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정성 원리와 블로그 포스팅
불확정성 원리와 블로그 포스팅
내가 이 제하(題下)에 글을 하나 쓰고자 하는데,
먼저 기초 정보를 확인하고 나서기로 한다.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 uncertainty principle)
이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인데,
수식으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시그마 x : 위치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 편차
시그마 p : 운동량의 평균에 대한 제곱평균제곱근 편차
ℏ(h-bar) : ℏ=h/2π
h : Planck constant)
위치와 운동량의 불확정성은 플랑크 상수로 제한 당하고 있다.
이게 자연계의 실상이다.
이것은 일반인들에게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금씩은 잘못 알고 있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은 이게 측정 때문에 생긴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바른 이해라 할 수 없다.
측정과는 상관없이 입자의 물리적인 특성이 그런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뉴턴 역학에 따라,
위치와 운동량을 특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불확정성 원리라는 것은 이 양자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불완전성이나, 물리학의 부족함이 아니라,
자연의 본질에 속한 문제일 뿐이다.
기실 이러한 성질 때문에 입자가 때론 파동으로 보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빛인데,
빛은 입자와 파동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를 파동입자 이중성(波動粒子二重性, wave-particle duality)이라 한다.
후엔, 빛뿐이 아니고, 모든 물질은 파동입자의 이중성을 갖고 있다고 밝혀졌다.
이는 불확정성 원리의 귀결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은 물질의 원리만이 아니라,
우리 정신의 원리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가령 인물, 사태, 상황을 앞에 두고, 나쁘다 그르다 이리 특정하기보다는,
일정 조건 구속적으로 평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관점에 따라,
어떤 부문이 두드러지게 보이고, 다른 부문은 미약하게 보이는데,
그 강약은 관점에 제한을 받기도 하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사물의 성질이 그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자, 이제 이야기를 바로 시작해본다.
한 사람이 있었다.
귀농하여 치매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의 이야기가 제법 신실한즉, 방송국에서 섭외가 들어와,
방송 출연도 몇 차례 하였다.
헌데, 이이가 앞으론 방송 출연을 하지 않겠다 선언하였다.
게다가 얼마 있지 않아 절필하겠다고 하였다.
왜 그런고 하니,
자신을 속이기 싫다고 하는 것이다.
방송 이것 출연하면, 필경은 연출이 따라 붙는다.
PD가 이것저것 주문하며, 그리 따라 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면 싫어도 도리 없이 응해주곤 한다.
그리 하지 않으면, 저들 생각에,
방송에 올릴 정도의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평소 생활과는 다르게,
보다 자극적이고, 극적인 일탈이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글 쓰는 행위에도, 삿된 짓이 은근히 자행된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짐짓 과장되게 기술되고,
흉한 것은 부러 감추게 된다.
귀농한 이의 블로그를 보면,
모두 좋은 일, 아름다운 이야기만 실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흉한 일, 언짢은 것을 대개 은폐되어 있기 일쑤다.
불확정성 원리에서 위치를 보다 정확히 기술하다 보면,
운동량 분산이 커지고 만다. vice versa.
블로그에 착한 일만 기술하다 보면,
흉한 일이 가려지게 된다.
그 블로그를 보고, 시골 생활이 마냥 아름답구나 하고,
혹여 귀농을 꿈꾸는 이가 있다면,
편측된 정보에 의지하여, 차질을 빚게 된다.
나는 블로그에 내가 귀농하여 겪은 일을, 될 수 있는 한 가감없이 적는다.
특히 갈등, 고충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기술하는 것을 피하지 않는다.
우리네 속언에 ‘좋은 게 좋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싫어한다.
이 말은 진위, 시비를 여의고,
사태를 미봉하며 현실을 덮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무책임한 온정주의에 매몰되고 공적 훈련이 덜 된 미숙한 이들이,
주로 이 언어생활에 익숙하다.
마치 술래잡기 할 때, 장독대 뒤로 숨듯,
저 말은, 이를 장독대 삼아, 진실을 감춘다.
불확정성 원리는 비단(非但) 위치와 운동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두 가치 중 어느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하나의 실상을 바로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깨달음을 준다.
是故亂國之俗,其學者則稱先王之道,以籍仁義,盛容服而飾辯說,以疑當世之法而貳人主之心。其言古(談)者,為設詐稱,借於外力,以成其私而遺社稷之利。其帶劍者,聚徒屬,立節操,以顯其名而犯五官之禁。其患御者,積於私門,盡貨賂而用重人之謁,退汗馬之勞。其商工之民,修治苦窳之器,聚弗靡之財,蓄積待時而侔農夫之利。此五者,邦之蠹也。人主不除此五蠹之民,不養耿介之士,則海內雖有破亡之國,削滅之朝,亦勿怪矣。
(韓非子, 五蠹)
“이런 고로, 어지러운 나라의 풍속이 (이러하다.)
그 학자들은 선왕의 도를 칭송하는 즉,
인의를 빙자하고, 옷차림을 성대하니 차리고서는, 변설을 꾸며,
당대의 법을 의문 나게 하고, 군주의 마음을 회의케 한다.
그 유세자들은 거짓을 세워 말하고, 밖으로 힘을 빌려서,
삿됨을 꾀하여, 사직의 이익을 잃고 있다.
검을 옆구리에 찬 자들은 무리를 모아, 의리를 내세우며,
그 이름을 드러내, 관의 금하는 바를 범하고 있다.
측근에 있는 자들은 개인 세력자에게 친분을 쌓아,
뇌물을 보내고, 중요한 자리의 인사 청탁을 받아들여,
(정작) 힘든 노고를 (그 공적을) 물리친다.
상공(商工)인들은 조악한 물건을 고치고, 비싼 재물을 모으며,
때를 기다려 농부들의 이익을 빼앗는다.
이들 다섯은 나라의 좀벌레이다.
군주가 이 다섯 좀벌레들을 제거하지 않고,
강직한 이들을 길러내지 못한다면,
천하에 깨지고 망하는 나라와,
깎이고 멸하는 조정이 있더라도,
역시나 괴이할 바가 없음이다.”
한비자의 오두 편 마지막 구절을 이끌어내 보았다.
사물의 한 측면 만을 강조하는 이들을 경계하여야 한다.
대개는 이는 제 이해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사물엔 안팎이 있으며, 음양이 있다.
마냥 좋은 것만 늘어지게 파는 이를 경계하여야 한다.
자칫 이에 취하다 보면, 사기를 당하거나, 일을 크게 그르치게 된다.
헌즉, 사물엔 여러 가치가 내재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夫仁者好偉,和者好粉,智者好彈,有慇懃之意者好麗。
“인자는 뛰어나고 훌륭한 것을 좋아하고, 화자는 분식하는 것을 좋아하고,
지자는 거문고 타는 것을 좋아하고, 은근한 뜻이 있는 자는 고운 것을 좋아한다.”
和者好粉이라,
남과 함께 어울리기를 꾀하는 이는
분단장하여 꾸미기 좋아한다는 말이다.
하니까, 블로그 글이 착한 일 일색, 아름다운 글로 온통 채워져 있다면,
그이가 남과 다투기를 꺼리고, 그저 마냥 좋게 보이길 원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인자, 화자, 지자, ....
이리 여러 사람이 있듯이,
사물에도 여러 측면이 있는 법.
자칫 하나의 측면만 강조된 글, 그런 글을 짓는 인물을 만나면,
그 밖의 것이 노출되어 있지 않았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