 인민을 신민으로, 조폭은 부하를 노예화시킨다.

그 첫 번째 작업은 상대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이름이 가해지는 순간,

이름을 부여해준 이에게,

이름 받은 자는 모든 것을 앗기게 된다.


名可名,非常名。


노자의 이 언명은 바로 이 실상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는 것이다.


이름은 이리도 저리도 붙일 수 있다.

하지만, 이름의 근원에 非常性이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노자는 이름이란 쇠사슬을 끊고 절대 자유의 세상으로 날아오른다.


마트에 가면, 셈을 치루고 나올 때, 포인트 번호니, 고객 번호니 하는 것을 묻는다.

내가 내 돈 내고 나오면 그 뿐이지,

녀석들에게 왜 제놈들이 멋대로 붙인 번호를 일러주어야 하는가?

나는 포인트니 하는 허튼 짓거리에 말려들지 않는다.

동네 마트엔 내가 선언해두었다.

나는 포인트 적립 따위를 하지 않으니,

내겐 그런 것을 묻지 말라.

나는 가뿐히 바로 셈을 치루고 나온다.


순검 받는 훈련병, 범법자도 아니고,

까짓 0.01% 적립하자고 때마다 검문 받을 이유가 없다.

넘버링(numbering)에 당하고, 카운팅(counting)에 응하는 한,

자유는 없다.

응할 때마다 그대는 코딱지보다 더 못한 푼돈,

따지고 보면 자기가 지불한 돈의 일부에 불과한 것을 보상이란 명목으로 받지만,

저들 마트 주인은 그보다 더 큰 돈을 번다.

내 돈인데, 차라리 애초부터 할인해주지 않고,

처음엔 많이 받아 챙기고는,

그 중 아주 일부만 되돌려줍네 하면서,

거드름 잔뜩 피우며 생색을 내고 있는가?

이 거대한 음모, 노예 시스템에 저항하라.


사토시의 탈중앙화 철학도 기실은 바로 이 비리, 부정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름을 구하지 마라.


동네 마트의 포인트 적립이란, 자유를 억압하는 유치한, 치사한 짓거리임을 깨달을 때,

세상엔 온갖 이름이란 그물이 그대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음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名可名,非常名。


봄비가 내리는 오늘 아침,

이 뜻을 이리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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