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개골창의 연등

소요유 : 2011.03.08 23:04


우리 동네엔 사찰이 깨알같이 많이 있다.
게다가 개신교 기도원도 있고, 수련원도 들어와 있다.
그 뿐인가 저쪽 산기슭엔 은퇴한 외국신부가 사시기도 한다.

과히 십승지지(十勝之地)를 방불하고 있다 하겠다.
혹여 난(亂)이라도 일어나면,
이곳은,
기돗발 세겠다.
염불소리 크겠다.
기(氣)가 성하니 피처(避處)로는 최적이 아닐까 싶다.
마호멧교만 마저 들어오면 난공불락 요새가 되고도 남으리라.

내가 여름철 내내 시골에 가 있으니 미처 챙기질 못하였으나,
작년부터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음이니,
오늘은 기왕 이리 쓰레기 이야기를 꺼냈은즉 마저 꺼내어,
천창(天窓) 열고 세상에 고한다.

북한산으로 오르는 자락엔 이름도 아름다운 **정사(精舍)라는 조그마한 사찰이 있다.
현판을 보아하니 조계종단 소속인 것 같다.
하기사 뭐 브랜드만의 구색을 갖춘 사찰도 있는 양 싶으니,
이 또한 뭣이 대수랴.
승속(僧俗)이 모두 짝 맞춰 영악하게 돌아들 가는 세상임이니.

실제 인근 사찰 주지 하나는 내게 고했다.
자신은 모종단에 일 년에 얼마씩 내고 브랜드를 샀다고,
내가 보기에도 그는 불학(佛學)이 천(淺)하고, 불심(佛心)이 박(薄)하여 그 자리가 썩 어울리지 않았다.
출세간 절집에서도 사정이 이러한데 하물며 세간집 풍속은 묻지 않아도 뻔하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장사꾼에서 농업인으로 번신(翻身)하자마자,
바로 유명 일간지에서 타이틀을 샀다.
'OO XXX 대상'이란 타이틀을 구매했는데,
뭣 모르는 일반인들은 이게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제법 그럴 듯한 임자로 여기게 된다.
그는 밭을 조성하자마자 과일을 제대로 따기도 전인 한 두해 만에 바로 이 타이틀을 구매했는데,
내가 그 심사평을 읽어 보자니 이게 맞춤법도 엉망인 것이,
짐작컨대 붕어빵 식으로 틀에 찍어 낸 문구라,
돈 받고 그저 좋은 말로 닦아 치켜세울 뿐이었다.
농사라는 것이 무릇 한 두해 만에 물리(物理)를 틀 수 있을 정도로 한가한 것임인가?
그러함에도 한 두해 만에 농업 대가가 되고, 달인으로 변신(變身)한다.

이 자를 본받았음인가?
이 집을 들락거리던 이 하나는 다른 언론사를 통해 ‘XX OOO 대상’이란 타이틀을 구매했다.
이게 건당 기백만 원 내외 하는 모양인데,
저들 언론사들은 외양 사회 정의를 외치고 부정부패를 나무라길 불 같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이 내막을 우연히 알고나자, 저 언론사들이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음이라.
하나 고작 한다는 것이 브라우저의 즐겨찾기에서 저들을 지우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었음이라.
참으로 추접스런 세상이다.

명색이 상(賞)인데, 그에 값하는 실적, 공(功)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다만 있다면 그 수여 단체에게 돈을 지불한 것 외에 뚜렷한 평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 개설한지 얼마되지도 않는 일반 농원에 무슨 상줄 만한 뛰어난 장처(長處)가 있겠는가?
우리가 흔히 보는 체인점이라든가, OEM제조 따위의 영업/기술 방식은
기술 지원이라든가, 책임의 부담이라는 대명(貸名,代名)에 따른 일정 담보가 장치되어 있다.
하지만 언론사에서 자행하고 있는 ‘ΔΔΔ 대상’ 따위의 짓거리는,
아주 고약한 매명(賣名)행위로서 건전한 사회적 신뢰 기반을 허무는 악질적인 작태인 것이다.

다시 고삐를 바로 채어 잡고 잇는다.
저 절집에서 지난 해 사월 초파일에,
동네 어귀 길가에 내단 종이 연등이,
여름 장마를 건너고, 모진 북풍한설을 맞고도 모자라,
재우쳐 또 한 번의 초파일을 맞을 참이다.

과시 우리 동네는 복 받은 곳이다.
사시장철 철 가리지 않고 연등이 불을 밝히우시고 계시니,
불덕(佛德)이 넘치고,
지혜가 모자람이 없을 터.

연등을 보면,
이내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을 떠올리게 된다.
이 말씀의 출처를 따라가 본다.

『 佛說長阿含經卷第二 』

是故,
阿難!當自熾燃,熾燃於法,勿他熾燃;當自歸依,歸依於法,勿他歸依。
云何自熾燃,熾燃於法,勿他熾燃;當自歸依,歸依於法,勿他歸依?

阿難!比丘觀內身精勤無懈,
憶念不忘,除世貪憂;觀外身、觀內外身,
精勤不懈,憶念不忘,除世貪憂。受、意、法觀,
亦復如是。是謂,阿難!自熾燃,熾燃於法,
勿他熾燃;當自歸依,歸依於法,勿他歸依。
佛告阿難:「吾滅度後,能有修行此法者,
則為真我弟子第一學者。」

그런고로,
아난이여!
마땅히 자기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할 뿐, 다른 것을 등불로 하지 말아야 하느니.
마땅히 자기 스스로에게 의지하고, 법에 귀의할 뿐, 남에게 의지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이르길 그럼 어찌,
자기를 등불로 하고, 법을 등불로 하며, 다른 것을 등불로 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마땅히 스스로에게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것인가?

아난이여, 비구는 몸 안을 관(觀)함에 부지런히 힘써,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며,
단단히 챙겨,  잊지 않으며, 세간의 욕망과 근심을 없앤다.
몸 밖과 몸 안팎을 관(觀)함에 부지런히 힘써,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며,
단단히 챙겨, 잊지 않으며, 세간의 욕망과 근심을 없앤다.

受、意、法을 관(觀)함도 역시 이와 같으니,
아난이여,
또한 이와 같으니 이것을 이른바,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며 그 외 다른 것을 등불로 삼지 않는 것이요.
마땅히 자기에게 의지하며, 법에 의지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신다.
「내가 열반에 든 뒤에 능히 이법을 수행하는 자는 곧 진실된 나의 제자이며,
제일 으뜸가는 배움에 (힘쓰는) 자가 되리라.」

(※ 自熾燃,熾燃於法
     熾燃於法을 法熾燃이라 하지 않은 것은,
     自와 다르게 法은 熾燃의 외적 객체가 되기 때문이다.
     즉 自의 경우는 자기자신의 身, 受, 意를 觀하는 것이지만,
     法은 자신 바깥의 존재를 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사 法에 내외가 따로 있겠음이나, 글을 짓자니 이리 구별하였으리.)

(※ 독각(獨覺)도 되지 못하는 자의 갈짓자 번역인즉,
     그저 참고만 하시고 바른 뜻은 다른 이의 올바른 역을 찾아 새로 세우시기 바람.)

***

흔히 알려진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란 말은 기실 경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自熾燃,熾燃於法’ 이런 말만 있을 뿐이다.
熾燃이란 불꽃이 치열하게 타오르는 모습을 뜻한다.
우리가 초파일 연등을 보면 마음이 온화해지며 절로 경건해진다.
하지만 熾燃이란 말은 사뭇 격렬하여 역동적이다.
마음을 온화하니 가지는 것도 좋지만,
역시나 공부(工夫)란 불같이 치열하게 하여야 하는 것임인가?
자기에게, 법을 구함에,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하는 마음의 각오가 없다면 뜻을 이루기 어렵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도 좋지만,
‘자치연(自熾燃),치연어법(熾燃於法)’이란 말은,
수행을 자연스레 강조하여 실천적인 노력을 일깨우고 있어 더욱 좋다.

그러함인데,
저 관음이 사시는 닷,
좇아 새긴 이름조차 거룩한 사찰은 어이하여 연등을 해를 넘겨가며,
개골창에 처박고도 저리 무심할 수 있음인가?

내가 재작년까지만 하여도,
저 윗 동네까지 저리 쓰레기를 버리는 이웃을 경계하고,
이도 아니 되면 당국에 신고라도 불사하며 저 개울을 깨끗이 지켜내었다.
하지만 내가 손을 떼자 이내 저리 만신창이 되고 있음이다.
앞 글(☞ 2011/03/08 - [소요유] - 무식한 것은 죄다.)에서,
어느 무식한 작자는 입만 살아 아주 근사하니 그럴 듯하게 둥글게 살자고 하였다.
저 모습을 보고도 둥글게 살자는 것은 얼마나 비루한가?
그저 혼 내놓고, 넋 잃고 비몽사몽 다만 제 사리사욕만 차리고 살면 그 뿐이라는,
천박한 마음보의 실상이 아니겠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사찰 측에서 내다놓은 쓰레기. 저 더미 우측편에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저 쓰레기더미를 지나 사찰에 들르실 부처님께서는 마지(摩旨) 공양인들 편히 드실려나?)

그래, 두어라!
흑암(黑暗) 개울까지 치성(熾盛)한 등불의 광명으로 밝히시우려는 심려원모(深慮遠謀)를
천하에 암둔(闇鈍)한 속인(俗人)인 내가 어이 알랴.

그 사찰엔 속인이 들어 살림을 하는 양 싶기도 하고,
언젠가는 점치는 광고를 붙이기도 하였더니만 어느 날부터는 슬그머니 치워져버렸다.
가끔씩 거기서 흘러나오는 뜸향이 골목을 뽀얗게 채우기도 한다.
나는 사람 살림살이라는 것이 승이든 속이든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기에 남들이 어찌 생각하든 나로서는 이게 그리 괴이쩍이 해망(駭妄)스럽게 보이질 않는다.
나는 주지가 계집사람을 들여 살림을 차린다한들 그게 그리 큰 허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한들 청정 비구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처승도 있음이니, 청정 비구, 따로 다 제 갈길이 따로 있음이 아니겠는가 싶은 게다.
실제 여기 우리 동네엔 법화종 주지 스님도 계신데,
살림을 차리시고 있음에도 내가 보기엔 이 일대에선 제일 법덕(法德)이 수승(殊勝)하고,
불학(佛學)이 깊어, 걸음걸이 따라 법향(法香)이 새벽 안개처럼 동네 골목 골목을 절로 적시우신다.

하지만,
혹여 저 사찰의 심려원모를 내가 미처 모를지라도,
연등이 개골창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것을 보며,
마음이 불편한 경지를 나는 아직까지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참 아둔함의 소치일지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

관음주력(觀音呪力)인가?

나뒹구는 연등을 스친 물결소리가 연신 들린다.
저 물결은 조만간 흘러 흘러 도심의 썩은 물과 합쳐지리라.
하지만, 아마도 연등의 밝은 빛 세례를 받아, 주은 복덕이 적지 않으리니,
대해(大海)까지 이르는 동안 내내 평안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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