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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멸(刹那滅)과 고양이

생명 : 2020. 11. 4. 19:16


찰나멸(刹那滅)과 고양이

 

2개월 전 일이다.

 

간밤에 모기가 방에 들어와 잠을 설쳤다.

새벽녘에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아가니,

하우스 바닥에 희끄무리한 것이 눈에 띈다.

비닐봉지라도 떨어진 것인가?

가까이 다가보니,

완전히 눈에 들어오기 전에,

아아, 나는 이미 알아차렸다.

 

하얀 고양이 하나가 누어있다.

죽은 것이리라.

그는 최근 꼬리가 잘렸었다.

외부 깡패 고양이와 다툼이 일어난 것이리니,

털이 환상(環狀)으로 벗겨져 벌겋게 맨살이 다 들어나더니,

얼마 후, 급기야 꼬리가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요사이 행동도 이상이 없고, 밥도 잘 먹었다.

상처가 아물고, 이제는 괜찮겠지 하였음인데,

이 길고, 힘든 생을 등지고 만 것이다.

 

그러함인데,

그가 떠난 이틀 후,

또 다른 어미 고양이 하나가 새끼를 셋이나 낳았다.

 

만날 때마다,

포태(胞胎)하지 말라고,

그리 조심하라 타일렀으나, 

작년에 이어 또 다시 고양이들은 생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찰나멸(刹那滅, kṣaṇika/kṣaṇabhaṅg), 

찰나생(刹那生)

 

아아, 중생은 이리 한 순간 죽고, 이어 태어나는구나.

세 아이 중 하나는 잘 자라는가 싶었는데, 달포 만에 죽었다.

그 아픈 아이를 안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는 공연한 과잉 진료를 하더니만,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아니 죽였다.

여기 가까운 곳엔 그 병원이 유일하다.

전에도 이용한 적이 있는데,

갈 때마다 기분이 상해 돌아오곤 하였다.

의사가 돈독이 오른 것이 歷歷可知라, 역력하다.

 

두 마리가 남았다.

헌데, 나중에 한 마리도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몸이 아파 보였는데, 그 날부터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그 아이도 죽었을 것이다.

 

전에 알던 동물의사가 말했다.

 

‘대개 길고양이들 수명은 2년 정도다.

그리 저들은 스스로 개체 수를 조절한다.’

 

이제 남은 아이는 하나다.

아마도 이 아이는 오래 살 것이다.

살이 붙고, 힘이 세졌으니,

그럭저럭 이 험한 세상을 버텨나갈 수 있으리라. 

 

생멸은 이리 부단하게 일어난다.

이게 개체 사이에 이어지는 것일 뿐이랴?

한 개체 안에서도 쉼 없이 일어나고 있다.

 

현대 생물학은 생명 개체가 세포 단위로 이뤄져 있음을 밝혀내었다.

세포는 한번 만들어지면 개체가 죽을 때까지 유지되지 않는다.

세포의 죽음은 네크로시스(necrosis)와 아팝토시스(apoptosis) 둘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물리적 충격, 독, 방사선 등으로 괴사하는 것을 말한다.  

후자는 생명체의 운명이라 할, 소위 세포자살(細胞自殺)을 뜻한다.

세포가 수명을 다하거나, 필요가 없을 때, 자연적으로 죽어 없어지는 것이다.

 

실로, 아팝토시스에 의해 생명은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하겠다.

세포의 경우 개체가 완전 사망하기 전까지 사멸과-재생을 되풀이 한다.

인체 각 조직별 재생 주기는 다음 표와 같다.

 

(출처 : bionumbers)

 

생명은 물질대사(metabolism)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찰나간 생멸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리 생체 구성 물질이 항구적이지 않고,

바꿔쳐지는데, 과연 자기동일성이 유지될 수 있는가?

쉼 없이 지속되는 유전(流轉) 속에, 

我란 정체성이 유지되며 이어질 수 있는가?

 

불교에선 無我라,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낱낱의 세포조차도,

無常의 강물 속에서 흘러가지 않던가?

생멸상속만 있을 뿐, 자기 동일성이란 것은 허상이다.

부처는 이리 가르치고 있다.

 

찰나간 나고 죽으며,

저 시퍼런 강물 속을 헤엄치고 있는 것이다.

 

하얀 고양이 하나 찬 바닥에 누어,

희끄므리한 새벽 여명(黎明) 속에서,

나의 영혼을 흔들고 있다.

저 가녀린 떨림으로,

찰나상속(剎那相續)의 엄숙한 존재의 숙명을 가르치고 있다.

 

슬퍼한들,

저 강물은 여전히 무심하니 우리 곁을 흐른다.

이 강물을 지긋이 응시한 이들이 있다.

그이들은 누구인가?

 

陳那(Dignāga 약480~540)

法稱(Dharmakirti 약600~660)

寶稱(Ratnakirti 1000~1050)

(※ 생몰연대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들은 소위 브라만교나, 외도들과,

무아론이나 찰나론을 두고 치열하게 논쟁하였다.

저들은 常과 我를 굳건히 믿는 이들이었다.

 

이들 사이이의 논쟁은 그저 흥분하고, 주먹질 하는 정도가 아니다.

목을 내놓고 한다.

지는 자는 목을 내놓아야 한다.

하기에 온 교단, 학파가 여기에 집중한다.

만약 지게 되면, 목을 내놓거나, 

집단 전체가, 이긴 자에게 넘어가 버린다.

 

이는 마치 조폭끼리 싸움이 일어났을 때,

지게 되면 괴멸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아니면, 전체 조직을 들어, 

이긴 쪽으로 자진 흡수 통합되는 것과 비슷하다.

 

지게 되면, 더 이상 신도나 지원자들의 지원이 끊긴다.

살아나갈 방도가 없다.

스스로 목을 내놓고, 거꾸러지거나,

상대편에게 귀순하는 수밖에 대안이 없다.

 

당시 불교는 연전연승,

기존 세력을 제압하며 세를 불려나갔다.

 

디그나가에 의해 6세기경에 비롯된 요가학파는,

7세기 다르마끼르띠에 의해 이론적 체계가 확립되었고,

라트나끼르띠 등에 의해 절정을 이룬다.

 

이들의 논증은 아름답다.

하지만, 고원을 몇 차 넘어가야 그 진경(眞景)을 볼 수 있다.

 

넷(net)에서 만나는 이들은 곧잘 말하지 않던가?

‘소통을 하려면 쉽게 다가가야 한다고.’

우라질 놈들.

쉬운 것, 평범한 것은, 네들이나 실컷 퍼먹으라지.

 

도대체, 양자역학 네들 이해하니?

뉴튼 역학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지 않던가?

 

그리 쉬울 것이라면,

왜 저들이 평생 목숨을 걸고 저리 허벅지를 찌르고,

목에다 칼침을 드리고 고심참담하였는가?

 

쉬운 것, 평범한 것은 모두,

찌질이들을 위한 눈깔사탕인 것.

울지 말라고 아가리 벌려 찔러 넣는 알사탕.

이것을 원한다면,

영원히 구순기, 항문기를 벗어날 수 없는,

어린 아해에 머무르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곧잘, 선사들이,

도가 평상심이라든가, 아무 것도 구하는 것이 없는 경지라 하였든가? 

그런데 둘러봐라.

그대 당신들 주변에 도인이 있는가?

있다 하여야,

복부인이나,

계집 후리기에 이골이 난,

눈깔 시뻘겋게 달궈가며,

屌방망이나 껄떡거리는 욕망의 덩어리만 있을 터.

 

도인이 가까이 있는 것을 알아채었다면,

저들처럼 영악한 이들이라면 진작에 도통하였을 것이다.

 

소통, 보통, 평범은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말일 뿐.

정작 100세를 살아도,

도통하고 죽는 이가 몇이나 되는가?

 

그런즉, 이런 말을 퍼뜨리고 있는 자들은,

관우의 청룡언월도를 빼앗아, 결딴을 내버려야 한다.

그게 조주가 되었든,

원효가 되었든 말이다.

 

如奪得關將軍大刀入手 逢佛殺佛 逢祖殺祖 於生死竿頭 得大自在 向六道四生中 遊戱三昧

(無門關)

 

“관우의 대도를 뺏어 손에 들고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

생사간두에 대자재를 얻어,

육도사생 중 유희삼매하리라.”

 

다르마끼르띠는 밝혔다.

 

사마타(奢摩他, Samatha)나 위파사나(毘婆舍那, Vipassanā)를 통해서가 아니라,

지혜(智)를 통해 전격 사물의 해골을 절개하고, 그 진수를 해체하여,

즉 철저하니 논리로서 이를 밝혔다.

 

이 방법론을 인명학(因明學)이라 하는데,

이유(因)를 밝힌다(明)뜻이다.

요즘엔 이를 인식논리학이라 바꿔 부른다.

 

하니까, 교리에 대한 믿음이라든가, 종교적 신앙 또는 명상, 참선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따져 찰나멸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찰나멸이 증명된다면,

소위 외도들이 주장하는 아트만(ātman), 자재신(Īśvara)은 자동 부정되고 만다.

영원이라든가, 실체를 가진 존재는 간단하게 논파된다.

이제 불교의 핵심 교리인 무아(無我), 무상(無常)은 종교적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

인식논리학적으로 타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찰나멸 논증의 중심인물은 다르마끼르띠로 생각되지만,

후대의 라트나끼르띠로 이어져 크게 발전하였다.

하지만, 기실 그 앞의 디그나가가 초석을 놓았고,

그 더 앞의 바수반두(Vasubandh, 世親)를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찰나멸하는 까닭을 이리 설명하고 있다.

 

有為法滅不待因

(阿毘達磨俱舍論)

 

유위법은 원인 없이 소멸한다.

 

待因謂果,滅無非果,故不待因。

 

원인이 있다면 결과가 있다.

하지만, 소멸하면 결과가 없다.

(비존재를 두고 결과 여부를 논할 수는 없다.)

그런즉 소멸엔 원인을 요하지 않는다.

 

若初不滅,後亦應然,以後與初有性等故。既後有盡,知前有滅。若後有異方可滅者,不應即此而名有異。

 

만약 처음에 불멸한다면, 연후에도 그럴 것이다.

그 후에 소멸한다면, 그 앞에도 소멸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소위 세친의 멸무인설(滅無因說)이다.

 

자발적 소멸은 모든 존재의 속성이다.

마치 세포의 아팝토시스처럼, 소멸은 자발적으로 예정되어 있다.

그것에 무슨 원인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소멸은 원인 없는 것을 속성으로 한다.

 

하지만, 당시엔 이를 모두 인정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학파들은 즉, 독자부(犢子部), 니야야, 바이쉐시카 등은,

어떤 존재들의 소멸엔 외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외부 원인에 의한 소멸은 마치,

세포의 네크로시스(necrosis)처럼 외부의 작용을 필요로 한다.

 

다르마까르뜨는 이런 소멸에 근거한 찰나멸을 넘어,

존재에 근거한 소멸과 인식에 근거한 소멸을 새롭게 제시, 증명해낸다.

 

그 내용은 인연이 닿는다면,

다음 책으로 이어져 밝혀지길 바란다.

 

 

컴퓨터에서 SDRAM(Synchronous Dynamic Random Access Memory)이 요즘엔 주로 쓰인다.

하지만, DRAM(Dynamic Random Access Memory)이 기술적으론 더 앞서 사용되던 소자다.

이 메모리 소자는 저장된 기억 내용이 시간이 지나면서 소멸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유지하기 위해선 주기적으로 그 내용을 다시 갱신해주어야 한다.

이를 refresh라 부른다.

하니까 DRAM은 ROM과 달리 찰나멸하는 존재라 하겠다.

ROM은 전원이 꺼져도 기억 내용이 남아 있고,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DRAM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 내용이 지워지고, 전원이 꺼지면 모두 사라진다.

따라서 시용중 기억 내용을 유지하기 위해선, 별도의 부가 장치를 따로 장착하여,

강제로 refresh를 연신 해주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 사라진 고양이를 어제 발견하였다.

그는 농장 안의 하우스 구석에 죽어 있었다.

몸에선 시즙(屍汁)이 흐르고, 털은 서서히 뽑혀나가고 있었다.

refresh가 아니 되면, 세포는 이내 죽어, 와해되고 만다.

 

특히 이리 뒤늦게 발견된 동물 사체의 경우,

주둥이 부근이 제일 먼저 썩은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빨이 보이고, 턱 근육이 이완되어 입은 자연 벌어지게 된다.

 

살아생전엔 입으로 울고, 먹이를 취하게 된다.

외부 위험 세력을 맞는 역할도 발과 함께 입이 담당한다.

입을 벌리고, 소리를 내고, 물어뜯으며 대항한다.

그런즉, 얼핏 입이 제일 강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물질대사, refresh가 중지되면,

제일 먼저 허물어지고 만다.

 

왜 그런가?

 

입은 외부와 연결되어야 하기에 개폐가 자유로워야 한다.

소리를 지르고, 먹이를 취하기 위해선 막혀 있을 수 없다.

하기에 병사(病邪)가 들어오기도 제일 취약한 곳이 된다.

입안에 늘 온갖 잡균이 서식한다.

사람도 매한가지다.

저녁에 아무리 양치질을 하여도,

아침에 일어나면 입안엔 잔뜩 세균이 번식되어 있기에,

양치질을 하지 않으면 구취가 난다.

 

물론 그러하기에 이를 방어하기 위한 채비가 따르기도 한다.

내 소싯적 침술 선생님은 그 역할을 편도선이 담당한다고 하셨다.

그런즉 편도선을 떼어내는 수술을 함부로 하여서는 아니 된다 하였지.

 

농사를 짓게 되면서 그 동안 농장 안팎에서 죽은 고양이를 수습한 것이 서른다섯은 족히 넘는다.

어제도 저녁 늦게 발견하였지만, 급히 자리를 마련하고 땅으로 돌려보냈다.

찬 바닥에 갈대를 잘라 깔아주었다.

내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이것뿐이다.

 

죽어 쩍 벌려진 녀석들 주둥이를 보면,

찰나멸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죽으면 저리 허물어지고 말 터이다.

 

찰나멸 그 강물을 지치도록 저어나가는 조각배 하나,

이게 중생의 삶이다.

 

녀석을 들어내자,

구더기 형상의 조그마한 벌레가 소복이 쌓여 꿈틀대고 있다.

찰나멸에 이어 찰나생이 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리 생멸 상속(相續)은 단 한 순간도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무상(無常)

 

항상한 것은 없을뿐더러,

변화의 주체조차 없다고 불교는 가르치고 있다.

 

이 무상의 강물은 오늘도 흐르고,

존재는 그 강물 따라 찰나멸, 찰나생하며 시간이란 그림자를 드리우며 영원상속(永遠相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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