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에 대한 집착
풀에 대한 집착
대개의 여성은 더럽거나 정리정돈이 되지 않은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하여는 내가 간간히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다.
(※ 참고 글 : ☞ 여성과 위생, 그리고 제초에 대하여)
밭에 난 풀도 보게 되면,
떠나지 못하고, 밭가를 서성거리며, 뽑아내는데 열중이다.
아무리 놔두라, 가르쳐도 별반 효과가 없다.
처가 서울에서 내려오면 종일 텃밭에서 풀을 뽑아내기 바쁘다.
물론, 블루베리 본 밭이야 내가 지키고 서있을 뿐 아니라,
자신도 그게 블루베리에 도움이 되는 것을 알기에 손을 대지 않는다.
설혹 손을 댄다한들, 그 너른 과원 전체를 감히 인력으로 어디 감당할 수 있으랴?
그리 며칠을 풀 뽑는 일에 열중이더니,
무릎이 아프다고 한다.
아, 미망(迷妄)이어라.
하여 그럼 내년부터는 텃밭 일부만 멀칭 비닐로 덮으라 일렀다.
이제껏 텃밭도 비닐 멀칭 없이 대하였다.
나는 풀에 덮인 밭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가롭고 편안해진다.
하지만, 검정 그렇다 저 흉측스러운 멀칭 비닐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답답해지고, 가까이 다가가기도 싫어지고 만다.
미처 손이 미치지 못하면, 물론 소출이 주는 경우도 발생한다.
하지만, 이게 무슨 대수랴?
적게 먹으면 그만일뿐더러,
풀밭에서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란 식물을,
온 천하 그 어디에 가서 구할 수 있으랴?
여자들. 그리고 풀.
아아,
저들의 집착이라니.
번뇌이어라.
부처는 최초 여성 출가를 허락하면서,
정법이 오백년 감소한다고 말하였다.
소위 이게 정법오백년감소설(正法五百年減少說)이다.
그 외 여성에 대한,
팔경법(八敬法), 여성오장설(女性五障說), 여성불성불설(女性不成佛說) 등등,
여러 부정적 설이 적지 않다.
저들은 집착도 많고, 번뇌도 많다.
아마도 저들의 포태, 출산 능력은 근원적으로 집착을 낳는 뿌리가 아닐까 싶다.
저들은 지모신(地母神)이 되어,
씨를 뿌리고, 자손을 기르는 명운(命運)에 주박(呪縛)되어 있음이니,
어찌 생에 대한 애착과 번민이 없을 수 있으랴?
헌데, 불교사를 공부하다보면,
애초 부처는 여성을 두고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부파불교에 들어와 여성의 도기(道器)를 의심하는 설이 등장한다.
소위 여인에게 다섯 가지 장애가 있다는 여성오장설(女性五障說) 중 하나로서,
(※ 女性五障說
大梵天王, 帝釋, 魔王, 轉輪聖王, 成佛
위 다섯이 될 수 없다는 설.)
바로 여성은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여성불성불설(女性不成佛說)이 나타난다.
그러다 대승불교 초기엔 여자가 남자로 변해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변성남자성불설(變成男子成佛說)이 등장한다.
이는 시대상과 부처의 가르침 사이에서 서성이다, 이리 어줍지 않은 설이 등장하였으리라.
즉 여성 혐오에 가까운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부처의 가르침의 적응형 변용이라 하겠다.
하지만, 대승불교 중기를 넘어가며 여성성불설(女性成佛說)이 나타나며,
비로소 여성 비하가 극복되어, 본래의 부처의 가르침으로 복귀하였다.
이는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鬘獅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에서,
그 여성성 아니 인간 보편성의 절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경은 승만(勝鬘) 부인이 주인공이 되어 설해진다.
승만이 자설(自說)을 펴자, 부처는 이를 다 인가하였다.
여성인 승만이 편 교설에 사자후(獅子吼)란 표현을 한 것만 보아도,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지 않은 것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 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宋中印度三藏求那跋陀羅譯)
그 내용은 당나라 보리유지(大唐三藏菩提流志)의 개역판인
大寶積經 勝鬘夫人會第四十八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유마경(維摩經)과 더불어 승만경은 출가하지 않은 재가자가 주인공이다.
놀랍지 않은가?
부처가 아닌, 그리고 나아가 출가승도 아닌 재가 신자가 법설을 펴다니?
그대 당신들은 이런 종교를 접한 적이 있는가?
불교의 보편성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승만경에 이르면,
불교의 실천성에 놀라게 된다.
대단한 일이다.
유마가 아프자, 병문안을 가야하는데, 부처 십대제자 누구나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지난 날, 유마에게 법거래에서 모두 깨졌기 때문이다.
결국 문수가 가게 된다.
문수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거기 이 말씀은 유마경의 핵심이자,
대승의 위대한 가르침이다.
以一切眾生病是故我病。若一切眾生病滅則我病滅。
‘일체 중생이 아픈 한, 나도 아프며,
일체 중생이 나으면 나의 병도 없어질 것입니다.’
從有攀緣則為病本。
반연(攀緣)이 병의 근본이다.
대상에 얽혀 들어, 쫓고, 집착하는 것이야 말로 번뇌의 원천이다.
하기에 이를 훌쩍 뛰어 넘어야 한다.
지금, 잡초를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라,
나는 유마의 이 말씀이 더욱 와 닿는다.
승만경의 가르침도 결국은 매 한가지다.
本性清淨이라,
본성은 보디 청정하다.
허나, 마치 구슬에 때가 묻듯,
번뇌가 일고, 다시 그 번뇌가 연이어 일어난다.
이를 하여 객진(客塵)이라 이른다.
때, 번뇌가 외부에서 온 것이란 의미다.
煩惱不觸心,心不觸煩惱
그렇다면, 어찌 번뇌가 청정심을 염착시킬 수 있으랴?
잡초를 몹쓸 것으로 여겨,
사람들은 툭하면 ‘잡초와 전쟁’이라 말하며 흥분한다.
하여, 풀 뽑는 도구를 마련하고, 제초제를 뿌리며, 극성을 떤다.
헌데, 대지가 본래 청정한 것이라면,
잡초가 어찌 대지를 더럽힐 수 있으랴?
또한 더러운 것이 대지 위에서 자랄 수 있으랴?
煩惱不觸心,心不觸煩惱
두어라.
집착에서 벗어날 일이다.
보아라.
지난해만 하여도 선녀나방이니, 갈색매미충이니 하며,
전국의 농장들이 곤욕을 치렀다.
헌데, 올해에는 매미나방 애벌레가 극성을 부린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우리 농장은 이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아니 나타났을 터이지만,
머무르지 않고 이내 떠나고 말았으리라.
우리 농장과 저들 농장의 차이는 무엇인가?
煩惱不觸心,心不觸煩惱
여기서 煩惱를 잡초로 바꾸고,
心을 대지로 바뀌어도 그 이치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 농장은 풀을 객진(客塵), 즉 외부에선 온 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여, 대개 내버려둔다.
아아,
자성(自性)은 본디 청정한 것이듯,
대지도 그러한 것임이라.
설렁설렁 나서며, 과번무(過繁茂)를 다스릴 뿐,
잡초를 여기 농장에선 적으로도, 손님으로도 대하지 않는다.
저들은 주인이다.
煩惱卽菩提
과일이 나무에 달려 채 익기 전이라면,
따서 먹으면 시거나 떫다.
하지만, 비바람을 맞고, 태양의 세례를 받으면,
그 맛이 달게 변한다.
아아, 그러함이니, 단맛은 실로 신맛에서 유래하는 것.
그러함이니, 단맛과 신맛은 별도로 나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원천에서 기원하는 것.
(※ 실제 신맛은 구연산, 페놀 등의 유기산, 단맛은 과당, 포도당 등 때문이다.
유기체는 비바람, 태양들을 맞으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외 질료와 작용하여 이들을 생산해낸다.)
또한 바닷물과 파도는 다른 것이 아니다.
파도 역시 해수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번뇌 이면엔 역시 본래부터 청정한 자성보리(自性菩提)가 있을 뿐이다.
잡초 역시 매한가지다.
본디부터 청정한 대지에서 일어나는 한 모습일 뿐인 것을.
이제, 나의 지난 글(링크)을 덧붙여 끝내며,
과원에 나아가, 풀 바다, 저 원초적 자성(自性)의 해원(海原)에 잠긴다.
(※ 참고 글 : ☞ 번뇌와 잡초 (一枝草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