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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덕(陰德)

소요유 : 2021. 8. 28. 11:54


어떤 이 하나 있어,
자기가 선행을 남다르게 행하고 있는데,
현실에서 보상이 따르지 않고 있다 하소연을 하고 있다.

이 말 앞에 서니,
문득 다음 말씀이 떠오른다.

有陰德者必有陽報,有陰行者必有昭名。

회남자에 나오는 말씀이다.

음덕을 쌓은 자에게는 필시 양보가 따르며,
음행을 행한 자에겐 반드시 이름이 알려진다.

여기 음陰이란 ‘드러내지 않고, 숨겨진, 알려지지 않은’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음덕이란 남 몰래 쌓은 덕을,
양보에서 양이란 그 갚음(보상)이 드러난 모습을 지칭한다.

一命,二運,三風水,四積陰德,五讀書。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명운이 첫째, 둘째고,
풍수, 즉 지정학적 한계 조건이 세 번째이고,
4번째가 음덕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가 독서다.

대개 1~3까지는 인위적으로 쉬이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음덕은 가슴을 비우고, 마음을 맑게 닦는 것으로 자신이 할 수 있다.
그리고 독서란 바로 공부를 말하는 바,
뜻을 세운 자는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래, 이 진세塵世에 떨어진 운명들,
쉼 없는 공부, 쿵푸를 하는 것밖에,
또 다른 것이 남아 있겠음인가?

活到老, 學到老

아아, 그래 삶이란 늙음을 예정하고 있음이로되,
배우다 늙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 ‘배움의 지속’ 안에 갇힌 슬픈 존재가 곧 인간이 아니랴?

슬프기에 아프지만,
이 또한 그러한 만큼 아름다운 일이기도 한 것임을.

자기가 착한 일 하였다,
이리 스스로 나발 불면 바로 양덕이 되고 만다.
게다가, 이리 햇빛에 노출시키면, - solarization
이내 빛바래 고추 희아리(희나리)처럼, 종내 쓸모가 없어지는 법.

바둑 용어 중에 고자좆이란 게 있다.
거기 돌 하나를 놓으면,
이내 상대가 바로 따낼 수 있는 곳이니,
이리 스스로 사지로 들어갈 일 있으랴?

아아,
그러함이니 덕이란 달님이,
은빛으로 촉촉이 적시고 계실 때 – lunarization
그 가슴에 안겨 그저 잠길 뿐인 것을.

회남자에선,
음덕을 기르면 종내 양보가 따르고 양명揚名할 수 있다 말하고 있으나,
이는 아주 삿되고 속된 말이다.
음덕이란 이리 양보陽報, 양명을 겨냥하여 쌓는 것이 아니다.
이런 자세야말로 solarization으로 자신을 해치는 짓임을 알아야 한다.

이리 겨냥하고 있는 한,
저것은 실로 음덕은커녕,
양덕조차 되지 못하는 가짜일 뿐이다.

여기 다시 조심할 것이 있다.
덕이란 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한,
양덕이든, 음덕이든,
종국엔 이게 빛을 발하고,
이름을 드날릴 자량資糧으로 여기게 된다.

덕이란 온전히 네 것이라 할 수 있음인가?
니가 자라면서 엄마 젖 빨고 컸고,
숱한 농부들의 피와 땀으로 지은 곡식을 먹고 살을 찌우고,
동물들 가죽을 벗겨 옷을 해 입고,
저들의 뼈로 기둥을 세우고,
식물 껍질 벗겨 이엉을 엮어 비를 가리지 않았던가?

어디, 대 보거라?
네 것이란 것이,
그래 한 줌이라도 될 성 싶으냐?
   ☞ 인생 성취의 8할은 운, 감사하고 겸손할 이유

아아,
그러함이니,
음덕조차 꾀할 일이 아니다.

不思善, 不思惡。
(※ 참고 글 : ☞ 不思善不思惡)

내 그래 이미 진작에 이 이치를 말하지 않았던가?

헌데, 혹인(或人) 하나 있어 내게 묻는다.

‘그렇다면, 나의 선행을 남이 알 수 없을 터인데,
요즘 같이 자기선전의 시대에 그게 맞는 도리라 할 수 있는가?’

요즘 아이들은 스펙을 쌓는다 난리고,
학생들은 무슨 봉사활동 같은 것을 하여, 
점수 따느라 분주하다.
voluntary activity
이를 계수화한다는 것이야말로 난센스다.

정작 저로써 이뤄낼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
점수를 따서, 제 살림 밑천으로 삼고자 한다면,
세상은 거짓과 위선으로 뒤범벅이 되고 말 것이다.

법가는 이런 가시적 공적을 셈하여 상을 주고,
미치지 못하거나 그르치면 벌을 가한다.
엄정함이야말로 법가의 장점이지만,
이로써, 세상 어둠의 주름살이 과연 모두 펴질 수 있을까?
이 부분이 법가의 한계라 할 밖에.

허나, 유가는 음덕을 강조하고 있음이니,
위에서 살펴 본 것은 실로 유가에 뿌리를 둔 것이고,
내가 불가의 정신을 그 밑 토대로 삼아,
더 깊이 밝히었다.

이 양자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이리 다르다.
하나에게 덕인 것이 하나에겐 악덕이 되고,
하나에게 옳은 것이 하나에겐 그른 것이 된다.

그렇다 한들,
나는 이 둘이 상호 대립한다고 보지 않는다.
선악, 시비를 그들이 어찌 모를까?
다만 현실 정합성에 따라,
자신이 믿는 바를 따를 뿐인 것을.

헌데, 여기 병가가 등장한다.
이기는 게 장땡인 것.

저 이치를 전부 꿰고 있는 병가는,
이기기 위해, 상황 조건에 맞게,
적합한 것을 택하여 행한다.

가령 병가가 자원봉사에 나섰다면,
그게 착한 일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착한 일인 양 비추어져, 점수를 많이 얻기 위함일 따름이다.
이로써, 내가 점수를 많이 획득하면 좋은 일이고,
또한 거죽으로 이를 감추고 자신의 선함을,
적극 외부에 선전, 선양한다.

자자,
그대는 어디에 설 것인가?

그러함이니,
나에게 물을 일이 아니다.
저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또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지그시 눌러 짚고서는,
제 갈 길을 걸어갈 뿐이다.

각행기로(各行己路)

각자는 찢어져 제 길을 걸을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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