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가죽부대에 든 똥 덩어리

소요유 : 2009. 5. 27. 00:07


나는 북한산 국립공원을 자주 찾는다.
내 집에서 북한산 입구까지는 아주 가깝다.
이리 이르기 위해서 나는 처음엔 대로를 이용했다.
하지만, 산 입구 주변에 즐비하게 형성되어 있는 음식점, 스포츠용품점 등 상점들이,
그들의 상품, 탁자 등을 밖으로 내놓아 인도를 거지반 다 점령해버렸기에,
나다니기가 대단히 성가시고 불편했다. 게다가 퍽이나 지저분하니 불결하기까지 하다.
멀쩡한 인도를 그들에게 빼앗겼기에 행인들은,
부득이 차로로 내려서 걷기도 한다.

나는 이를 피하려고 동네 뒷산 자드락길을 따라,
북한산 산기슭에 이르는 새로운 통로를 새로 개척하였다.
조금 더 돌아가지만 산기슭의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고,
조용하여 산책길로서는 아주 마땅하다.

하지만, 여기도 적지 아니 문제가 수시로 불거져 나온다.
주민들이 산에다 버린 온갖 쓰레기들, 유기견, 불법 텃밭의 보행로 잠식 등등 …….

이중에서 그 산기슭에 죽 연이어 터를 잡고 있는 사찰들에 대하여 얘기해 보고자 한다.

여기엔 某某사, sj사, bd사, kb사, br사 등 무려 5곳의 사찰이 
북한산 기슭에 턱을 바로 붙여 거의 연이어 위치하고 있다.
그 중 kb사 앞으로는 널찍한 공터가 전개되어 있다.
거기엔 십중팔구 그 사찰에서 버리거나 태운 쓰레기가 늘상 버려지곤 한다.
이들 사찰들은 쓰레기봉투를 사용하지 않는다.
필경은 쓰레기를 어디에선가 태워버리고들 있을 것이다.
(※ 참고 글 : ☞ 2009/05/18 - [소요유] - 종교 이제(二題))

수일 전 거기를 지나는데,
한가하니 포행(布行)을 하는 듯한 노스님 한 분을 우연히 뵈었다.
소로에서 마주친 그와 나는 말 거래를 하게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평소 느끼던 바, 언제 한번 접촉 커니 하였음이라,
쓰레기 무단 소각이나, 쓰레기봉투를 사용하지 않는 사찰들의 난행을 고하고,
그 분의 의견을 듣고자 하였다.

노승은 말한다.
당신은 미국에 살고 있고 이곳엔 수개월 머무를 뿐이라고 한다.
하기에, 그 문제엔 관심이 없다고 이르신다.
그는 이어 대수롭지 않게 말씀을 던진다.
시민들 역시 그냥 버리고들 있지 않는가,
또한 쓰레기를 수거한다한들 그냥 묻어 버리지 않는가?
그러하니 무엇이 문제인가 하며 반문한다.

사뭇 개탄스러운 정경이라,
나는 일순 심술이 솟아 짐짓 이런 취지의 말을 단숨에 쏜 살같이 부려놓았다.

내 불교의 가르침엔 이러한 것이 있다고 들었음이라,
즉, 별업(別業)이야 자신이 짓고 자신이 짊어지는 것인즉 관심이 있든 없든 뭐라 할 것이 없다하되,
공업(共業)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유마거사가 중생이 아프니 자신도 아프다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인가?
부처의 위까지 유보한 지장보살이란 또 무엇인가 말인가?
공업(共業)의 도리를 어리석은 중생에게 깨우치고, 이끄는 것이야말로,
출가자의 소임이 아니겠는가?
백장청규는 따르지 않는다한들,
출가 수행승으로서 어찌 숲을 소홀히 대할 수 있겠음인가?

그러자,
내게 법문을 하고자 함인가 이리 되물으신다.

나는 생각한다.
법문 하는 이가 어디 따로 있고, 듣는 이가 따로 있겠는가?
도도처처 법문을 이르지 않은 중생이 어디에 있을까마는,
다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이 병통일 뿐인 것을.

소슬하니 부는 바람 한 점,
그 바람에 팔랑거리는 나무 잎새인들 법문 아닌 것이 있으랴,
고은의 시어법(詩語法)대로,
숲이 내겐 경전이요,
냇물 소리가 내겐 기도 소리다.

그러자,
찰라간 숲길엔 축축하니 습기가 흐른다.
노스님이 납의(衲衣) 자락을 금강저(金剛杵)인 양 휘두르심인가?
척하니 젖히시더니 자르르 전격(電擊) 이르신다.

사람 몸속에 그림을 본다.
그것이 무엇인가?
짐작이 서지만 이리 의뭉 떨며 되묻자
사람 몸속에는 똥이 들어 있다 하심이다.

요것이 무엇을 이르고자 함인지,
내 어찌 모르겠는가?

불교 역사 2500년에 사람 몸에 똥이 들어 있음을 자각시킨 것이야말로
팔만장광설 법문 중 가장 으뜸이다.
거죽은 분단장으로 꾸미며 착한 척 하기 바쁜 중생이지만,
제 몸 안엔 가득 똥 덩어리를 품고 살고 있음이라.

이러하기에 자내증(自內證), 수행이 무엇보다 화급한 일이라 이르는 이가 있을 터.
하지만 잃은 소를 찾다(尋牛) 지쳐, 어느 명년에 입전수수(入廛垂手)에 나설 수 있으랴.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
이게 따로따로인가?
출세간 불문, 어리석은 중생이 보리(菩提)를 구한들,
박복한 하근기(下根機) 제 놈 명이 다하기 전에 행여라도 깨우침이 있을까나?

“도를 이루면 하화중생 하리라.”

요 따위 변설로 이를 뒤로 미룬다면,
이게 다 시줏쌀 훔쳐 먹는 밥버러지와 무엇이 다르랴.
만약 도를 성취하지 못하면,
그럼 저 놈은 마냥 부처님 밥을 공으로 먹다 하세(下世)할 작정인 게라.

그런즉,
저 위대한 가르침을 제대로 새기지 못하기에,
2500년이 흐르고 있지만 천하엔 요승(妖僧), 땡중이 적지 않은 것이라. 
이런 폐단을 고치기 전에는,
법석(法席)에 앉아 주장자 휘두르며 제 허물을 덮기에 급급하고,
바른 법문을 구부려 대중을 속이는 가승(假僧)의 출현은
앞으로 거푸 천년을 더 지나도 변화가 없으리라.

인도의 시인 까비르는 화장터에 거하며,
아침 이슬보다 더 영롱한 영성 가득한 시어를 빚어내었다.
타다 남은 사람 뼈다귀, 쓰레기 더미 속에서,
빛나는 옥구슬을 꿰어내셨음이다.

만약,
까비르가 여기 북한산 뒷동네 쓰레기 동산에 거하시면 어떠할까?
그는 여기에서도 마치 다비(茶毘) 후에 습골(拾骨)하듯,
시사리(詩舍利)를 열 말 닷 되 넘게 찾아내셨을까나?

그러하지만,
그대들은 혹여 아시는가?
까비르에게 아직 한참 미진한 구석이 무엇인가를.

그가 제 아무리 빛나는 시어(詩語)를 지어내었다한들,
그가 화장터에 남아 있는 한 그는 완전하지 않다.
그의 시가 진정으로 뛰어난 것이라면,
왜 하필 화장터에 머무를 것을 구속조건으로 하여야 한단 말인가?

그가 머무른 곳이 꽃밭이면 왜 아니 되어야 하며,
심청전의 뺑덕어미가 수다 떨던 우물가인들 어찌 아니 될 까닭이 있으리요.

그러하니,
까비르는 포수에게 쫓기는 노루새끼처럼 화장터를 빠져나와 바삐 도망갔어야 한다.
나는 그의 시가 화장터를 여의지 않는 한,
아직 완성되었다고 인정해 줄 수 없음이다.

그러함이니,
나는 저 노승의 똥물론도, 까비르의 화장터도,
그저 하회탈 같은 희학질, 농지거리처럼 보인다.
만약 똥물이 있다면, 그리고 화장터가 있어야 한다면,
거기 똥물을 댓 국자 퍼서 먹을 사람은 바로 화자(話者) 자신이어야 하며,
화장터에 의지하는 시인이라면,
어서 바삐 게서 물러나서 그 자리를 주인인 시체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 때라서야,
전단향(栴檀香)이 온 누리에 가득 퍼질 것이다.

나는 故노무현을 비판하던 사람들이,
하나 같이 눈물 뚝뚝 떨어뜨리며 말을 바꿔 그를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그를 연거푸 능욕하는 짓거리라고 생각한다.

마치 똥물은 제 놈 뱃구레에 더 많이 처넣고 있으면서,
남 보고 똥물론을 펴는 위선자와 뭣이 다르겠는가 말이다.

그의 죽음 앞에서 진정으로 그를 추도하려면,
평소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가일층 핏대 올려가며 그를 더 씹어대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처럼 절절히 노무현을 사랑하는 방식이 천하에 또 어디에 있음이란 말인가?

그럴 자신이 없다면,
지난번 그를 비난하던 자신의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그의 영전 앞에 고백하고,
설설 기며 용서를 구하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하지 않고 단 하룻 밤사이에 마음을 바꾸어,
창부(娼婦)처럼 국화 한 송이 바치며 아첨을 떨 듯,
노무현은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최대의 찬사를 바칠 수 있음인가 말이다.
가증스런 노릇이다.

저 눈물은 마치 점화식처럼 번져 나간다.
때론 장마철 막아논 봇물 터지듯 들을 내달려간다.
고인을 향해서인가?
정작은 자신을 위해서 8할을 할애하였음직한 저 감정의 범람.

때론 최면을 걸 듯, 한껏 취하여 자지러질 듯한 감상의 연못 속에 달콤하니 빠져든다.
그의 죽음을 빌어 스스로를 은근짜처럼 그리 미화하지 말아야 한다.
비겁하니 희화화하지 말지어다.

나는 그를 지지하였다 진작 실망하여 돌아선 사람이다.
지금도 그를 비판하던 나의 태도가 그의 죽음을 조건으로 바뀔 이유를
나는 아무 데에서도 새로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비수도 아니 되고,
기껏 비겁하니 초라한 방패를 치켜든 노승이었지만,
그의 법어를 벼락인 양 여겨 기꺼이 다시 새긴다.
내 몸뚱아리 가죽부대 속에 든 똥이 수 천 섬도 더 넘을 것이라는 것을.

어둠이 내리면 찾아오는 개밥바라기, 태백성(太白星) 맞이하며,
오늘 나는,
여기 숲속에서 큰창자를 꺼내 바위 위에 널어놓고,
내 손가락을 부젓가락 삼아, 부끄러이 한참을 헤집어 본다. 
마치 하늘에서 별똥별이 쏟아진듯,
똥이 수 천 섬씩 구린내를 풍기며 내 마음의 골짜기를 내닫듯 퍼져나간다.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참회진언이 물고기 뱃데기처럼 하얗게 뒤비져 어둠을 가르며,
계곡물 따라 깨진 구슬이 되어 구른다.

노무현의 죽음 그리고 그가 남긴 애증의 음영이,
내 가슴 속에 며칠 새 하루 수삼번씩 새벽 샛별처럼 아릿아릿 명멸한다.

죽음이란 산 넘어 들려오는 위대한 북소리.
적군의 내습을 알리는 창백한 봉홧불.
그가 남긴 죽음의 북소리가 둥둥 환청처럼 종일 들린다.

***

여기 시 두 수를 적어둔다.
다만 내 영혼에게 타이르듯 들려주기 위해.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그대의 들

강은교

`왜 나는 조그마한 일로 분개하는가'로 시작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밥알을 흘리곤
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핏방울 하나 하나
그대의 들에선
조심히 주워야 하네

파리처럼 죽는 자에게 영광이 있기를!
민들레처럼 시드는 자에게 평화있기를!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사랑에 가득 차서
그대의 들에 울려야 하네

`모래야 나는 얼마만큼 적으냐' 대신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라고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작으냐 작으냐,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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