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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종(慈悲種), 자비종(慈悲鐘)

소요유 : 2011.02.15 23:55


세상엔 두 부류가 있다.

식육자(食肉者)

  고기를 먹는 자.

소식자(素食者)

  채식을 하는 자.

(※ 참고 글 : ☞ 2010/12/05 - [소요유] - 피보나치 수열과 토끼)

오늘 동영상 한 편을 보았다.
(http://www.withanimal.net/tt-cgi/tt/site/ttboard.cgi?act=read&db=w04&page=1&idx=28900)


 (한글 자막)


 (영어)

오늘날 우유를 마시고, 육고기를 먹는 일은,
저 끔찍한 짓을 부조(扶助)하는 일임을 자각하여야 한다.

『入楞伽經』
若食肉者,當知即是衆生大怨,斷我聖種。

식육을 먹는 자는,
마땅히 알지니, 중생들의 크나큰 원망을 사게 되느니라.
부처의 성스러운 씨앗을 끊는 일이 될지니.

여기서 聖種은 부처되는 씨앗, 불성(佛性)으로 보아도 되지만,
慈悲種, 즉 자비의 선한 마음씨라 하여도 가하다.
부처가 뭐 멀리 별도로 존재하는 것인가?
착한 마음씨만 잘 지피어 올려도 이내 그 자리에서 생불(生佛) 하나가 나투게 되는 것.

구제역, 조류독감, 광우병 따위는 내 누차 강조하지만 진실로 인간이 만드는 것.
평생 좁은 케이지, 우리에 가두어놓고,
온갖 항생제, 성장호르몬으로 뻥 튀기듯 부풀리고, 단기간에 고혈을 쥐어짜내니,
저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절고, 분노에 싸이고,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겠는가?
건강은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있을 터.
병이 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그대가 한 점(一點)의 고기를 구입한다든가, 먹는 것은,
이내, 그대가 이 잔혹무비한 도살업(屠殺業)에 1 푼(一分)만큼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한 치(一寸)도 빗겨나 있지 않다는 것을.

諸餘罪中,殺業最重

모든 죄 중에서,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이 제일 중하다.

오늘 날,
이 천박하기 짝이 없는 한국 땅에서 벌어지는
구제역 살업(殺業)이란 이 중대(重大)한 죄업은 반드시 엄중한 그 후과(後果)를 불러 올 것이다.

작금에 무참히 죽임을 당한,
580만(닭,오리), 330만(소,돼지)이  넘는 원령(怨靈)들이 저승에서 울부짖을 때,
이 땅에,
어찌 지진이 일어나지 않을 테며,
모진 태풍이 불지 않을 것이며,
해일이 몰려오지 않으리.

天災人禍

하늘이 내리는 재앙,
사람에게 화가 미치지 않을 까닭이 없는 법.

이 죄업을 씻는 일은,
이제부터라도,
육식을 절제하고, 삼가고,
자비종(慈悲種),
즉 자비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그런데,
자비는 참회(懺悔)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임이니,
마음 속으로부터 깊히 속죄하여야 할 사.
그리고 행으로 입증하여야 한다.
저 동영상을 보는 이들은 모두 마음 속에 종(鐘) 하나를 모셔 두어야 한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소슬하니 부는 바람 한 자락을 맞이하게 될 때,
마음에 모셔둔 종 소리를 들을지니.

자비종(慈悲種)
자비종(慈悲鐘)

자비의 씨앗,
자비의 쇠북 종 소리.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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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은유시인 2011.02.21 20:49 PERM. MOD/DEL REPLY

    천국은 없더라도 지옥만큼은 인간들을 위해 꼭 있었으면 합니다.
    저런 짓늘 저지르고도 자신의 몸뚱이와 자식의 몸뚱이는 되게 생각하겠지요?
    자신은 몸이 조금만 아파도 "아프다"며 쌩 지랄이나 깔테고...

  2. 사용자 bongta 2011.02.22 10:02 신고 PERM. MOD/DEL REPLY

    불교에서는 食肉을 食子라 가르치기도 합니다.
    즉 고기를 먹는 것은 제 자식을 먹는 것과 매한가지다란 생각이지요.
    이와 관련되어 아주 극명하니 이런 사상을 밝힌 글 하나를 적어봅니다.

    佛告迦葉。食肉者不覺不知不聞不見當食肉。
    或君食臣肉。或臣食君肉。或子食父肉。
    或父食子肉。或弟食兄肉。或兄食弟肉。或妹食姊肉。
    或姊食妹肉。或妻食夫肉。或夫食妻肉。
    佛告迦葉。食肉之人即食父母眷屬肉。
    迦葉菩薩白佛言。世尊食肉者墮何處地獄。佛告迦葉。
    食肉者墮糞穢地獄。縱廣正等八萬由旬。
    其中有糞乃深萬丈。
    (大方廣華嚴十惡品經)

    부처가 가섭에게 이르길,
    고기를 먹는 사람은 그게 바로 이런 고기를 먹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이니라.
    즉, 임금이 신하의 살을 먹고, 신하가 임금의 살을 먹고,
    자식이 아비의 살을 먹고, 아비가 자식의 살을 먹고,
    아우가 형의 살을 먹고, 형이 아우의 살을 먹고,
    .......
    가섭이 부처에게 여쭙기를 고기를 먹는 자는 어떤 지옥에 떨어지는지요?
    부처가 말씀하신다.
    고기를 먹는 자는 똥지옥에 떨어지느니라.
    깊이가 팔만 유순이나 되고,
    그 가운데 똥이 만장이나 깊이 채워져 있느니.
    (由旬:하룻 행보 거리에 해당.)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소, 돼지, 닭, 오리’ 등속을,
    대부분은 산 채로 생매장하였지 않습니까?
    전국 방방곡곡에 파진 이들 구덩이의 깊이를 합하면 바로 팔만 유순일 터이고,
    거기 저들의 ‘피, 살, 똥’이 만장이나 채워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지옥은 어디메입니까?
    바로 지금, 여기가
    정녕(丁寧) 지옥이 아닙니까?

    당금(當今),
    지옥에 갇혀 있는,
    이 천박하기 짝이 없는 ‘말로만 국격 높은’ 한국.
    그런데, 그 지옥은 자신들 손으로 스스로 지은 것이니,
    참으로 극악무비하며, 한편으론 한없이 탐욕스럽고, 어리석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하니,
    은유시인님이 말씀하신 지옥은 내세에서 찾을 일도 없이,
    바로 여기 이 자리가 지옥인 것입니다.
    이 지옥을 벗어나는 길은,
    실로 간단한 것이니,
    지금 이 자리가,
    스스로 지은 지옥인 것을 자각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은유시인 2011.02.22 15:43 PERM. MOD/DEL REPLY

    이제 감각이 둔해져서 어떤 것이 정의요, 어떤 것이 진실인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전 30년 동안 틀어박혀 살았던 부산 다대포를 벗어나 중앙동으로 원룸을 얻어 이사했답니다. 이제부터라도 신문발행을 때리치고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죠. 쉽게 벌 수 있는 것이 돈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돈이 인격이고 신용이고 위엄이라 하니 안 벌 수도 없습니다. 해서 4년 동안 품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1년간 재활용품 취급공장에 맡겼습니다.조금은 더럽게 살겠지만 너른 공터도 있고 뛰어놀기엔 오히려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주일에 한번은 꼭 찾아가 껴안아줄 생각입니다.
    강아지 예삐를 키우면서 동물의 고통에 더욱 민감하게 되었습니다.

  4. 사용자 bongta 2011.02.22 18:56 신고 PERM. MOD/DEL REPLY

    자꾸 불교 말씀 드려 죄송합니다만,
    여기 팔고(八苦) 중에 애별리고(愛別離苦)라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던 예삐와 떨어지게 되셨음이니 속이 편치 않으셨겠습니다.
    하지만 거자필반(去者必返)이니,
    언젠가 또 좋은 시절이 닿으면 돌아와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돈이 살면서 필요한 것이지만,
    그렇다한들 돈이 인격이요 위엄이란 생각에 너무 매이지는 마시고,
    모쪼록 자중자애(自重自愛) 스스로를 귀히 아끼는 나날이 되시길 빕니다.
    불연이면 종국에 그리 경원하던 저들과 매한가지가 아니 되리란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혹여 한가한 소리라고 나무라실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이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위인(爲人)입니다만,
    매일 짓는 부끄러운 오늘을 딛고 내일을 겨냥한다는 것,
    역시 여간 모질지 않으면 누구라도 이를 결행키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는 것.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

    은유시인님과 함께,
    우리 모두는 오늘을 맞듯, 내일을 만나는 것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한신(韓信)은 과하지욕(胯下之辱)을 스스로 삽니다.
    ( ※ 참고 글 : http://bongta.com/433 )
    그가 건달 시절 시비 거는 백정의 바지 밑으로 기어 나갑니다.
    그가 나중에 한(漢)의 대장군이 됩니다만,
    실은 그전에 한고조 유방과 겨루어 쳐질 것도 없는 군벌이었지요.
    그가 남의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 들어가길 주저하지 않은 것은,
    비굴해서가 아니라 실인즉 자중자애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날 저잣거리 뭇 대중에게 비웃음을 샀지만,
    스스로에게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힌 것이 아니라,
    실인즉 오늘을 귀히 아꼈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기에,
    행여라도,
    내일을 위해 마냥 오늘을 비굴하게 저버리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비록 가냘픈 촛불이지만,
    나에게 유일하니 전속(專屬)되어,
    오늘 하루를 일회적으로 비추이고는 영원 속으로 사라지는 귀한 인연인 것이기에.

    건강 잘 챙기시고,
    힘내시길 빕니다.

    그리고,
    예삐의 앞날을 축원합니다.

  5. 은유시인 2011.02.23 15:11 PERM. MOD/DEL REPLY

    이유가 어떻든 간에
    구제역으로 수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 등을 생매장 한 것은 분명 크나큰 잘못과 범죄행위라 여겨집니다. 저는 동물을 먹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는, 아니 경우에 따라 당연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생존을 위해(식물성 음식만 먹어도 살 수는 있겠으나) ... 그렇지만 사육하는 과정에서 동물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겨집니다.
    전, 시골로 내려가면 식용을 위해 닭이나 돼지도 키울 것이고 손님 오면 그들을 잡아 대접할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잡아먹을 때까진 생명체로서의 존엄성을 인정할 것입니다. 이율배반적인 생각이겠으나 어쨌든 당장은 이론적으로 잘 정리가 되질 않네요.

  6. 사용자 bongta 2011.02.24 15:15 신고 PERM. MOD/DEL REPLY

    제가 예전에 쓴 글을 다시 되새겨봅니다.

    “타자의 살을 내가 취하여 먹음으로서 명(命)을 지탱하고,
    타자의 가죽을 벗겨 내 몸에 걸쳐야 부끄러움과 추위를 가릴 수 있음이며,
    (※. 그러하다한들 현대의 가죽, 털옷을 용인함이 아니라,
    원형질적(原形質的) 생존의 허무한 폭력성을 지적하고 있음이다.)
    타자의 뼈를 훔쳐 들보와 기둥(梁柱)을 얽고, 터럭을 잘라 지붕으로 엮고서야,
    비로소 우풍한서(雨風寒暑)를 막을 수 있다.”

    살아 있는 존재는 어쩔 수 없이,
    타자의 멱을 끊고, 그 肉과 骨을 취하여 제 명을 부지합니다.
    동물을 먹지 않으면 식물을 먹지 않을 수 없으며,
    식물을 먹지 않으면 동물을 먹지 않을 수 없는 것.
    그러하니 음식을 가지고 동물, 식물 이리 나누어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어줍지 않은 짓일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목축을 하면서부터,
    동물들을 학대하고,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면서,
    제 잇속을 무한정 추구하다보니,
    이즈음 사람 손아귀에 잡힌 동물들은 가히 현생지옥에 빠져있는 것이지요.

    저는 2000년도에 우연히 피터싱어의 동물해방이란 책을 읽고는,
    이내 육고기를 끊었습니다.
    저로서는 지금과 같은 목축을 빙자한 공장식 동물사육방식 하에서
    생산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게 아니라면(공장식 축산),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육식은 존재를 부지하기 위한 한 방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에,
    생물학적인 관점에선 그리 큰 저항감은 없습니다.
    다만 불교식으로 육식을 비윤리적, 비종교적으로 보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역시 개인의 선택 문제라고 봅니다.
    저는 제가 육식을 멀리하는 생활을 앞으로도 지속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앞으로 공장식 축산이 없어진다면,
    육식을 이리 민감하게 받아드리지 않아도 될 터이니,
    이 때라면 혹여 가끔은 육식을 하게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는 여기 북한산만 하여도 최근에 둘레길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산자락에 있던 무허가 건물들을 몇 개 헐었습니다.
    저들이 잔해를 치우느라고 치웠을 터지만 그들이 떠나간 자리엔 갖은 쓰레기가
    마치 ‘배반이 낭자하듯’ 엉망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특히 사람의 경우엔 이리도 요란스럽고 구차스러운 것이지요.

    살다 세상을 등질 때는,
    지나는 길 허공에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 바람처럼 떠나갈 수 있다면,
    참으로 근사하겠단 생각을 합니다.

    육식은,
    저 무허가건물주들이 떠나면서 저리 구질구질하게 잔해를 남기고 가듯,
    제 자신의 명줄을 잇기 위해 이웃 동물들에게 지나친 고통을 가하는,
    사뭇 누추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아닌 게 아니라 마침 오늘 등산길을 내려오면서 하였습니다.

    살면서 동물이든, 환경이든
    제 주위에 폐를 끼치지 말고,
    조용히 바람처럼 자취 없이 지나길 기원합니다.

    ***

    여기 블로그에 ‘개망초’란 제하로 소개하였듯이 동네 뒷산에서 유기견과 인연을 지었었지요.
    그런데 그 산에 조그마한 배드민턴장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 최코치란 저보다 젊은 분이 하나 있었지요.
    그는 거기 여느 회원들과는 다르게 그 강아지를 가끔씩 돌봐주곤 하였지요.
    그 강아지를 여의고는 저는 그 근처에 아예 발걸음을 끊었습니다.
    오늘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풀방구리와 함께 그 배드민턴장을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최코치란 분이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실로 산다는 것은,
    허화(虛華)같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희 집 앞에 조그마한 암자 하나가 있습니다.
    한참 전부터 거기 대문에 걸어 둔 현판이 없어졌더군요.
    그래 이사를 갔는가 하였습니다.
    오늘 거기 드나드는 신자를 만나 말을 띄어보았더니,
    바람에 현판이 떨어져나갔다더군요.
    거기 암주는 老비구니인데,
    이젠 힘이 부치시는지 현판을 다시 붙일 생각을 아니하고 있는 것이지요.

    절집 살림이라는 것이,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닙니다.
    도 닦는 것도 큰 대사지만,
    신도들 끌어 앉히고 이끄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그러한데 나이를 잡수고 나니,
    만사휴의(萬事休矣)라,
    그 시퍼렇던 구도의 열정도 식고,
    청정하던 계율행도 게을러지고,
    간판이 떨어지든, 솥단지가 깨지든 알 바 없음이라,
    도시 내 몸뚱아리 하나 건사하는 것도 버거울 뿐인 것을.

    그러함인데,
    어찌 내 입에 달다고,
    - 저 가여운 동물들을 저리 모질게 학대하고, 멸시하고,
    산 채로 구덩이 묻고, 제 동료 살 갈아 사료랍시고 먹이고,
    좁은 울안에 꼼짝 못하게 가두고, 생장호르몬으로 뻥튀겨 -
    오불관언 쳐먹기 바쁠 수 있겠음입니까?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혼이 있고, 숨이 붙어 있는 유정물이라면,
    차마 저리 모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눈 깜짝일 사이에 언뜻 눈에 불꽃 일었다 찰나간 사라지는,
    안화(眼花)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니,
    이 짧디 짧은 동안 살아가면서,
    선하지는 못할망정,
    행여 악해지지는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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