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고양이
어느 블로그에 가니,
집 밖에서 돌보는 고양이들 무리에,
새로운 침입자가 나타나, 기존 고양이를 괴롭힌다는 이야기가 풀어져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이리 글을 마쳤다.
“잡아 죽일까요
냅두진 못하겠어요
참는 것도 한도가 있지
개 썅”
그러자 댓글이 달리는데
거지반, 99%,
새로 나타난 고양이를 처단하는데 동조하고 있다.
잡아 죽일 수만 있다면 없애버려야 한다거나,
청산가리 같은 독약을 밥에 섞자는 이도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애초 기존의 고양이들도 한 둘을 제하고는,
모두 산고양이들을 거둬 건사한 것들이다.
애초 저들을 거둘 때,
고운 마음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고 보자면, 앞뒤로 나타난 시간만 다를 뿐,
고양이 출신 신분에 무슨 차이가 있겠음인가?
다만, 운이 좋아, 누구는 먼저 한 인간의 보살핌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함인데, 선후가 갈린다고,
이를 박박 갈며, 잡아 죽이겠다고 벼른다면,
도대체, 이 때 일어난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가만히,
이 마음의 행보를 지켜보라.
댓글을 죽 읽어보고는,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대하기 무섭고도,
어리석은가 다시금 깨닫는다.
애초 일으킨 아름다운 마음은,
선후 차이로 인해 저들을 가르고,
미움으로 변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여기 농장에도 들고양이가 적지 않다.
얼마 전, 흰 고양이가 하나가 크게 다쳤다.
어느 날, 하우스 안에 뽑힌 털이 널려져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흰 고양이 꼬리 중간 털이 뱅 돌려가며 다 뽑히고,
벌건 살이 다 드러났다.
끔찍하다.
얼마나 쓰리고 아플 것이며,
산다는 것이 서러울까?
풀잎 사이를 지날 때마다,
쓸려 참을 수 없이 괴로울 것이다.
정말 눈물이 난다.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젠 나를 보아도 피한다.
극도로 공포감이 느껴져,
이젠 내가 나타나도 경계를 하는 것이리라.
필시 야밤에 외부 고양이가 나타나,
흰둥이를 공격한 것이리라.
밤사이 그릇에 남은 사료가 다 없어지는 것으로 보아,
녀석이 야밤에 들어와 사료를 싹 쓸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한들,
밤에 들어와 먹으라고 그를 위해 외려 사료를 남겨둔다.
배고픈 고통을 아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저들에게 사료라도 나눠주는 것 밖에 없다.
선후, 안팎에 따라,
저들을 가르고 차별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도대체, 이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아,
중생이란,
먹지 않으면 죽고 마는 것이다.
그 뿐인가?
생식 본능은 쉬지 않고 발동하여,
암내를 풍기고, 정욕이 기승을 부리는 바임이라.
끊임없이 서로 간 갈등을 때리고, 싸움박질을 해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저들을 지그시 쳐다본다.
이 질곡에 빠진 중생이란 얼마나 슬픈가?
다만, 먼저 들어왔다고, 보호 받고,
늦게 인연 지었다고,
청산가리 같은 독약을 밥에 섞어 죽이자는 또 다른 중생들.
나는 저 강퍅한 마음보에 질리고 만다.
즉발적이며 단순한 저들 인간성에,
나는 절망한다.
대학 교육을 80% 받는다 하였음인가?
지식, 정보는 늘어났을지 모르지만,
의식, 인간성은 이와는 별개다.
인자(仁者)가 그립다.
그러하기에,
由!知德者鮮矣。
(衛靈公)
공자는 중유(仲由)에게,
‘도덕을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는 것을 알라, 이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러함이니,
역설적으로,
인간 사회는 도리 없이 법으로 규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헌즉, 한비자는 주장하는 것이다.
古者世治之民,奉公法,廢私術
반편, 모지리, 괴물들을,
법으로 눌러 둘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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