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착시현상 - ⅱ

소요유 : 2009.03.07 12:25


예컨대,
이미지에서 좌측 사람은 5칸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
우측 사람은 15칸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각 해석대상공간 척도(scale)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인지분해능력의 불완전성에 기인하여,
이를 무시하고 각기 다른 이질공간내의 측정량을 보정 없이
그냥 등량.등가(等量.等價)의 척도로 환원하여, 비교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 참고 글 : ☞ 2009/03/06 - [소요유] - 착시현상)

앞의 글 일부를 꺼내놓고 이어서,
잠깐새 일은 생각의 파편(破片) 한 조각을 덧붙인다.

마치,
엿가락 하나를 들고 먹는 아이의 셈법과 같다.
곁에 있는 친구는 엿가락을 두 동강 내어 먹고 있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꾀를 내어 10조각으로 나누었다.
2 동강보다 10 동강은 5배나 크다.
사뭇 오래 먹을 수 있으리란 기대가 생긴다.

조삼모사(朝三暮四)는 원숭이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이 아니더라도 의식을 가진 모든 생명은
어쩌면 셋 더하기 넷은 일곱이 됨을 알는지도 모른다.
다만 조삼모사(朝三暮四)보다는 조사모삼(朝四暮三)이
한결 낫다고 여.긴.다..

이게 나는 처음엔 눈먼 욕망 때문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실은 미래보다 현재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고쳐 생각했다.
미래의 가치를 현가할인하면 절대 수준(量)이 줄어든다.

CV = FV/(1+r)n

원숭이 입장에서는 아침에 먼저 4개를 얻어먹는 게 나은 것이다.
누가 아는가?
주인이 역적으로 몰려 저녁나절쯤에 관청에 잡혀 갈 수도 있다.
그러면 아침에 3개 먹고 저녁에 4개를 막연히 기대하는 것에 비해서는
일단 1개는 구체적으로 남겨진 이익인 것이다.

이리 볼 때,
조사모삼(朝四暮三)은 분명 조삼모사(朝三暮四)보다는
원숭이의 생존전략으로서는 득책(得策)이다.
그 누가 있어,
조삼모사(朝三暮四)를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말이라 이르는가?
이야말로 지혜로운 처세술이 아닌가 말이다.

시간에 복속된 존재.

시간의 불확실성에 노출된 생명들의 현명한 선택행동이 누적되어,
조삼모사(朝三暮四)보다는 조사모삼(朝四暮三)을 선호하게 하는
심리적 기질로 정착(定着)된 것은 아닐까?

그러다 보니 “셋보다는 넷이 유리하다.”
나아가 “큰 것이 좋다.”라는
대수선호(大數選好)가 유효한 생존전략으로
심리의 갈피 속에 터 잡게 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이게,
나중에 역으로 제 멱줄을 움켜지게 될지언정,
당장은 이문이 남는 장사일런가?

나는 사람들이 이 양자를 가르는 금(線, 경계)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경계 안쪽 깊숙한 곳을 묻지 않기에,
천하에 온갖 사태가 벌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그것을 잇대어 의론을 펼 시간이 없다.
다만 문제만 제기하고 후일을 기약한다.

앞의 글에서 지적한,
착각이 추론의 결과라는 것은 여전히 틀린 말이지만,

“때론 학습이 가장 큰 착각의 요소다."

이 명제는
제법 그럴듯한 말인 양 싶어 집을 나서기 앞서 잠깐 일어난 생각을 적어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맨 아래 그림의 비밀은 무엇일까?
이 비밀을 풀 수 있을 정도면,
수리 또는 논리력이 뛰어나다고 인정해줄 수 있으리라.
아니, 그저 관찰력이라고 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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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07 16:56 PERM. MOD/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qkrehtsydsfhgh 2009.03.25 20:49 PERM. MOD/DEL REPLY

    비밀이뭔가어?

  3. bongta 2009.03.25 23:54 신고 PERM. MOD/DEL REPLY

    무슨 깊은 비밀이 숨겨 있지 않습니다..

    답을 알지 못하면 도저히 잠을 못 이를 정도라면 email로 연락주세요.
    다른 분들하고 내기가 진행 중이라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세요.
    스스로 풀어 내는 것이 한결 재미있습니다.

  4. 만도사 2009.07.12 02:17 신고 PERM. MOD/DEL REPLY

    두 삼각형(빨간색, 녹색)의 내각의 크기가 다르군요.
    그래서 상/하 두 도형의 빗변이 직선이 아니네요.

    조삼모사에 대한 오래전 생각을 정리했는데, bongta님 견해와 유사한점이 있는듯 합니다.
    트랙백 걸려고 하니 자꾸 에러가 나네요 ^^*
    http://mandosa.tistory.com/11

  5. bongta 2009.07.12 18:26 신고 PERM. MOD/DEL REPLY

    안녕하세요.

    저의 착안점은 외부 큰 삼각형 안에 그려진,
    작은 삼각형들의 높이 또는 밑변이,
    모두 정확히 모눈 눈금에 딱 맞추어진 것입니다.
    이것들이 이동하였을 때,
    빗변들의 和가 같은 것은 당연하지만,
    이 순간 삼각형들의 밑변, 높이가 모눈종이 눈금에 딱 맞아 떨어지는 경우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할 수 없지요.
    그러하니 필경은 도형에 그려진 선분이 직선이 아니라,
    비뚜로 그려져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직접 재어 보아 그릇됨을 확인하였다 하시니,
    역시나 그렇군요.

    두 번째는 지극히 간단한 의심인데,
    기하학을 믿는다면 면적 차이는 곧 선분의 왜곡을 전제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어쨌건 사람들은 왜 이런 왜곡을 쉽사리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는 도형의 선분들이 외부에 줄쳐진 ‘구각형(矩角形) 무늬’에 잡혀 있기에,
    사람들은 쉽게 반.듯.하다고 속아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방(方)이란 한자는 ‘모방’이라 이르며 모가 난 모습을 떠올리게 되지만,
    ‘바르다’는 뜻도 아울러 갖고 있습니다.
    각이 졌으니 반듯하고, 반듯하니 굽지 않고, 나아가 바르다(正)라는
    의미 새김으로 나아갑니다.
    ( ※ 참고 글 : 방(方)과 원(圓) http://bongta.com/284 )

    그러하니 방형(方形)의 무늬를 배경 바탕으로 등장한,
    도형들(선분)도 덩달아 바르겠고니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착시현상의 상당 부분은,
    이런 연유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착시뿐이겠습니까?
    사기도 이러할 때 당하게 되지요.
    믿을만한 정보 그러나 실인즉 사이비 정보에 불과한 것에 기초하여,
    그 사람은 ‘바르다’, ‘옳다’라고 오인하게 될 때,
    사기를 당하게 되지요.

    위광효과(威光效果)라고나 할까요?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위광을 의심해보는 지혜가 필요하지요.

    ***

    저는 앞에서 조삼모사에 대하여 댓번 언급을 하였습니다.
    이번 글에서 조삼모사가 갖고 있는 한 측면을 생각해보았습니다만,
    흔히 알려진 이 우화의 ‘어리석음’이란 주제도 나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옹지마’의 이야기 구조처럼,
    우리 앞에 덩그란히 놓여져 있는 이야기란,
    한 가지 의미로만 새겨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동구 밖에 있는 우물물이,
    철 따라, 또는 내 기분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
    한 가지 맛으로 남아 있지 않는 것이지요.

    一味千香
    一香千味
    千味千香

    즉,
    “사물의 이치란, 一味一香 고정된 것이 아니다.”
    저는 이리 생각해봅니다.

    끝으로,
    이 우화의 주인공이 왜 하필 송나라 사람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 ※ 참고 글 : 기우(杞憂) http://bongta.com/71 )

    여기서는 원숭이가 어리석음을 담당할 주체이고 그 상대역을 宋人이 맡고 있지만,
    이번에 평소와 다르게 새삼 잘 보아 주려고 이 역을 맡긴 것이라고 보다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라면 宋人이나 杞人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는,
    사회적 통념 또는 유행이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하니 주객 역을 떠나 의당 당연히 宋人이나 杞人이 맡게 되었다.
    저는 이리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6. 새옹지주 2010.03.09 17:13 PERM. MOD/DEL REPLY

    빨간 삼각형(8:3>2.66666)과 푸른 삼각형(5:2>2.5)의 각도가 다르군요. 위의 삼각형조합은 오목한 빗변을, 아래는 볼록한 빗변을 가집니다. 오목하던것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만큼 1격자만큼의 차이가 생깁니다.

    bongta 2010.03.09 22:24 신고 PERM MOD/DEL

    모눈종이를 치워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이 문제를 풀고자 할 때,
    우리가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까닭 중,
    가장 큰 것은 모눈종이의 친절함에 구속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험한 세상에 그 누가 줄까지 반듯하게 쳐주며,
    우정 우리 손을 잡고 안내를 해준단 말입니까?

    문제를 낸 사람은 시건방지게도 우리를 감히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데 거죽으로 보건대 일응 제법 친절하니 배려를 하고 있으니,
    그가 정녕코 우리의 적입니까?
    아니면 친구입니까?
    우리를 감히 시험하려고 들진대 그자는 필경 적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한데도 우리는 저자를 친구로 여기고 있음이 아닙니까?
    단지 친절하게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바로 앞전에서 그가 우리에게 공연히 문제를 내어,
    우리를 괴롭히고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던 것이 아닌가요?
    저라면 차라리 문제 풀기는커녕 문제를 외면해버리겠습니다.
    호기심이 없다든가, 문제 풀기가 성가셔서가 아니라,
    저자가 제게 던진 문제 자체를 무화(無化)시키는 것이지요.
    ( ※ 이 부분에 대한 참고 글 : http://bongta.com/175 )

    친절한 것 하고, 친절한 듯 보인다는 분명 다르지요.
    그런데 이를 분별할 만큼 우리의 지성이 발달했다든가,
    감성이 드라이하니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는가요?

    이런 문제가 갖는,
    이중의 복선구조는 실인즉 우리네 일상적인 세계의 한 축을 이룹니다.
    저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에 이런 복선구조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친절함이 그래서 가장 무서운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 달콤한 것이라니, 순간 우리는 거기 의지해버리고 싶은 유혹에 빠져듭니다.
    도대체가 아니 그럴 까닭도 없습니다.
    저 친절한 것을 거부하거나 의심한다는 것은,
    나의 순정 역시 의심스러워하는 만큼 딱 그 수준 정도로 불결한 것이거니와,
    남을 의심씩이나 하고 사는 나의 모습은,
    곧 내가 타락해버리고 있지나 않나 하는 걱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어느 누가 쉽게 걸어가겠습니까?
    사후적으로 댓가를 치루게 됩니다만,
    당시의 현장은 안타깝게도 미래는 전망되지 않는 암흑일 따름입니다.

    도박사 차민수를 모델로 드라마 올인에서,
    아버지역 이덕화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넘어진 너에게 손을 내미는 놈이야말로 위험한 놈이다,
    그 놈이 언제고 너를 제일 먼저 쓰러뜨리리라."

    이 quiz를 제대로 풀려면,
    이덕화의 저 말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모눈종이’야말로
    ‘내민 손’,
    ‘친절한 손’입니다.

    그러한데,
    현실에선 이를 의심조차 할 줄도 모르는 게 태반인데,
    여기서는 그래도 다행히 문제로 제기되었기에,
    의심이란 절차를 거치게 됩니다.
    자자, 우리는 이를 알아내기 위하여,
    이제 ‘자’를 가지고 직접 잽니다.
    그러하다면, 이젠 ‘자’가 ‘모눈종이’ 역을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 ‘자(ruler)’는 의심해서는 아니 됩니까?
    尺이라도 좋고 통치자라 해도 좋습니다.
    왜, 거기에 의지해야 합니까?
    복속하므로서 우리는 평온을 가장(假裝)합니다.
    그렇지요.
    실제 평온할는지 아닐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사전적(事前的) 현실에선,
    실은 평온하다고 느끼는 그 감정을 사는 것일 뿐입니다.
    결과는 사후에 밝혀질 따름입니다.

    새옹지주님은 주식투자를 하시니까 잘 아실 것입니다.
    이동평균선의 지행성(lateness) 말입니다.
    이동평균선은 주식투자의 지팡이가 아니라,
    투자자의 무덤입니다.
    이동평균선 역시 투자에게 평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러리란 자기충족(self-fulfilling), 자기최면에 불과하지요.
    ( ※ 참고 글 : http://bongta.com/152 )

    실제 제가 최근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저께 굴삭기 기사가 와서 터를 닦을 때,
    그가 가져온 자로는 예정 길이를 충분히 넘었는데,
    어제 비닐하우스 기사가 와서 자로 재었더니 오히려 부족하였습니다.
    해서 제가 농담 삼이 이리 말했습니다.

    “아마 요즘에 ‘자’가 메이커에 따라 길이가 차이가 나는가 보지요.”

    그러자 기사가 이리 대답합니다.

    “그럴리가요.”

    이 때문에 굴삭기 기사를 다시 불렀습니다.
    실인즉 굴삭기 기사의 오판이 문제의 원인입니다만,
    굴삭기 기사가 말하길 기름 값이라도 달라고 합니다.
    이번에 달려온 굴삭기는 ‘공육’이라고 먼저 온 ‘공삼’에 비해선 사뭇 크더군요.
    저를 향해 아가리를 크게 벌린 버킷(bucket)이,
    저를 막 집어 삼킬 듯하여 겁이 덜컥 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철갑으로 무장한 저 거대한 위용에 주눅이 들어,
    그저 얌전하니 돈을 더 지불했습니다.
    그리고는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장자의 당랑규선(螳螂窺蟬)처럼,
    저 역시 3개월은 두문불출이라도 하여야 할 터이지만,
    그럴 수는 없는 처지이니 마음만이라도 잘 챙겨 간수해야겠더군요.
    ( ※ 참고 글 : http://bongta.com/768 )

    ***

    선생님의 닉 ‘새옹지주’가 의미심장하단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 때, 제가 문득 새옹지마를 주제로 글을 하나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무척 바쁘기 때문에 나중으로 미루었습니다.
    다만 말씀이 나온 김에 몇 가지 생각의 단편만을 간단히 소개해보지요.

    그런데 새옹(塞翁)의 위치는 전사(戰士)가 아니라,
    오히려 이들로 인해 피해를 받곤 하는 변방의 늙은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새(塞)는 곧 변방이니 거기는 사실 전쟁터와 다를 것 없습니다.
    새(塞)에 사는 백성들은 오죽하면 거기까지 밀려나 살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하니 그들은 필경 이리저리 전쟁에 휩쓸려 당하고만 살았을 것입니다.
    여기 그가 놓인 삶의 현장에서,
    무슨 일이 되었건 간에 저항한다고 하여도 제 뜻대로 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을 터.
    그러하니 새옹은 실인즉 특정인 하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변경에 사는 주민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 저항하며 살았다면 진작 삶이 결딴났을 것입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새옹이 아닌 경우가 없을 것입니다.
    환언하면 새옹이란 변방에 사는 사람이자, 곧 살.아.남.은 사람의 지칭어일 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새옹지마란 고사는 새옹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는
    일반적인 해석을 저는 마냥 좇아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고사는 어떻게 보면 삶의 질곡에 갇힌 이의 어쩔 수 없는
    지극히 수.동.적인 처세술의 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뭐 이 정도로 새겨야 할런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게 ‘유일한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시각에서 저 고사를 다시 조명할 수도 있다는,
    즉, 새로운 해석공간을 제시하고자 할 뿐입니다.

    변방에 살고 있다면 새옹(塞翁)이 아니라,
    마땅히 전사(戰士)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 새외(塞外)는 만리장성 이북지방을 뜻하듯,
    본래 새란 단순히 변방을 뜻하는 것을 넘어 적과의 접경지역으로,
    거의 전쟁이 상시로 일어나는 전쟁터를 방불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런 주장이 당연 제기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 중에 변방이 아닌 곳이 있던가요?
    변방 즉 전쟁터 말입니다.
    그렇다면, 새옹은 너무 수동적인 인간의 전형으로 그려지고 있지요.
    '새옹'은 변방에서 살아남았다는 의미 이상을 건져 올리려고 노력한다면,
    이는 난센스가 아닐까?
    저는 이리도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현실에선 새옹 식으로 살았다가는 아마도 반병신이 되어,
    거덜이 났기 십상이기도 합니다.
    이게 진실이라면 저 새옹지마의 고사는,
    지혜를 말하고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체념의 자기 미화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편 전사의 삶은 그럼 의미가 있는가?
    과연 새옹보다 더 값진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 물음으로 인해 고민이 유발된 사람 스스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고민할 이유가 없다고 느낀다면,
    이제껏 제 글을 읽은 분은 읽으시느라고 공연히 시간을 낭비한 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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