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과 발.
길이의 단위 중 서양에 feet란 게 있다.
이게 발의 길이를 뜻하니 발 크기를 기준으로 사물의 길이를 가늠했다는 얘기다.
이게 필경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크기가 변동했을 터지만,
현대엔 30.48cm에 해당된다.
반면 동양엔 척(尺)이란 게 있다.
척 역시 신체의 특정 부분을 기준으로 따진다.
성인남자가 손가락을 쭉 폈을 때의 엄지와 중지 끝 사이의 거리를 척이라 한다.
이게 대략 20cm 되니 최초에 사용하던 고대의 척 단위와도 대략 비슷하다.
그런데, 내가 어느 상학(相學) 책에서 보니,
손목에서 팔꿈치까지를 1척이라고 한다고 하니,
어느 것이 바른지 아직 확실한 전거를 찾지 못하겠다.
고대국가별 尺 | ||
國 | 1尺 | |
商 |
16.95cm | |
周 |
23.1cm | |
秦 |
약23.1cm | |
漢 |
21.35~23.75cm | |
三國 |
24.2cm | |
南朝 |
약25.8cm | |
北魏 |
30.9cm | |
隋 |
29.6cm | |
唐 |
30.7cm | |
宋元 |
31.68cm | |
明清 |
31.1cm |
주나라 당시 1척이 23.1cm라 하였지만,
전국(戰國)시대만 하여도 나라간 일치하지 않았다.
후에 진(秦)이 천하통일을 하면서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니,
1척은 23.1cm로 정해졌다.
하지만, 후대에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가감 변동이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1척은 30.303cm로 보게 되었으니,
대략 1m를 삼등분한 크기다.
촌(寸)은 또한 1척을 10등분한 크기인데,
이게 쓰이는 곳에 따라 달라 일정치는 않으나,
보통 손가락 마디 하나를 1촌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공자의 키가 9척(尺) 6촌(寸)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기준인 23.1cm를 고려하면 이는 221.76cm에 해당한다.
또한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는 9척, 장비는 8척이라 하는데,
이를 당시의 척도로 환산하면,
관우는 217.8cm, 장비는 193.6cm에 상당한다.
현대인에 비하여도 보기 드문 거인들이라 하겠다.
보통 5척 단신, 8척 장신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때의 척을 지금 기준인 30여cm로 보면 무리가 있고,
대략 23cm~24cm 정도로 생각하면
5척은 115(120)cm, 8척은 184(192)cm에 상당하니 가히 근리(近理)하다 하겠다.
일반 보통 사람들의 크기는 7척으로 보면 되는데,
어림짐작으로 대략 161cm~168cm 정도로 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성인 남자 기준이다.
또한 10척을 1장(丈)이라고 하는데,
이를 상(商)나라 기준으로 보면 169.5cm 정도로 대략 사람 키에 상당한다.
장부(丈夫)라고 이르는 말은 사실 이에 유래한다.
비쭉비쭉 키가 큰 이들을 장부라 이름은,
대청마루 아래 대령한 하인배들,
또는 황토밭에 죽 늘어선 농노들, 하니 일꾼쯤으로 새겨,
귀족, 사대부들이 거느린 이들을 한낱 재물에 비겨 뿌듯하니 차오르는 감정을 표한 것일까?
아니면, 두 발로 땅을 겯거나 우뚝 일어선 사람,
네발 동물이 아닌, 두발 가진 사람,
그 장엄한 표상을 일러 장부라 한 것일까?
사내 대장부(大丈夫) 운운 할 때,
이는 곧 장부 앞에 크다는 대(大)를 넣어 꾸민 것이니,
곧 큰 사람이란 뜻이 되겠다.
이게 설마하니 키만 장대처럼 큰 것만을 이르는 것은 아니리라.
하나의 사람으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단위 인격체를 말한 것임이리,
그래 맹자는 장부를 이리 일렀음이다.
“천하의 넓은 곳에 거하고,
천하의 바른 위치에 서며,
천하의 큰길을 가고,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좇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길을 걷고,
부귀가 음탕하게 하지 않으며,
빈천도 (절개를) 변하게 하지 못하며,
위무도 굴하게 하지 못한다.
이를 일러 대장부라 한다.”
“居天下之廣居,立天下之正位,行天下之大道。
得志與民由之,不得誌行其道。富貴不能淫,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다시 돌아와 나머지 말을 마저 잇는다.
그런데, 위 표처럼 길이가 객관적인 표준치로 딱 정해진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신체 칫수를 기준으로 때마다 달리 사물을 재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1寸이라 하여 누구에게나 3.03cm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바로 한의학에서 볼 수 있다.
예컨대,
두부(頭部)의 전후중정발제간(前後中正髮際間) 12寸,
- 머리통 앞뒤 가운데를 따라 머리카락 난 부분을 기준으로 그 길이 12촌
양유두간(兩乳頭間) 8寸.
- 양 젖꼭지 사이 8촌.
이렇듯 신체 각 부위별로 寸의 척도가 달라진다.
이는 사람마다 모두 신체의 장단(長短)이 다르니,
그 길이의 척도를 외부의 도량기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 크기에 두겠다는 것이다.
그러하니, 尺은 개개 사람마다 달라질 뿐더러,
같은 사람이라도 신체 부위에 따라 또 달라진다.
이게 사뭇 그럴듯한 게,
예컨대 침(鍼)을 생각해보자.
의서(醫書)에 이르길,
'직하(直下) 1촌(寸)에 침을 놓아라'는 글이 있다 할 때,
이 1촌을 누구에게나 3.03cm로 새긴다면 큰 사람 작은 사람에 따라,
취처(取處)할 곳이 달라질 터이니 외려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모름지기 사람에 따라 알맞게 기준 척도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의지할 바가 없는 것이다.
병을 고치려면,
거지라 한들 왕의 신체 칫수를 따를 수도 없고,
따라서도 아니 될 것이니,
치병(治病)의 도리는 오로지 자신에게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尺은 그러하기에 두 가지 함의(含意)를 갖고 있다.
1. 발이 아니라 손으로 말하기.
2. 척도는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몸이라는 것.
참고로, 주(周)나라의 척도인 寸、咫、尺、仞、尋、常은 모두
인체를 기준으로 정해졌다.
(※
咫 : 周制八寸,合今制市尺六寸二分二厘
仞 : 周制八尺,汉制七尺,周尺一尺约合二十三厘米
尋 : 中國古代的一種長度單位, 八尺爲尋
常 : 八尺爲尋,兩尋爲常
)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묘하다.
서양에서 발로서 사물을 재고,
동양에선 팔 또는 손으로서 사물을 재지 않았는가?
우리가 가만히 앉아 있는 어떤 사람을 채근한다든가,
불러 무엇을 전하려 할 때,
발로 툭 쳐서 일깨우면 대단히 실례가 된다.
점잖은 이라면 우선은 나지막이 소리를 내어 부르겠지만,
상대가 미쳐 제대로 못 들으면,
그제야 가만히 손으로 흔들어 깨우게 된다.
나는 생각한다.
척도라는 것이 나 외의 외물을 셈하는 방도를 구한 것이라,
이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였는가는 사뭇 중요한 포인트라 하겠다.
발로 셈하려는 이,
손으로 셈하려는 이.
세상엔 이렇게 양자가 서로 갈라 서 있는 것이다.
발로 세상을 재려는 사람은 거칠지만 씩씩하다.
손으로 재려는 사람은 섬세하지만 조심스럽다.
발은 직선적이지만,
팔은 감싸 안듯 오므리면 둥그렇게 된다.
그래서 그런가,
전자는 공격적, 외향적, 무력, 정복, 도전, 외왕(外王), 정의, ....
후자는 수동적, 내향적, 사랑, 홍익, 정성, 내성(內聖), 정실, .... 등등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전공 외에 외부 다른 과목을 부러 수강하거나 도강(盜講)을 하곤 했는데,
그 중 어느 강의에서 소개받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요즘 간간히 떠올리곤 한다.
프로테스탄트의 금욕 윤리가 자본주의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가 지적하였듯이 자본주의의 미래는 철창에 갇힌 새처럼 우울한 것이기도 하다.
금욕이라고 하지만,
이게 도착되면 오히려 욕심으로 변질된다.
가령 돈 벌 욕심에 잠을 아끼고, 육신을 몰아 노동에 투신한다.
그게 일견 금욕인 양 싶지만,
어느 새 돈에 노예가 돼버리고 말았다면,
이를 금욕적이라 불러야 옳은가?
아니면 물욕적이다라고 불러야 옳은가?
예수는 아니 그런데,
왜, 숱한 문제를 일으키곤 하는 기독교도는 발로 말을 할까?
요즘 연예인 목사라고 널리 알려진 某목사의 동영상을 두 편 보았다.
미국으로 초청되어 설교를 하는 장면이다.
다 마치자 그는 마치 활극 한판 끝마치고 모자 벗어 돌리는 약장수처럼,
연보돈 걷으라고 교회 직원들을 심히 닦달하며 고성을 내지른다.
순간 장터에 판 벌린 약장사보다 더 자지러질듯한 희화(戱畫) 아니 비화(悲畫)가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아연 놀라고 만다.
목사를 보고 놀란 것이 아니라,
저 지경인 목사를 교회 안에 거두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도들을 보고 놀랐다.
저것은 금욕(禁慾)도 절욕(節慾)도 아닌 그저 욕(辱)됨이다.
금욕의 윤리가 그 자체로는 시비를 가릴 가치는 아니지만,
그것으로 무장되면 끝 간 데 없이 나아가지 않으면,
쓰러지고 말 것이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더욱이 부(富)를 일구는 것으로 신에게 입증하려든다면,
자신도 고단하지만,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폐가 되기도 한다.
저들은 또한 스스로 말하지 않던가?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저들은 대운하도 모자라,
이제는 지리산에도 케이블카를 설치하려고 눈이 싯뻘겋다.
통곡할 일이다.
오로지 발로만 말하려드는 사람들.
결코 저들은 손으로 말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지하벙커에 들어 회의를 하든,
꼭두새벽에 일어나 일을 하든,
이게 기독교인의 윤리인 금욕인가? 탐욕인가?
나는 저들을 차마 기독교도라 부를 수 없다.
정치라는 것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눈물을 훔치고, 보듬는 것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을 어찌 어진(仁) 것이라 할 수 있음인가?
항차, 가진 자를 더 살찌우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한낱 양아치처럼 제 패거리 도당만을 위한 패악질이라 할 터.
예수의 성전정화사건에서 보듯이 그는 불같이 발로써 분노하셨지만,
그는 팔로써 온세상을 안으셨던 분이다.
애오라지 발로 뛰는 것으로서 신에게 자신이 선택되었음을 입증하려니,
혹간 성과에도 불구하고 무리가 따르고 천하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아닐까?
내가 기억하기로는 유일한 기도교도인 예수,
그는 발이 아니라, 손으로 세상을 안았다.
그는 족장인(足掌人)이 아니라,
수장인(手掌人)임이랴.
척인(尺人).
지금은,
feet가 아닌 尺으로 세상에 말해야 한다.
그치려니,
언젠가 어디선가 읽었던 글이 생각났다.
용케 검색을 하니 찾아졌다.
덧붙여 둔다.
노을이 지는 바닷가에서 한 노인이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지나가던 신사가 그를 보고 말을 건넸다.
'아니, 할아버지,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낮잠을 자고 있다네. 아니 그럼 뭘 하고 있어야 하는 겐가'
'지금 바다에 가서 물고기를 많이 잡지 않으시고요'
'물고기는 이미 오전에 많이 잡았다네'
'그래도 또 많이 잡으면 좋지 않습니까'
'아니 그래서 뭘하려고'
'물고기를 많이 잡으면 돈을 많이 벌고,
그래서 돈을 많이 벌면, 더 큰 배를 사고,
더 큰 배를 사서 물고기를 더 많이 잡으면,
그 다음부터는 일을 하지 않고 쉴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네'
출처 : http://blog.daum.net/aromaria/3589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