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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 재배

농사 : 2019. 8. 6. 13:16


노지 재배


우리 지역에 블루베리를 노지 재배 한다며,

상품 팩 거죽 라벨에 소개 글로 장식한 이가 있다.


이것을 처음 대하자,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싶었다.


아니, 그럼 노지 재배하지 않고,

하우스 재배라도 하는 농장이 있단 말인가?

물론 아랫녘 제주에선 가온 시설을 갖추고,

이른 봄 출하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우리 지역처럼 추운 곳에선,

가온 재배를 하면, 난방비를 감당할 수 없을 터이며,

그냥 일반 무가온 하우스 재배를 한다하여도 이게 별 실익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하면, 웃자람 폐해와 병충해가 기승을 부리며,

반드시 농약을 치지 않을 수 없는 사태에 봉착하게 된다.


그런데, 어제 바로 이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불현듯, 그 농장주가 6년 전, 

친환경 인증을 받았다며 희색이 만면하였음을 기억해내었다.


그러하다면, 상품 라벨에 친환경 인증 표시를 하고, 

자랑이라도 할 일이지 않은가?

그런데, 별 의미도 없는 노지 재배를 어찌 선전해대고 있음인가 말이다.

이 지역에서 도대체가 노지 재배를 하지 않고 있는 이가 어디에 있음인가?

오이 농사도 아니고.


이는 되짚어 가자면, 친환경 인증을 지금은 받지 않다는 말이 아닌가?

허니, 기껏 자신의 농장을 선전하는데,

노지 재배를 끌어다대는 저 궁색함이란,

참으로 어줍기 짝이 없는 노릇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지금 저 농장은 친환경을 포기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니,

필경은 농약을 치지 않을 수 없는 사태 현실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자연스런 2차 추리까지 하게 이르렀다.

실제 저 농장은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것을 내가 진작에 알고 있다.

내 장담하거니와, 비료를 치면 반드시 병충해가 창궐하게 된다.

이 이치에 대하여는 내가 누차 앞에서 언급하였다.


나는 친환경 인증에 관심이 없다.

이에 대하여는 수 차 블로그에서 밝혔던 바이다.

하여 처음부터 이런 제도권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짓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내 양심과 농철학에 의지하여,

내 식으로 농사를 지었을 뿐이다.

(※ 참고 글 : ☞ 친환경인증 단상)


지난 08.04 유기농을 짓는 농부가 생을 마감하였다는 기사를 대하였다.

(※ 제주도, 평생 생명농업을 일궈온 유기농부)

나는 이 분에 대하여 내력을 아지 못한다.

다만 기사 내용에 의지하면,

10만평을 부부가 유기농으로 영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 너른 땅을 상대하자면,

당연 작업 인부를 고용하여야 하며,

유기농 본연의 일에 충실하기 어렵다.


작업자를 고용하는 순간,

셈판을 들고 수익/비용 입출을 쉼 없이 따져야 한다.

그러자니, 농사보다, 시장을 늘 의식하여야 하며,

만약 시장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마음고생을 사서 할 수밖에 없으며,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생명농업 운운의 기사 내용만 아니어도,

이를 다루지 않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10만 평 아냐, 100만 평일지라도,

유기농 농사를 짓지 못하란 법 없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이는 유기농 이름을 빌은 그저 상업농일 뿐,

생명농업이라 감히 부를 수 없다.

작물, 사람의 생명을 의식하는 농업이라면,

이리 물량 투입에 의존하는 한,

유기농 근본정신에 충실하는 게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人慾解除生命


사람의 욕심은 생명을 해치게 되는 법.

헌즉 생명농업 운운하는 게, 과연 옳은가 하는 의문을 일으켰다.

제주 농부께서 목숨을 끊으신 게, 그 분에게 온전히 책임이 있다 할 수도 없다.

세상엔 혼자 짓는 별업(別業)도 있지만,

모두 함께 공동 책임을 짓는 공업(共業)도 있는 법.

그는 자살한 것을 넘어 사회적 타살이 되었다 할 수도 있은즉,

우리 모두는 저분들의 죽음,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유기농 운운하지만, 마트에서 이를 외면하고,

싸고, 벌레가 먹지 않은 거죽이 매끄러운 것만 찾지 않았던가?

게다가 혹간은 농부 스스로도 유기농 고깔 쓰고 우쭐거리며,

실제는 관행농과 다를 바 없는 짓으로 사람들을 속이지 않았던가?

(※ 참고 글 : ☞ 친환경인증 단상)


유기농 소비층이 이 땅에선 아직까지 그리 두텁지 않다. 

몇몇 생협이 있지만, 이 제주도 농부가 거기 가입된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러하다면, 10만평에서 나온 소출을 모두 판매하는 일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리라.

이 정도 규모면, 아마 판매 전담 직원 별도로 두어야 했을 터이다.


가령 관행농으로 농사를 짓는다면,

때 맞춰 트랙터 타고 밭을 훑으며,

비료 뿌리고, 농약을 쳐대면,

그럭저럭 영농 행위를 할 수 있다.

실제 여기 지역에선,

2만 평 논을 이런 방식으로 한 사람이 짓는 경우도 있다.


나는 늘 주장하듯,

내 힘이 미치는 정도만 농사를 짓고 말지,

그 이상을 탐내, 외부 작업자를 고용하는 농사를 짓지 않겠다 선언하였다.

만약 힘에 부쳐 모든 밭을 관리할 수 없다면,

그냥 내버려 두고 말 일이지,

욕심을 내지는 않기로 뜻을 세웠다.


만약 욕심을 내기로 한다면,

관행농에 투신하지,

어찌 유기농을 넘어 자연재배를 하려 하였겠음인가?


하여, 저 제주 농부의 소식을 듣자,

저 정도 규모라면, 진정한 의미의 유기농 정신을,

밭에 나아가 펴기엔 비상한 재주나 노력이 없다면 어렵다 생각하였다.

나처럼 자연재배를 한다한들,

블루베리이기에 가능하지,

만약 일반 작물을 10만평에서 키우자면,

외부 인부를 쓰지 않으면,

도저히 유기농이든, 자연재배농이든,

그 애초의 소신과 철학을 유지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외부인을 쓰는 순간,

유기농이나 자연재배는 바로 흠집이 나고,

종내는 허물어지고 만다고 감히 주장한다.


고인에겐 대단히 실례되는 말이지만,

10만 평, 그리고 외부 작업자를 데리고서는,

자연재배는 물론 유기농일지라도 그 근본 철학, 정신을 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분들의 뜻은 애초 고상하였을 터이지만,

규모를 이리 키우는 순간 바로 욕심이 과도하게 개재(介在)되고,

곧바로 판매, 시장 관련 동학적 폭주 열차의 휘둘림에,

어찌 할 도리 하나 없이 이끌려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유기농, 자연재배는 그저 단순한 농법의 하나가 아니라,

농부의 이상(理想) 구현을 위한 철학적 탐색이자,  

자신의 뜻과 소신에 대한 믿음,

땅, 하늘, 자연에 의지한,

그리고 실천 현실을 통한 자아실현, 물아합일(物我合一)으로의 지향이,

그 제일의적(第一義的)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天下莫大於秋豪之末,而大山為小;莫壽乎殤子,而彭祖為夭。天地與我並生,而萬物與我為一。既已為一矣,且得有言乎?既已謂之一矣,且得無言乎?一與言為二,二與一為三。自此以往,巧歷不能得,而況其凡乎!故自無適有,以至於三,而況自有適有乎!無適焉,因是已。

(齊物論)


“천하에 가을 짐승의 터럭 끝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태산일지라도 작다 할 수도 있다.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더 오래 산 이도 없으며,

팽조를 일찍 죽었다 할 수도 있다.”


천지는 나와 더불어 생겼고, 만물도 나와 하나가 된다.


이미 하나인데, 구태여 다시 하나라 말할 것이 뭣이 있나?

그러나 이미 그렇게 이른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나와 (그리 지칭한 말로써) 둘이 되며,

이 둘과 원래의 하나를 더하면 셋이 된다.

이렇듯 더 나아가면, 아무리 셈을 잘하는 자일지라도,

최후까지 이르지 못할 것이니,

항차, 평범한 사람에겐 더 이상 이를 것이 있으랴?


고로, 없는 것(無)에서 유(有)로 나아가는 데에,

(종내) 셋에 이르게 된다.

그러함이니 항차, 있는 것(有)에서 있는 것(有)으로 나아감에 대하여,

무엇을 더 말하리오,


그러므로, 더 나아가지 말라 하는 것이니라.

(셋, 차별의 세계로 나아가지 말고, 자연을 따르라는 뜻)”


결코 이 이름을 빌어,

경제적 이익을 겨냥하거나,

제 세속적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대할 일이 아니다.

그럴 양이면, 차라리 관행농에 투신할 일이다.

(自有適有)

공연히 폼만 잡고, 

욕망에 부역하는 자기를 의로운 양 내세우며, 스스로를 속일 일이 아니며,

급기야는 남도 속이는 죄를 짓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마음을 비운 이에겐 유기농, 자연재배처럼,

넉넉하고, 즐거운 농사가 없다.

(無適)

하지만, 조금이라도 욕심에게 자신을 맡긴 이라면,

유기농, 자연재배는 관행농보다 몇 곱은 더 고통스런 짓이 되고 말 것이다.


뉴스에서, 착하게 생긴 제주 농부의 낯을 뵈었다.

그 동안의 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삼가 두 분의 영면(永眠)과 안식(安息)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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