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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대(靈臺)

decentralization : 2018.05.31 18:35


자공이 남쪽 초나라에 놀다가 진나라로 돌아가려고 한수 남안을 지나는데,

노인 하나가 밭이랑을 만드는 참이었다.

그는 파낸 우물 안으로 들어가 옹기에 물을 길어 밭에 물을 대었다.

허나, 힘을 쓰나 별로 이룬 것은 없었다.

자공이 말한다.


“여기 기계가 있소 하루에 백이랑에 물을 댈 수 있소.

힘은 적게 들고 공은 많을 것이니 써보지 않으려오?”


그러나 노인은 쳐다보며,


“그게 무엇이오?”


“나무를 깎아 만드는데, 뒤는 무겁고 앞은 가벼워,

물을 끌어오는 게 마치 물건 꺼내듯 하고,

빠르기가 마치 물 끓듯 하니,

그 이름인즉 용두레라고 하오.”


그러자 노인 농부는 분연히 낯색을 바꾸며 웃음 지며 이른다.


“내가 우리 스승께 들으니,

기계가 있으면 그를 쓰는 기사(機事)가 있으며,

기사(機事)가 있으면 필시 기심(機心)이 있다.

기심(機心)이 흉중에 있으면, 순백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

순백을 갖추지 못하면 정신이 안정되지 못한다.

정신이 안정되지 못하면 도를 지킬 수 없다.

내가 이를 아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즉 하지 않을 뿐이다.”


자공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子貢南遊於楚,反於晉,過漢陰,見一丈人方將為圃畦,鑿隧而入井,抱甕而出灌,搰搰然用力甚多而見功寡。子貢曰:“有械於此,一日浸百畦,用力甚寡而見功多,夫子不欲乎?”為圃者卬而視之曰:“奈何?”曰:“鑿木為機,後重前輕,挈水若抽,數如泆湯,其名為槔。”為圃者忿然作色而笑曰:“吾聞之吾師:‘有機械者必有機事,有機事者必有機心。’機心存於胸中,則純白不備;純白不備,則神生不定;神生不定者,道之所不載也。吾非不知,羞而不為也。”子貢瞞然慚,俯而不對。


이상은 장자(莊子)의 천지(天地)에 나오는 글귀이다.

기심(機心)을 경계하는 말씀으로는 자못 흉통(胸桶)을 울리는 명문이다.


機械 → 機事 → 機心


이 말씀의 구조는 기심이 있기에 기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있음으로서 절로 그를 쓸 일이 생겨나고,

그러함으로서 이제 기계를 쓰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정신이 안정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곧 욕심이 잉태됨을 경계하고 있음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이젠 조금 더 효율이 좋은 것을 찾을 테이고,

그것을 찾아 삼만 리인들 걸어 헤매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 욕심이란 끝이 없음이다.

그러고서 어찌 그 마음보에 도를 실을 수 있으랴?


농사를 지으면서,

여러 연장, 농기구를 다루게 된다.

그러다가 힘에 부치면 이젠 기계를 넘보게 된다.

그 때마다, 장자의 기심(機心)을 떠올렸다.

하지만, 기계를 쓰려는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두더지가 나타나자 두더지 퇴치기를 만들었고,

새가 극성을 부리자 조류 퇴치기를 제작하였다.

새란 정말 막감당이라,

나는 지금 새로운 장치를 더 고안해두고 있다.


헌데, 이게 나중엔 마음이 안돈되자,

생각이 따라 바뀌기도 한다.

가령 두더지 퇴치기를 설치하자, 두더지가 근 8할은 도망을 가버렸다.

하지만 기계를 가동하지 않자 다시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두더지는 밭의 여기저기에 구멍을 내고 땅 밑으로는 굴처럼 길을 내고 다닌다.

그러자 나는 생각을 바꿔 동굴을 어서 더 많이 뚫고 다녀라,

이리 주문을 걸었다.

땅 속에 길이 나면 공기 유통이 잘 되고,

식물 뿌리에 충분한 공기를 공급할 수 있다.

게다가 땅이 성글어지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간혹 뿌리가 다치겠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용서를 하자.

그리고는 내버려 두었다.


이젠 지표면에 빠끔히 고개를 내민 두더지 구멍을 보아도 아무런 갈등이 없다.

그저 무심히 지나치고 만다.

마음을 놔버리자 새로운 경계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새 역시 매 한가지인데,

새가 마냥 해만 끼치는 것이 아니다.

내 이를 다루고자 새 해부학까지 연구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주제 글을 달리 하여 오래도록 말씀을 나누어야하므로 이제 그친다.


機心은 글자 그대로 기계를 이용하려는 마음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게 간교한 마음, 또는 투기(投機)를 하려는 마음을 일컫기도 한다.

이 양자의 機는 본디 다른 것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은 지점에 귀착하고 있다.


노력을 절약하고,

효율을 꾀하고자 함에,

장자는 왜 경계의 말씀을 내리고 있는 것인가?


“有心栽花花不開,無心插柳柳成蔭”

(增廣賢文 - 清 周希陶)


“마음을 써서 꽃을 재배하나 꽃은 피지 않는다.

허나 무심하니 버들을 꺾어 심었으되 버들은 잘 자라 그늘을 이를 정도로 잘 자라다.”


여기서 有心과 無心은 대귀를 이룬다.

아울러 栽와 插 역시 서로를 對하고 있다.

栽는 인간이 有心으로 식물을 대하는 것이요,

插은 그저 無心히 식물을 땅에 꽂으며 첫 출발만 도와주었을 뿐이다.

그러하였던 것인데,

不開,成蔭

이리 양 극단으로 나뉘고 만다.


결국은 기심(機心)이 문제다.

무엇인가를 꾀하는 마음.

자기 딴에는 잘 해보겠다고 용심(用心)을 내서 용력(用力)을 쓰나,

이게 다 좁은 소견인 게다.

나무는 다 제 명운대로 자라는 것,

사람의 손길대로, 욕심대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다.


트레이딩을 할 때도,

제 딴에는 잘 접근하였다고 하지만,

시세란 게 마음대로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다.

꾀하는 대로 시세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시세는 다 제 갈 길을 스스로 가는 것이다.


그런즉 기심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장자의 저 우화(寓話) 구조는,

機械 → 機事 → 機心

이리 되어 있다.

기심은 기계로부터 따라 나온다.


교지(巧智)는 기심으로 나오고,

기심은 외물을 보는 족족 따라 욕심이 발하여지며 만들어진다.

가령 물욕, 성욕, 애욕 따위의 노예가 되어, 인생의 모든 분란이 일어난다.


그런즉 장자에선 靜心, 常心을 지킬 것을 말하고 있다.

이를 영부(靈府) 또는 영대(靈臺)라고 하기도 하는데,

靈이란 마음 작용의 오묘함을 형용하는 말이고,

府나 臺는 그게 함장(含藏)되어 있는 곳을 지칭한다.

이것이야말로 만물의 진상을 비추는 원천이요,

가치 창조의 근원이라고 장자는 말하고 있다.


心은 하나지만,

이처럼 기심과 정심은 서로 대립하고 있다.


과연 정심이 깃드는 영대(靈臺)에서 노닐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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