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보암주(普庵咒)

농사 : 2020. 5. 10. 20:52


예전에 글 하나를 썼는데,

어떤 이가 나를 두고 ‘계룡산’내지는 ‘청학동 도사’ 운운하고 있더라.
내 그자들을 따끔하니 나무라며 경책을 하였다.

잘나빠진 한자 몇몇을 써 갈겼다고,
고작 생각하는 것이 청학동이냐 말이다.
이는 청학동 도사를 욕보이는 짓임은 물론,
자신의 무식함을 드러내는 짓임을 왜 아니 모르고 있음인가?

한문과 청학동의 일차원적인 관계 설정,
이 밖을 넘어서서는 도대체가 인식의 지평이 닫혀있음을 자복하고 있음이 아니더냐?

눈이 파란 양코배기를 보면 모두 미국인이라 생각하는,
어린 아해와 무엇이 다르냐 말이다.
그리고는 던져주는 초콜릿 받아먹으려고 침을 다시지나 않는가?

한문 따위,
저러한 것들은 자신의 말씀을 실어 나르는 수레에 불과한 것인즉,
과연 그 수레 안에 무엇이 실려 있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되어야 한다.
저것은 그저 나의 글쓰기 장치내지는 연출에 불과한 것이란 말씀이다.

엄동설한에 러닝셔츠를 입고 나타나든,
염천지절에 솜바지를 입고 걸어 다니든,
거기엔 다 개인적인 사연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고,
기이한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는 세상을 꿈꾸곤 한다.

요는 그의 외양, 형편, 사정이 아니라,
그가 품은 생각, 외치고자 하는 주장, 사상 따위가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가에 주목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글을 올렸는데,
그에 대한 어떠한 비판일지라도 감수할 수 있으련만,
그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다만 청학동, 계룡산 운운의 단문(短文)이 던져져 있을 때,
나의 주장, 외침은 그럼 어느 나변(哪邊)에 서 있는 것이란 말인가?

무슨 나쁜 의도를 갖고 한 말이 아니란 것을 물론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라도 자신이 지어 올린 글이란,
나름 제 깜냥의 무게가 실려 있는 것이다.
나중에 짓까불며 놀리더라도,
우선은 그 글의 무게를 칭량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 무게가 너무 가벼워 용서가 아니 된다든가,
아니면 진중하여 들어줄 만하다라든가,
여하 간에 싸움박질이 되는 한이 있어도,
글 타래를 중심으로 단서를 잡고 풀어낼 수 있어야,
거래가 성립되며, 곧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법식(法式), 의례(儀禮)가 부재할 때,
우리는 민망해지고 만다.
참으로 함께 더불어 거래하려고 하여도,
미치지 못하는 인사가 태반이니,
실로 딱하고 슬픈 노릇이라 하겠음이다.

내가 조류 퇴치 방법을 연구하는 중,
잠시 쉬는 막간에 한 생각을 일으켰다.
인도엔 주술(呪術)이 적지 않을 터이니,
혹 육자진언(六字眞言) 唵嘛呢叭咪吽처럼 신통한 주문이 없을까나?

왜 아니 없겠음인가?
그래 이를 소개할까 하는데,
이 역시 한문 글로 다뤄야 할 터이다.
그래 또 어떤 얼치기가 나서서 계룡산 도사라 이르겠고뇨.
지금 나는 지난 일을 이리 다시 막 떠올렸던 것이다.

폐일언하고
말씀을 새로 잇자.

‘하이디’란 분이 동물과 소통하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소위 Animal Communicator란 이름의 영매자(靈媒者),
그래 나는 이 분들을 영혼을 맺어주는 이들이라 부른다.

나는 밭에 나가 뱀을 마주쳐도 해치지 않고,
사라질 때까지 읍(揖)하며 전송한다.
예초기를 돌릴 때는,
개구리가 다칠까봐
‘저리 비켜서라 다친다’ 이르며 풀밭을 나아간다.

그러함인데,
새들에겐 왜 그리 대하지 못하고 있는가?
까짓 열매 좀 앗아갔다고,
별별 흉한 것을 다 만들어 그들을 괴롭히고 있지 않는가?
게다가 2차로 더 고약한 것을 만들려고 계획하고 있지 않았던가?
실제 나는 최근에 두 가지 장치를 더 고안해두었다.

내 영혼이 얼마나 탁하면,
저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이리 원수가 되어 있음인가?

Animal Communicator는 그들과 이야기를 할 때,
별다른 재주를 피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경지심(誠敬之心)이 대전제가 되어 있음이다.
불교도라면 불법의 가르침을 따를 뿐이다라고 말할 터인데,
과연 서양의 종교에도 이런 전통이 있을런가?

驅蟲、鼠、蚊、蟻, 鳥 ...
벌레, 쥐, 모기, 개미, 새 따위를 몰아내려 할 때,
사람들을 이들을 해로운 동물들이라 칭하며,
갖은 험한 짓을 다 한다.
저들에게 폐유를 쏟아 붓거나, 파리채로 잡아 죽이고,
독극물 모이를 주고, 꽹과리를 치고, 총으로 쏘아 죽이는 등,
세상에 있는 모든 흉한 짓을 다 퍼붓는다.

그 뿐인가?
조류독감이 퍼진다든가,
구제역이 돌면,
이 땅의 사람들은,
멀쩡하니 살아 있는 수백만 동물들을 산 채로 땅 속에 묻는다.

내 과문한지 몰라도,
역사상 이런 전례를 도무지 찾으려야 찾질 못하겠다.

장평대전(長平大戰)에서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적국인 조나라 포로 40만 명을 생매장한 정도인데,
요즘처럼 개명한 세상에 아무리 동물이라지만,
이리 수백만, 수천만 생령을 산 채로 땅에 묻어 버리는 짓을,
거국적으로 태연히 저지를 수 있음인가?

다시 말을 돌려 잡아 나아간다.

말래카 해협 지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당국에서 위생 예방 차원에서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주민들이 약사여래불께 신주(神咒)를 외며 모기 퇴치를 빌었다 한다.

약사불께 꽃과 향을 바치며 빌었는데,
그들은 칠일 주야로 팔분재계(八分齋戒)를 행하며,
정한 음식만 먹고, 향물로 목욕하고, 깨끗한 옷을 입었다.

청정심을 일으켜,
노하고 해치는 마음을 버리고,
일체 생명들이 안락하니 평등하게 살기를 기원하며,
불상을 중심으로 탑돌이를 하듯 우로 돌았다.
이들은 약사경을 함께 외며 모기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길 빌었다.

이는 실제 약사경에 묘술(描述)되어 있는 바이다.

속인다든가, 험악한 마음을 버리며, 생명을 해하지 않고,
모든 중생이 요익됨을 바라며 약사여래께 지심으로 빌면,
그 원하는 바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여기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의 해당 부분을 옮겨둔다. 

 

欲供養彼世尊藥師琉璃光如來者,
應先造立彼佛形像,敷清淨座而安處之;散種種花,
燒種種香,以種種幢幡莊嚴其處;七日七夜,
受持八分齋戒,食清淨食,澡浴香潔,
著新淨衣,應生無垢濁心,無怒害心,於一切有情,
起利益安樂,慈、悲、喜、捨,平等之心,鼓樂歌讚,
右繞佛像。復應念彼如來本願功德,
讀誦此經,思惟其義,演說開示。隨所樂願,
一切皆遂:求長壽得長壽,求富饒得富饒,
求官位得官位,求男女得男女。
若復有人,忽得惡夢,見諸惡相,或怪鳥來集
或於住處,百怪出現;此人若以眾妙資具,
恭敬供養彼世尊藥師琉璃光如來者,惡夢惡相,
諸不吉祥,皆悉隱沒,不能為患。或有水、火、
刀、毒、懸嶮、惡象、師子、虎、狼、熊、羆、毒蛇、惡蠍、蜈蚣、
蚰蜒、蚊虻等怖;若能至心憶念彼佛,
恭敬供養,一切怖畏皆得解脫。 

 

여기 보면,

或怪鳥來集이라,

혹 괴조(怪鳥)가 모여들어도,

지심으로 약사불을 칭념하면 이 모두 벗어날 수 있다 하였으니,

내가 지금 거짓으로 꾸며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참고로 나는 불교도가 아니다.

다만 그들의 말씀을 전하고 있음이니,

혹 다른 뜻이 있다한들,

나를 두고 시비할 일은 아니다.) 


그 외에도 임제종(臨濟宗) 13대 법사(法嗣)인 보암선사(普庵禪師)를 중심으로,
민간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상당히 많다.

그 보암선사의 신비한 주(咒)는 길고 짧은 간단한 소리의 조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소리가 벌레나 동물 소리와 비슷하였다 한다.
이는 동물과 소통하는 언어라,  

벌레가 울고, 새가 우짖는 소리처럼 들린다 한다.
선사가 이미 팔지보살(八地菩薩)의 과위(果位)에 올라,
중생을 향한 절절한 자비심으로 그러한 주술의 말을 내리실 수 있었으리라.
이 주문(呪文)을 정성을 다하여 청정한 평등심을 내어 외우면,
보살정신이 감응을 일으켜 비상히 영험한 일이 일어나,
시방 세계에 효험이 미쳐 벌레, 개미, 모기 등이 생기지 않고,
모든 재앙이 풀어지고, 살겁이 없어지며,
삿됨을 물리치고 더러움을 없애 편안해진다고 한다.

그렇다한들, 과연 벌레나 동물과 소통이 가능한 일인가?

여기 이야기 하나가 전해지고 있다.

법사 하나가 계셨다.
그가 세수를 하려고 하는데 개미가 들끓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저들을 해치지 않으려고 개미를 향해 말씀을 하신다.

‘개미보살(螞蟻菩薩)님!
그대들이 온 곳을 쫓아 다시 그곳으로 돌아들 가시게나.
나는 이 집 안에 거주하니,
그대들은 집 밖으로 나가들 가시게나.
다들 무사 안녕하시길.’

그런 연후에 얼마지 않아 그들은 모두 집을 떠났다 한다.
이제 세숫간엔 아무런 생명도 해함을 입지 않았다.

이를 믿건 아니건 간에,
허다한 실증 사례가 있음이니,
동물들과 소통하고 저들을 물렀게 하였음이니,
어찌 지구 환경을 해치는 그 험한 독극물인 화학 구충제를 쓰겠음인가?

실제 대만 출신의 양씨 부인은 바퀴벌레와 소통을 하였는데,
성심을 다하여 이들에게 집 밖으로 나가 살길 청했다 한다.
후에 그 남편이 이들 바퀴벌레가 서로 회의하는 것을 보았는데,
수컷이 부르자 암컷이 따르며 이사하더란다.

무협소설인 소오강호(笑傲江湖)에 등장하는 청심보선주(清心普善咒)는,
기실 여기 소개한 보암주(普庵咒)를 음악으로 바꾼 것이다.



보암선사는 원래 북송 때 분인데,
하루는 화엄경을 읽다 다음 구절을 만났다 한다.

達本情忘,知心體合

순간 활연대오 깨우침을 얻었다 한다.
보암선사는 그 신통력과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는 도력으로,
역대 황제로부터 존중을 받았다 한다.
그래 원명청(元明清)이래 보암선사 상(像)을 많이들 조성하고,
공양을 드렸던 것이다.

강서 복건성 일대엔 그 신앙이 많이 퍼졌고,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한다.
당시 임제종 계통의 불전 뒤엔 보암선사 패위(牌位)가 모셔져 있었다.
대마도에선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신묘(神廟) 사당에서 보암선사를 받들어 모셨다 하니,
민심에 얼마나 많이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이상의 글 중 일부는 중국 普陀精舍의 자료를 참고하였다.) 


***

오늘 밭에 나가면,
저들 마작보살(麻雀菩薩)인 새들에 청정심을 일으켜,
수확철엔 다른 곳으로 잠시 이사하시길 권청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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