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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나무와 광우병

소요유 : 2008.05.08 20:03


“알았느냐 ? 내 무덤에 가래나무를 심어라.
그것으로 부차(夫差)의 관을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오자서가 그가 모시던 오왕 부차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촉루(屬鏤)로 자결하면서 집안의 가신들에게 한 말이다.
부차는 오자서에게 명검 촉루(屬鏤)를 보냈던 것이다.
왕이 신하에게 말씀을 내리지 않고, 검을 달랑 보낸 것은
곧 죽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오자서(伍子胥)는 부차의 부왕이었던 합려(闔閭)를 도와 공을 세우고,
원래의 고향인 초나라에서 얽힌 자신의 가족사적인 원한도 나름대로 갚았다.
이 때 죽은 초나라 평왕의 시신을 파내어 매질을 하니,
과거 친구였던 초나라 신하 신포서(申包胥)는 이를 두고 천리(天理)에 어긋난다면 나무란다.
이에 오자서는 답하여 가로되,
吾日暮途遠 吾故倒行而逆施之
(해는 지고 갈 길은 멀다, 고로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하니, 흔히 말하여지곤 하는 日暮途遠이란 말의 출처가 예인 것이다.

하지만, 후에 합려가 죽고 이어 부차가 왕이 되자,
오자서는 차츰 부차로부터 경원시 당하고, 종내는 죽음에 이르른다.
그는 죽으면서 위의 말에 이어 이리 덧붙인다.

“... 내 눈알을 빼어서 오나라 수도의 동문에 올려놓아다오.
월군이 쳐들어와 오가 멸망하는 것을 이 눈으로 구경할 것이다.”

나중에 그의 악담인지 예언대로 오나라는 월나라의 침입을 받아
오나라는 망했고, 부차는 자살한다.

나는 오늘 이 말을 왜 떠올리고 있는가 ?

지금 온 나라가 “광우병(狂牛病) 소고기” 이야기로 뒤숭숭하다.
예전에 소는 농가에서는 없어서는 아니 될 중요한 가축이었다.
너른 땅을 갈고 엎는데는 소같은 축력(畜力)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돌자갈 밭은 물론이거니와, 진흙 밭 역시 굳으면 딱딱하기가 돌 같다.
이런 것을 사람의 힘으로 가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밭갈이엔 역시 성질이 무던하고, 힘이 센 소가 제격이 아닐 수 없다.
이리 중요한 일을 담당하는 소이기에,
옛날엔 소를 부리되 제법 대접을 해주었다.
한참 논을 갈 때는 그들 소도 힘에 부쳐 발바닥이 갈라진다.
해서 짚으로 신발을 해서 신기기도 하였고,
콩깍지, 콩같은 영양가 많고 맛있는 여물을 특별히 주곤 하였다.
비록 나중에 죽여 고기를 취한다한들,
사는 동안은 농부와 고락을 함께 하며,
생구(生口)라 하여 준가족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던 것이 이젠 세상이 뒤집혀 사정이 어떠한가 ?
똥구덩이가 산처럼 쌓인 곳에 방치되어 키워지거나,
좁디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그저 고기 또는 우유를 최대한 많이 생산하기 위해
그야말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쥐여짜고들 있다.
목축업자의 속담에
"meat is meat"란 말이 있다.
여기 생명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
그저 가축이란 고기덩어리를 토출하는 기계적 장치와 달리 보지 않겠다는 말이다.
하니 갖은 고안을 다 짜내 별 짓을 다한다.

광우병이란 무엇인가 ?

간단히 말해서 풀 먹고 사는 소에게,
버려 못 쓰게 된 축산 부산물을 먹여 생기는 것 아닌가 ?

제 동족의 살을 동족에게 먹이는 짓을 통해 목축업자는
사료값을 절약하고 수지를 맞춘다.
이 순간 소는 소가 아니다.
그저 화학공장의 생산 파이프라인에 불과하다.
공장하고 다른 것은 저 파이프라인이 살아서 움직이는 차이 뿐이다.
저들이 움직이면 업자 입장에선 공연한 에너지 소비가 일어나니까,
좁은 울타리에 넣거나, 모가지에 쇠사슬을 감아 꼼짝 못하게 한다.
단 몇 주의 어린 시절을 제하고는,
거의 평생을 이렇게 지내다 그들은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살아 있는 생명이되, 이리 묶고, 동여 사물화시킨다.
이게 "meat is meat"란 말의 함의(含意)다.

문득,
나는 광우병은 바로 오자서가 부차에게 던진 저 원한에 찬 가래나무가 아닌가 생각키는 것이다.
소들의 원한이 사무쳐 인간에게 던진 널짝인 게다.
(※ 널 : 시체를 넣는 관이나 곽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이리 악착같이 착취하는 자와 유린 당하는 자로 나뉘어 전락한 결과,
광우병, 구제역, 조류독감 같은 예전엔 없던 괴질이 창궐하게 되었음이니,
이들 병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동물들의 인간을 향한 저주요, 복수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저들의 분노와 슬픔이 끝내 화하여 광우병이 되고 구제역이 되는 게 아닌가 ?
정말 바른 하늘의 이치(天理)가 있다면, 이리 아니 된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노릇이리라.
하여 나는 오늘 저 원한에 찬 오자서, 그리고 그의 말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매일 밤, 동문 밖을 쳐다 보아야 한다.
원한에 찬 동물들이 오자서의 저 피 뚝뚝 듣는 눈알을 빌어,
인간을 향해 통곡하며, 분노하고, 이내 저주를 내리고 있음이다.
광우병 걸릴 확률이 작으니, 많으니 어떻다 하며,
숫자 놀음으로 줄다리기를 할 일이 아닌 게다.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있는 아주 한가한 짓거리로 보인다.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다.
게다가,
단 0.0001%의 확률일지라도 위험은 위험인 것이다.
생명을 앞에 두고, 확률게임을 하자는 것인가 ?
네놈들이나 실컷 하거라.

30개월 이상이니 이하니, 또는 광우병위험물질(SRM)이 어떠하니 하는 논의야말로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가 ?
도대체, 왜, 누천년 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을 두고
이리 잣대 들이대며 살얼음판을 걸어야 하는가 ?
그럴 양이면 차라리 먹지 말고, 품위를 되찾아야 한다.

팔당 상수도원에 온갖 오물 다 들어오도록 하고는 나중에 정화하면 그 뿐인가 ?
이즈음엔 상수도원보호구역도 이런저런 구실로 풀자는 논의가 솔솔 나온다.
본말이 전도 되어도 유분수지,
원인은 그대로 놔둔 채, 소 연령에 따라 SRM 2부위니 7개 부위니 하며,
이를 제거하면 안전하니 그리 먹자고 한다.

소가 언제부터 복어가 되었는가 ?
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버릴 것이 없다고 칭찬일색이더니만,
이 지경이라면 나중엔 피와 살을 발라내자고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미국의 쇠살주들은 오늘의 샤일록이 되어 광우 팔고자 광분하고 있다.
 (※ 쇠살주란 ‘소의 흥정을 붙이는 이’를 이름이니 곧 소장수쯤 된다.)
한국의 정부관리들은 그들의 주구(走狗)가 되어 열심히 그들을 변호하기 바쁘다.
모두 미쳐 돌아가고 있다.
그 때에 이르러, 과연 그 누가 피와 살을 발라낼 수 있단 말인가 ?

동물들을 원래의 제 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초식동물에게 풀 먹이고,
좁은 울타리 쳐부수고,
항생제, 성장호르몬 쳐먹이지 않고,
최소한 사는 동안만이라도 평화롭게 살다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소값도 자연 올라가고,
축산인도 품위있게 살게 된다.
말이 축산인이지 실인즉 지금 그들은 참으로 가여운 사람들이다.
멀쩡한 생령(生靈)들을 현생지옥 속으로 몰아넣고 제 이익을 도모하며,
제 명을 이어가니 얼마나 비참한 삶이란 말인가 ?
소비자 역시 이들을 빌어 제 입을 즐겁게 하고 있으니,
이 또한 사뭇 죄스런 노릇이 아닌가 ?

이리하면, 언제나 그렇듯이
인간복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동물복지를 거론함은 감정적 사치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는 이가 나타난다.
나는 묻는다.
그럼 그대는 인간복지를 위해 실천한 구체적인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

가령, 인간복지만을 생각해본다 하여도,
복지서비스를 수혜받을 인간군들도 천차만별인즉,
한 층위를 보살피면, 이내 그 보다 못한 층위를 소홀하게 될 터다.
그리되면, 종국엔 맨 하위 층위에 집중하지 않는 한,
이들로부터 한가하며, 사치스런 짓이란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복지행이란 각자 자신의 처한 상황과 인연에 따라 펼쳐지는 것이니,
자리가, 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나 이외의 타자를 향한 관심과 애정의 실존,
자리, 시간을 떠나 그것 자체로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동물, 인간, 게다가 인간내에서도 또 가르고 든다면,
어느 명년에 복지행, 자비행을 펼 수 있겠는가 ?
이리저리 따지지 말고,
지금 당신 눈 앞에 현전하는 그 현장부터 시작하라 !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동물에게 자비심이 깊은 사람은 인간에게도 정이 깊고 따뜻하고,
동물을 하찮히 대하는 이들은 인간에게도 각박하고 차갑더라.
이리 말한다면, 이 또한 듣기에 따라서 역겹게 느끼는 사람인들 없을손가 ?

한즉 차별하지 말고 두루 한 마음으로 대하라.
작으면 작은대로 바로 그대 주변부터 출발하라 !
그런 의미에서 권하노니,
오늘 당장 한끼일지라도 소고기 육식을 삼가면 어떠할까 ?
이것만으로 그대는 이미 ‘동물복지’를 위한 구체적 실천행을 한 것임이니,
굳이 ‘인간복지’를 외면하고 있다고 그대처럼 책망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동물복지’를 유보함으로서,
그대가 ‘인간복지’를 염려하고 있다는 상위의 지위가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동물복지’를 행함으로서 그대는 보다 인간적인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니, 이로서 광우병도 피해 갈수 있고, 온 천하에 가득한
동물들의 신음과 울음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 때 비로서 그대는 인간임을 실증할 수 있게 된다.
외람스럽다한들, 나는 감히 이리 외치길 주저하지 않노니.


(※. http://video.hsus.org/ 에는 더 많은 슬픔이 켜켜로 쟁여 있다.)

이 영상을 보고도 소고기가 먹히는가 ?
소고기에는 이런 인간의 패악질 흔적이 그대들이 그리 좋아 죽겠다는 마블로 아로새겨져 있음이다.
저들의 슬픔이 흘러 육즙이 되고,
분노가 점점히 박혀 끝내 광우병이 되지 않는다면,
어찌 천도(天道)가 있다 할 수 있겠는가 ?
광우병은 인간의 불행이 아니고,
저들이 인간에게 내린 응징의 징표로 독해되어야 한다.

소고기가 저런 현장에서 생산되는 것이라면,
마땅히 인간은 모두 속죄하여야 한다.
저들의 분노와 슬픔을 나 역시 분노와 슬픔으로 마중하며,
깊이 참회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어떤 작자는 싸게 소고기 먹을 수 있게 되는 것만이라도
한미FTA의 공덕이라며 요설을 떨더니만,
이제 광우병 소동이 일어나니 장독대 뒤로 숨었나,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다.
늘 그러하듯이 본질은 그리 천박한 것이 아니다.

정도를 걸어야 한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그러다 광우병이라도 걸리면 그 때도 그리 게거품을 물 것인가 ?
나는 미국 소고기 때문에 단 한 사람의 광우병 환자라도 발생한다면,
그 거래는 아무리 자동차 많이 팔고, 반도체 많이 판다한들,
우리 모두의 불행이자, 실패라고 생각한다.
내 비록 나물 먹고, 물 마시고 살지만,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마음이 평화롭다.

다이어트란 무엇인가 ?
욕심껏 쳐먹고, 살이 찌니까,
거꾸로 덜 먹고 살덩어리 덜어내자는 짓 아니냐 ?
하지만, 소식은 처음부터 삼가는 마음으로 짓는 일관된 식례(食禮)이다.
쳐넣고 나중에 깍아내자는 미련한 짓거리가 아니란 말이다.
마치 동물 사료 먹이고 광우병 생기니까 SRM 부위 깍아내고는
이젠 안심이니 다시 쳐먹자 라는 행태와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그리 육식을 해대었는가 ?
광우병 소동 따라 전전긍긍하기 보다 이쯤에서
차라리 육식 절제하고, 소식하며 마음을 가지런히 가다듬는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소식(小食)하고,
더불어 소심(小心), 가벼운 운동(小動),
이 삼자만 제대로 행해도 천하가 태평해진다.
대운하, 몰입영어 ..
도대체, 이 따위 욕심 사납고, 천박한 짓거리가 왜 필요한가 ?

기억하는가 ?

1994.10
멀쩡하다던 성수대교가 붕락되었다.

그 때, 그 누가 이를 예고 하였는가 ?

그 날,
우리의 누이, 딸들은 피지도 않은 채, 한 떨기 꽃이 되어 산화되고 말았다.

다리는 안전해,
동아건설은 이 땅에서 최고야.
이 말씀은 금과옥조가 아니다.
다만, 한낱 자기최면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 최면 속에서, 그 신화 가운데서,
단 1% 아니 0.0001%의 가능성,
그 희미한 안개 틈속으로 사려졌다.

사악한 말씀이 우리 곁에 다가올 때,
우리는 왜 언제나 그리도 미욱할까나 ?

정작 우리가 뒤늦게 깨달을 때,
이미 우리는 그 자리의 진실을 한참 지나쳐왔기 일쑤다.

이명박은 말한다.
“값 싸고 질 좋은 소고기를 먹게 되었다.”

이 세상에 싸면서 동시에 질 좋은 것은 없다.
싸면 질이 낮고, 비싸면 질이 높은 게 무릇 정상적인 세상의 이치다.
싸게 만들려니까, 동물성 사료 먹이고, 좁은 울타리에 가두는 패악질을 하게 된다.
저들이 주장하는,
30개월이 넘는 소가 질이 떨어지니까 시장에 나올 이치가 없다란 말은 일견 그럴 듯하다.
하지만, 송아지를 두 번, 세 번 뽑아내고 나면 30개월이 곧 넘게 된다.
즉 나이 많은 소들은 목축업자들이 이문을 몇 번 짜내고자 하는 한, 필연적으로 생기게 된다.
문제는 이들이 광우병 위험이 높다라는 것인데,
당연히 미국민에게 식용내지는 나아가 공업용으로도
처분하기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이 되고도 남는다.
지금 미국의 모리배들은 마지막 한방울의 이문을 위해,
이들 소들을 처리할 종말처리장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 협상의 결과,
그들로서는 자국 시장에서 쉬이 처리할 수 없는 것을 한국을 통해 처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서 그들은 질 좋고 싼 것을 파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를 비싸게 팔 수 있는 시장을 하나 거저 얻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광우병 위험을 불사하고 사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다만 가난하거나,
이를 적당히 처리하여 남에게 팔아먹으려고 하는 장삿꾼의 요설 위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문제는 자신이 채식을 한다고 하여도,
도대체가 한국에선 이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다 못해 바깥에서 냉면을 먹어도 육수는 고기로 내지 않는가 말이다.
난 광우병 의심되는 소고기는 차치하고, 고기 국물도 피할 선택권이 없다.

이명박의 “값싸고, 질 좋다.”
이 문법은 얼마나 짜릿하도록 황홀하니 실용적이더냐 말이다.
그런데 0.001% 아냐 0.000000001% 일지라도,
그대가 바로 그들 통계에 포착되는 불운의 당사자가 된다면,
그 때에도 그대는 실용이란 문법을 빌어,
이명박을 찬양하고, 당신의 불행을 축복할 것인가 ?

생명은 확률로 안전을 확보할만큼 값 싼 것이 아니다.
그게 인간이 되었든, 동물이 되었든.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
마땅히 대로(大路)를 걸어야 한다.

대운하, 몰입영어, 광우 ...
하나같이 모리(牟利)에 혈안이 된 천박한 영혼의 문법이다.
도대체가 저들에겐 한톨의 부끄러움조차 없다.

가을날 바알갛게 익어 가지에 달린 감이 왜 아름다운가 ?
잎 다 떨군 채, 욕심 버린 그 나신(裸身)의 부끄러움에
덩달아 나 역시 겸허함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
하기사, 어떤 천박한 영혼은 입안에 침이 먼저 고인다고 하더라.
부끄러움이 없는 인간은 얼마나 천박한가 말이다.

이번 소동은
광우병으로부터의 안전을 구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아니된다.
우리가 동물들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하고 있는가 되돌아볼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 때라야 비로서 올 가을 감나무에 달릴 바알간 홍시를 바로 볼 수 있으리라.

이명박은 지금 값 싸고 질 좋은 고기를 탐할 것이 아니라,
저 바알간 홍시의 수줍움을 배워야 한다.
천하의 장사꾼이라지만,
아무려나 그도 명색이 인간이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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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곰단지 2008.10.15 01:30 PERM. MOD/DEL REPLY

    '다름 아니다'라는 말의 국적이나 아시고 떠드시기를!
    한글과 왜말도 구별 못하니 소보다 못한 얼치기로다.

  2. 사용자 bongta 2008.10.15 21:24 신고 PERM. MOD/DEL REPLY

    글을 대하니 이내, 왕자부지 내자불극(往者不至 來者不極)이란 말이 떠오른다.
    하여 불극(不極)한 말 몇 마디를 보태본다.

    그대는 혹 쇠살주라도 되는가?
    아니면 미국 쇠고기 수입해다 파는 푸주간이라도 운영하는가?

    아니라면, 어이하여 가랑잎에 옮아 붙은 불처럼 바르라니
    제 성질을 값싸게 태워 올리는가?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기껏 본문 글에 대하여는 일언반구도 없이,
    고작 글귀 하나 잡아내어 그리 안하무인 무례를 저지르는가?

    사실은 내 글귀가 문제가 아니라,
    글의 논조가 그대 맘에 들지 않았음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다.
    차라리 먼저 본글에 대한 비평을 펴고,
    나중에 이 문제를 지적하였으면 한결 떳떳하였을 텐데.
    이리 곁가지를 두고 밑터진 계집처럼 쏟아 내갈긴
    심보가 여간 비겁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다.
    해서, 본말이 전도된 형편이라 영 상대할 만한 재미가 일지 않는다.
    하지만, 심심하니 이리 말을 지어가며, 재미를 부러 만들어 가며 놀아본다.

    의식(衣食)이 족해야 염치를 안다고 했는데,
    느닷없이 이리 무뢰(無賴)한 언사를 본데없이 내지르는 그대를 보니,
    혹여 지금 의식이 제법 곤란한 형편인가 싶다.

    그렇지 않은가?
    본글에 대한 시비(是非)는 고사하고,
    글귀 하나 집어내어 느닷없이 ‘소보다 못한 얼치기’라고 나무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하기사 작금의 현실을 보자면 소보다 더 나은 인간들이 그리 흔하던가?
    주위를 둘러보면,
    ‘동물보다 못한 인간’이란 평을 받아도 전혀 그를 것이 없는 인간 군상들이 차고 넘친다.
    ‘병든 소를 거리낌 없이 수입하고, 이를 싸고 질 좋다고 권하는 세상,
    그리고 성조기 흔들며 이를 찬양하는 이들,
    그대와 같은 넋 나간 부류들이 적지 않은 하수상한 세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소보다 못한 얼치기’라는 말은 새삼 나무람이 될 여지도 없다.
    이미 인간은 동물보다 한결 못한 족속들이 되고도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 일컬어지는 족속들이
    그나마 ‘예의염치’를 잃으면 가히 그 하찮은 인간 축에도 끼일 수 없지 않을까?
    그러하다면, 이리 예의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 그대는 무슨 물건이란 말인가?
    결코 소도 아니요, 그렇다고 인간도 아니라 할지니,
    도대체 그럼 무엇이라고 불러야 적당하겠는가?

    불한당(不汗黨)!
    땀도 내지 못하는 무리들.
    그대는 미련 곰단지가 아니라 그저 불한당인 게다.
    땀을 내지 못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제법 심각한 일이 벌어진다.
    중심 잡고 곰곰이 생각해볼 노릇이다.

    ***

    '다름 아니다'
    이 말이 왜색이라는 것은 진즉 알고 있다.

    어문생활이 참 어렵다.
    한글 속의 한자, 외국어, 외래어에 대하여는
    나중에 혹 시간이 나면 소회를 밝히기로 한다.

    그런데 왜 하필 한글인가?
    만약 음식으로 따지자면 한식 속의 양식, 일식은 왜 아니 문제 삼지 않는가?
    복식(服飾)은 또 어떠한가?
    한복 외에 양복은 입어도 괜찮은가?

    한편으론 이런 사람들도 있다.
    복거일은 영어 공용화를 주장하고,
    이명박 정부는 영어프랜들리 정책을 쓰자고 주장했지 않은가 말이다.
    또한 한글전용론자도 적지 않다.

    이런 문제들은 일도양단으로 간단히 해결될 정도로
    그리 간단하지 않다.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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