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검(洗劍)과 만두(饅頭)
묵은 글이다.
오늘 아침 문득 검(劍)을 떠올리다.
지난 이야기를 되돌아보다.
***
세검(洗劍)과 만두(饅頭)
세검(洗劍)
칼은 곧은 날카로움으로 무엇인가를 베어낸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세검은 자의로 보면 그 칼을 씻는다란 뜻이겠다.
그래, 그럼,
칼을 왜 씻는가 ?
피가 묻었기 때문인가 ?
그럼 피는 왜 묻는가 ?
혹은 피를 왜 칼에 묻히는가 ?
파사현정(破邪顯正)
삿됨을 깨뜨리고 바름을 드러내 세운다.
과연 그런가 ?
칼로서 파사현정을 구(求)하였다면,
세검이란
곧 삿됨을 베고난이후이니 그 구하는 바 뜻을 얻었다고 보아야 할 노릇이고,
이제 천하는 제 자리를 찾아 화평할 것이다.
바름은 하늘에 조순(調順)하고 땅의 덕을 따라 봄풀처럼 제풀로 자랄 터.
더 무엇을 구하리.
그러하다면, 굳이 검을 다시 씻을 필요가 있을까 ?
삿됨이 없어졌으니, 어찌 다시 검이 필요할까나 ?
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면,
피 묻은 검은 그냥 버려 두어 족하다.
허니, 다시 씻음은 무엇인가 ?
이리 물어보아야 한다.
언젠가 다시 다가올 삿됨을 위해 예비하고자 함인가 ?
그러하다면, 칼은 아직 그 검덕(劍德)을 충분히 편 것이 아닐 터.
이는 칼을 욕 뵈이는 게 아닌가 ?
칼로서 파사현정을 구하였다면,
칼을 빌은 것은 사람인즉,
세검코, 용검(用劍)이후를 염려함은 곧 칼잡이(刀手,劍客)의 부덕(不德)인 것.
그러하니 정작은 칼잡이를 탓하여야 하지 않을까 ?
여기서 잠깐
제갈공명의 만두(饅頭)가 상기되는 바이다.
유비가 죽자, 제갈공명은 중원을 도모할 형편은 아닌즉, 우선 국내를 안정시키는데 주력한다.
어느 정도 국내 사정이 정돈되자, 후방을 단속하려, 남만을 평정하러 나선다.
칠종칠금(七縱七擒) 고사의 주인공 남만왕 맹획을 제압한 후,
촉나라로 귀국하려고 노수라는 강가에 이르렀다.
홀연 일진광풍이 불어 사람은 물론 수레까지 날려 버린다.
주위에 물은즉, 노수에 원귀가 가득하니 49명의 사람 머리로 제를 지내면 무사하리라 한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인명을 아껴, 사람 머리 대신 만두를 만들어 제를 지내,
노수의 노여움을 달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누군가 또 나타나, 예전 bongta의 “팔진도...” 글에서처럼 뻥이여 이리 외칠 위인이 있을런가 ?
삼국지를 읽으며, 뻥을 석갈라내며 대할 것이라면, 차라리 빵 먹으면서 만화책을 읽는게 남는 장사다.
일언이폐지하고 다음을 이어가자.
앞에서 “칼 씻음”을 얘기하였다.
전쟁은 흉한 일.
그 전쟁은 칼로 치룬다.
그러하니, 중인은 “칼은 상(祥)스럽지 못한 것”, 이런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bongta는 칼이라는 이름자 앞에서 영혼 밑바닥까지 전율한다.
월하(月下)의 검광(劍光) 그 서늘한 엄정함.
한치도 그름을 용납하지 않는 추상같은 서슬.
그 서슬로 남을 베고 싶다.
그 앞에 나의 목이 두릅처럼 똑 따히고 싶다.
마고할멈인지 제천대성 원숭이인지 하는 분은
기껏 발검(拔劍)코 제 목 무사히 건짐을
다행으로 알아 이내 칼집으로 제 검을 불러들이었다.
그는 칼잡이가 아니다.
고샅길 뛰어놀던 코흘리게 손에 들린 목검, 생철칼일지라도 검은 검인 것.
이리 홀대할 수 있을런가 ?
그는 검을 모독했다.
그는 이젠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리라.
제 목을 더듬으며 밤잠을 겨워하기 바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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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검(運劒)엔 정작은 살인(殺人)이 아니라 살아(殺我,被殺)의 꿈이 있다.
(* 殺人에서 人은 중국어의 쓰임이듯이 他로 새기면 범위가 한정이 되니 의미가 보다 명확해진다.
살아(殺我)는 주어를 나로 보면 내가 나를 죽임이니, 곧 자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어를 他로 두어 남이 나를 죽임으로 두어두자.
뭐 경우에 따라서는 양자 다라 하여도 아래 글 의미에 비추어 상통할만 하다.
)
내 칼바람에 남을 벰은 내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
칼 벼려 기껏 모기 베자고 길을 떠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칼로 용을 버혀야 한다.
칼은 갈구한다.
돌에 자신을 벼리어 갈며, 자신보다 더 강한 칼을 사모한다.
이게 칼의 본디 성품이다.
그러하지 않다면,
그것은 칼이 아니라,
한낱 쇳덩이에 불과하다.
그러하니, 칼잡이는 살인(殺人)이 아니라 살아(殺我)를 꿈꾸어야 한다.
내가 죽음으로서 칼은 비로서 자신보다 강한 칼을 맞이한다.
이게 진정 자신의 애검(愛劍)을 대하는 예(禮)이다.
살아(殺我)를 꿈꾸되, 영원을 살아야 한다.
영원을 살아, 칼의 본성을 영원이 다 할 때까지 예로서 지켜주는 것.
난 이를 검도(劍道)라 부른다.
난 살아(殺我)를 위해 살인(殺人)을 한다.
살인(殺人)으로서, 다가올 살아(殺我)를 禮로서 기다린다.
마지막 시간.
세검(洗劍)할 바없이 칼 한자루가 올올(兀兀) 월하(月下)에 빛난다.
이 얼마나 멋진가.
이러하니, 살인(殺人)은 살아(殺我)의 자식이요.
살아(殺我)는 살인(殺人)의 어미다.
어미, 자식이 한 핏줄이니 어찌 상피(相避)의 번거로움을 꺼릴까.
그러즉, bongta는 살인(殺人), 살아(殺我)를 가려(別) 나누지(分) 않는다.
하니 이 둘을 뭉뚱거린즉, 살인(殺人)이라, 그 한 마디로 족하다.
이 얼마나 절절히 은혜로운 세상인가 ?
이런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모든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
그래, 난 얼마전 여기서 더럽힌 내 칼의 피,
살아(殺我)는 커녕 살인(殺人)을 의욕함도 없이
부나방처럼 내 칼에 달겨들어 스스로의 목을 버힌 그 흔적 그 피들을 지푸라기로 닦아내며,
번뇌 덜듯, 털어낸다.
난 이제껏, 내 칼에 묻은 피를 꽃잎으로 닦아왔다.
무릎 꿇고 제주(祭酒) 괴여 삼례(三禮)로 대하였다.
이리 그를 祭에 모시는 사연인즉, 기실은
곧 내게 받쳐질 제물(祭物)을 미리 앞당겨 흠향(歆饗)함이니,
이는 곧 만상(萬象)을 흠감(歆感)함과 다름이 없다.
이 또한 얼마나 고와 아름다운가 말이다.
제갈씨는 빚은 만두로 원귀를 속여 계집처럼 수줍거니 도강(渡江)하나,
bongta라면 나의 칼로 기어히 피를 불렀으리라.
노수귀(瀘水鬼)를 버혀,
내 칼을 향한 예(禮)를 다하고,
살아(殺我)의 꿈을 다시 지피워내었으리.
칼은 사람만을 원하지 않는다.
귀신도 버혀야 한다.
내가 야반삼경 산에 오르는 이유는 마도(磨刀,磨劍)코자 함이니.
아직 그들은 무사하다.
여기 oo방에 떨구어진 그 만두들.
그 한 때, 욕지기를 유발하였던 가여운 모가지들.
남겨두어, 노수귀(瀘水鬼)의 배를 구휼(救恤)할코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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