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쓰레기

소요유 : 2008. 2. 14. 20:51


제가 다니는 등산로는 주 등산로를 비껴난 곳입니다.
인적은 드문 편이지만 정식으로 등산로가 닦여 있어,
한적한 곳을 찾는 이는 이리도 곧잘 다닙니다.

그런데, 이년전쯤부터 그 조용하던 골짜기가 갑자기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년중무휴로 일단의 사람들이 산 중턱을 차지하고 앉아 화투질에
영일이 없었었던 게지요.

지난 겨울 기준, 이게 딱 2년前 일입니다.
그 조용하던 골짜기에 벌떼처럼 나타난 이들은 계곡을 중심으로
좌우로 패를 갈라 판을 벌였습니다.
좌측 널따란 길목 공터에선 열댓명, 우측 바위 밑에서 댓명이
년중 무휴로 나타나 화투를 즐겼습니다.
조금 춥거나, 비가 많이 오는 날을 빼고는 개근하다시피 나타나더군요.

공휴일 같은 날, 친지끼리 모여서 화투치는 것이야 그려러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이리 작패를 하여 산중을 어지렵히는 것을 참아내는 것은
제게 몹시도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화투질만 가지고 무엇이라 지적하기도 딱히 막막하여 그저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산하고 난 자리 뒤끝을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형편이더군요.
먹던 음식 찌거기, 비닐류, 술병, 신문지, 담배꽁초 등이 너질러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남녀 군상들의 쌌네, 먹었네 하는 소리가 때 가리지 않고 골짜기를 좌르르 울려 퍼집니다.
특히 부녀자들의 목소리는 고음이기에 곁에선 나무 이파리까지 찢길까 걱정일 정도입니다.
이곳은 국립공원이라, 흡연은 물론 쓰레기 투기는 당연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 다음에 만난 그들에게 이를 주의 주었습니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떼거리로 달겨드는데 막감당이더군요.

원래 점잖은 사람은 그런 짓을 하지도 않지만,
설혹 어쩌다 그런 짓을 하였어도, 주위의 지적을 받으면,
이내 사과를 하며 그칩니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인간무리들은 지적하면,
도리어 큰 소리를 치는 게 상례입니다.
때문에 이들에게 접근할 때는 조심하여야 합니다.
잘못하면 되물립니다.

이들이 어느 정도로 한심한 인간 군상들이냐 하면,
매일같이 그곳에 모여 화투질을 하면서도,
지난 번에 자신들이 버리고 간 그 쓰레기들 틈에서 그 짓을 태연히 또 벌이는 것이지요.
계곡 쪽으로는 이미 그들이 버린 쓰레기 잔해들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곳 계곡은 틈틈이 내려가 쓰레기를 주어오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년년세세 주어도 그곳은 여전히 쓰레기가 쌓입니다.
심지어는 진공청소기 잔해도 나오고, 찢어진 빤쓰, 운동화 등
도저히 등산객이 가지고 올 것이 아닌 것도 버려져 있습니다.

화투질은 참아낸다 하여도, 저는 쓰레기 버리는 것은 용서가 아니 됩니다.
그래서 도리없이 공원 당국에 신고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단속나온 공원 직원들에게도 우 몰려 대듭니다.
그래도 어찌 어찌 작파하고 내려는 갑니다.

이리 겪기를 2년 동안 하였습니다.
그래도 전혀 개선이 아니 되더군요.

금년 1월 말경,
위에서 지적한 두 곳에 쓰레기는 여전히 쌓여가고,
그들은 햋빛이 좋은 날, 비닐 장막을 쳐 어한을 하고는
화투질에 더하여  골짜기가 떠내려가도록 떠들어댑니다.
이젠 방법이 없다 싶어 직접 공원 이사장을 상대로 고정을 합니다.

그러자, 갑자기 공원 직원들의 움직임이 부산합니다.
온 산을 뒤지며 생전 처음으로 쓰레기를 주어대며,
난리를 쳐대더군요.

그즈음, 그 곳 중간 책임자한테 전화가 옵니다.
면담을 요청하며 뵙기를 청합니다.
그래 공원 안에서 그를 만납니다.

그와 나눈 얘기를 들어보시겠습니까 ?

“어째 그 골짜기는 쓰레기가 그리 많은가 ?” 저의 물음에,
이제껏 그 등산로는 한번도 쓰레기 치우는 요원이 배치되지 않았다고 답합니다.
맙소사. 명색이 엄연한 등산로인데, 그동안 쓰레기들이 얼마나 썩어났겠습니까 ?
그는 말하길 이제부터는 고정적으로 청소를 하고,
화투치는 이들을 단속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럼 그동안의 2년 동안의 신고는 어찌된 것이냐 하였더니,
직원들이 빈번히 바뀌었기에 그리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2년 동안 그들 화투쟁이들에 대한 신원이 역사적으로 기록 관리되었는가 물었더니,
그도 아니 되어 있습니다.
하니, 신고할 때마다 늘 새로운 일이었고,
때마다 그저 말로 적당히 실갱이질 하다가 그만인 상태로 2년이 흐른 것입니다.

이사장에게 직접 고정하고 나서는,
문제의 그곳 주변을 직원들이 수일간 훑고 다니며 쓰레기 자루를 매고 내려오더군요.
저 쓰레기가 구석구석 수년씩 썩어나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이제 제 가슴이 다 시원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 화투쟁이들은 사라졌습니다.
쓰레기도 한곳에 모아두면 청소요원들이 정기적으로 쳐가더군요.
원래 산에 쓰레기를 모아둔다는 것 자체가 역겨운 짓입니다.

그러나, 약수터 주변엔 늘 쓰레기가 버려져 있습니다.
매일 가지고 내려오는 것도 벅찬 일일뿐더러,
얼마전부터는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더니만,
쓰레기통 자체가 전부 철거되었습니다.
그러니, 모아 가지고 내려와도 집으로 가져오기전에는 처리할 방도가 없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약수터에도 3년동안 문제의 악당이 하나 있습니다.
고려은단에서 나온 캡슐 제재 따위인데,
그 껍질 수개를 약수물이 똑똑 떨어지는 바로 그 밑에 버리거나, 그 주변 물가에 그냥 버립니다.
이것을 제가 장장 3년 꼬박 치우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작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처음에는 아로나민 골드쯤으로 보이던데,
언젠가부터는 고려은단에서 나온 피로회복제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 작자 살림이 점점 궁색해지는가 싶기도 합니다.
자신은 오래 살겠다고 약 먹어가며 잘 챙기면서,
매일 떠가는 약수물은 저리 더럽히고 있으니,
도대체 이자의 마음보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

저는 이들의 양식 유무를 탓하기 전에,
이들은 그저 본능에 충실한 이들로 치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ooo님 말씀대로 “자신이 버리지 않아도 결국은 황폐화할 것이라는 체념” 때문에
자신 역시 버리는 것에 동참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래도 이런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이성이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제가 관찰한 바로는 쓰레기를 버리는 이들 대부분은
이성은 한줌도 남아 있지 않은 본능족(本能族)인 겝니다.

큰 쓰레기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쓰레기가 더 문제입니다.
큰 것은 언젠가는 치워지지만, 작은 것은 이내 파묻힙니다.
특히 걸음마다 점점히 떨어뜨린 사탕껍질은 적지 아니 흉합니다.
또한 썩는 것은 덜한데, 썩지 않는 비닐류를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김열규라는 국문학 교수가 남해쪽으로 낙향하여,
버려지는 쓰레기를 보면 살이 떨린다고 하였습니다만,
저는 분노가 솟구칩니다.

가끔은 숲을 즐기려 부러 멀리 산을 감아 돌아 내려옵니다.
다 내려서면 산 기슭에 집 한 채가 있습니다.
이 집 주인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폐지나, 고물을 거두어 생계를 꾸려 가고 있습니다.
처음엔 한참 일하시는데, 폐가 될까 그저 묵묵히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강아지들이 두어 마리 마당가에 묶여 있는 게 목격되더군요.
형편이 편치 않게 보여, 오가며 먹을 것을 멀리서 던져 주곤 하였습니다.
그러다 주인과 마주칩니다.
이 때 비로서 그 분과 대화를 트게 됩니다.
말씀인즉, 다니는 교회의 교인들이 버리려는 강아지들을 받아들여 키우고 있다고 하시더군요.
전 감격하여, 한껏 치사하고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까지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게, 있던 강아지들이 없어지면서,
조금 있다가 다시 다른 강아지로 바뀌어져 있는 것입니다.
사정인즉, 교인들이 키우다 처치 곤란하면, 이 분이 맡아준다는 구실로 데려와서는
얼마 지나서 처분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느 날,
그 분 집 앞을 거쳐 산에 올랐습니다.
그리로 올라가면, 저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 조그만한 약수터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
그곳은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아 아주 극소수 그쪽 동네 아는 사람들만 이용하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쓰레기가 약수터 주변에 너질러져 있더군요.
그래 주섬주섬 주었습니다만, 줏다 보니 어느새 한쪽 편에 버려진 커다란 통에 가득 차버립니다.

그날 산에서 잔뜩 쓰레기를 주어 내려오다 그 분을 만났습니다.
사정을 이제 알았기에, 그분에게 이리 말씀드렸습니다.
“강아지를 데려다가 결국은 처분할 양이면, 교인들로부터 왜 받아 오시는지요 ?”
그 분 말씀이
“인간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맡을 수밖에 없다.”
“어차피 아저씨께서 강아지를 끝까지 키울 형편이 아니시라면,
거절하여 그분들이 다른 방도를 찾게 하는 게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

주저주저 하시다가, 제가 주어온 쓰레기를 흘낏 보더니만,
“산에 버려져 있든, 가지고 내려오든 결국 장소 이동에 불과한 것을
무엇 그리 애쓰느냐 ?”

하기사, 그가 다닌다는 교회의 교인들이 내다 버리든,
그가 처분하든 강아지들의 운명이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

제가 산에서 쓰레기를 주어 내려오든,
그곳 산에 남아 있든 쓰레기는 이 지구상에 있는 것.
무엇이 차이가 있을런가 ?

그 분이나 저나 모두 참으로 맥 빠지는 자맥질을 계속하고 있음이 아닐런가 ?

수십년전 어느 신문에서 읽은 것인데,
당시 대만 청소부 옷에는 “당신은 버리고, 나는 줍는다”란 글이 적혀 있었다는군요.
참으로 유장(悠長)한 사고방식이 아니겠습니까 ?
허나, 저 고물 할아버지의
“산에 버려져 있든, 가지고 내려오든 결국 장소 이동에 불과한 것을
무엇 그리 애쓰느냐 ?” 에 비하면,
얼마나 답답하니 조급한 마음보이겠습니까 ?

저희는 요즘 새벽마다 절로 잠이 깹니다.
그 분 마당가에 늘 바뀌어 들어온 강아지들이 낯 선 곳에서의 외로움 때문인지,
서럽고 슬픈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릅니다.
슬픔속에 잠긴 恨이 하늘가로 산발(散髮)처럼 퍼져나갑니다.
새벽녘, 그들의 허공중을 향해 꺼억꺼억 울부짖는 소리 속에 아침이 열립니다.
그들은 컹컹 짖는게 아니라, 목을 들어올려 한 맺힌 소리를 고통스럽게 길게 뽑아냅니다.
그 슬픔 가운데에서도 새벽 빛은 물기운에 젖어 촉촉합니다.
거기, 제 창문 밖 마당이 보이는 사찰, 새벽 예불 목탁소리라도 겹쳐지면,
더는 이부자리에 누워 있기 죄스럽습니다.

강아지를 키우지 맙시다.
그들의 일생 15-20년을 마지막까지 책임질 각오가 아니라면 절대 강아지 키우지 맙시다.

쓰레기를 만들지 맙시다.
산에다 버리고 올 형편이라면, 아예 산에는 쓰레기 될 것을 가지고 가지 맙시다.

강아지를 버리지 말자고,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고 호소하는 게 아닙니다.

강아지를 키우지 말고,
쓰레기를 만들지 말자고,
저희 동네, 새벽 그 강아지들처럼 저는 슬픈 분노를 이리 내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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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08. 2. 14. 20: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