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월광소나타

소요유 : 2011. 8. 12. 20:39


어렸을 때,
탁상시계에 달린 오르골엔 이 음악이 프로그램 되어 있었다.

나중에 시계가 고장이 나자,
나는 오르골만 떼어내 보물처럼 책상 서랍에 보관했다.
홀로된 골방에 가끔 꺼내어 태엽을 감고는 
또각또각 풀려나오는 소리에 안겨 있곤 했다.
나이가 한참 늦도록 이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덧 그는 잊혀지고 나는 길을 떠났다.

여기 전곡 농원 언덕에 서면,
달은 높이 떠올라 그윽한 시선을 내게 내린다.

한참 쳐다보다 문득 밭가에 눈을 돌리면,
월광은 풀잎에 부드럽게 부셔지며,
은빛 구슬이 되어 흐른다.

달빛은 시간 위에 젖어 흐르고,
나는 홀려 풀숲을 잠영(潛泳)한다.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주회시(鼅鼄會豕)  (10) 2011.09.17
백야백묘(白夜白猫)  (4) 2011.08.18
한탄강(漢灘江)  (10) 2011.08.13
월광소나타  (4) 2011.08.12
'유시민 단상'에 덧붙여  (4) 2011.08.11
고독(孤獨)  (2) 2011.08.08
독안(獨眼)  (2) 2011.08.03
Bongta LicenseBongta Stock License bottomtop
이 저작물은 봉타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행위에 제한을 받습니다.
  1. 은유시인 2011.08.12 21:05 PERM. MOD/DEL REPLY

    시적 표현의 글과 월광소나타 곡이 잠시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2. bongta 2011.08.13 07:25 PERM. MOD/DEL REPLY

    만약 말입니다.
    달이 여기 가까이 있다면,
    저들이 그냥 놔둘까 싶군요,
    아마도 삽질, 공구리하여 운하파고, 보 쌓고, 자전거 길 만들자고 대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돈 많이 벌 수 있다고 한껏 선전해댈 것입니다.
    그게 실은 제들 뱃구레를 채우자는 수작이겠지만.

    시인묵객이 왜 달을 벗하는 것입니까?
    거긴 결코 돈으로 환가할 수 없는 진실(眞實)과 진정(眞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기에 꿈과 그리움을 두레박질하듯 게서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새록새록 사농공상이 신분, 계급을 나누자는 것만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상(商)이란 평생 利만을 생각한 자들인지라,
    도대체가 義와 理를 귀하게 여길 틈이 없었던 것이며,
    禮와 節을 닦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지요.

    제가 이제 농부가 되었습니다만,
    士의 길은 사람이라면 평생 닦지 않을 수 없음을 새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3. 은유시인 2011.08.13 23:03 PERM. MOD/DEL REPLY

    늑대의 우짖는 옆모습이 참 귀엽다 여겨집니다.
    아무리 무서운 맹수라해도 인간처럼 음흉한 모습은 보이질 않네요.

  4. 사용자 bongta 2011.08.14 10:49 신고 PERM. MOD/DEL REPLY

    랑월(狼月)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늑대와 달은 인연이 깊습니다.

    늑대가 만월(滿月) 보고 울부짖는 소리를,
    호규성(嚎叫聲) 또는 그냥 호성(嚎聲)이라고 합니다.
    왜 하필이면 만월에 그리 울부짖는 것일까요?
    그것도 높고 높은 산의 정상에 올라 울 때는,
    깊은 사연이 있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중국 전설에 따르면,
    원래 늑대의 처는 천상에 사는 신선의 딸이었다고 합니다.
    이 딸이 늑대의 간절한 소망을 가여히 여겨 지상에 내려와 결혼을 해줍니다.
    한동안 둘은 아주 행복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신선이 나타나 딸을 빼앗아 달아납니다.
    이때부터 늑대는 상통(傷痛)을 참을 수 없어,
    고고정상 벼랑에 올라 달 보고 울부짖게 된 것이라 합니다.

    밤의 장막을 찢고 전해지는 이 소리를 들으면 ,
    덩달아 마음이 산지사방(散之四方)으로 흩어지며 처연해집니다.
    교교히 빛나는 달빛은 얼음 같이 순결하여, 차라리 마음이 에려옵니다.
    이 때 저 멀리 벼랑 위에서 울부짖는 늑대 소리가 차가운 밤 공기를 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 왜 이리도 처량해지는 것입니까?

    예전이 기르던 우리 강아지 하나도,
    어쩌다 밤에 고개를 쭉 빼고 늑대 소리 비슷하게 울부짖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게 한편으론 신통하고, 또 한편으론 가엽고 그렇더군요.

    제가 예전에 어느 사이트에서 댓글로 이야기를 나눈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침 늑대가 등장하니 옮겨봅니다.

    .......
    .......

    박상륭은 또 이리도 말하였습니다.

    “계집 하나 잘못 잡아먹고 목에 비녀가 걸린 채 고독히 배회하는 그런 어떤 야윈 들개처럼, 왠지 내 목구멍에도 그런 비녀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울음은 아니었을까도 모른다...”

    박상륭이야말로 가시 비녀 때문에 그런 난해한 소설을 썼던 게 아닐런가 ?
    하지만...
    박상륭은 울음으로 소설을 써내지 않으면 아니 될 사연을 가진 것일 텐데,
    그게 실인즉 늑대의 울음처럼 외로움일 것이로되,
    아직은 철저하지 못한 게 아닌가 그리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라면 그런 독백을 늑대처럼 달보고 짖지 않고,
    왜 소설이란 만인을 향한 형식을 빌어야 했는가 싶은 것이지요.

    그는 외롭데,
    세상 사람을 그리워할 딱 그만큼은,
    아직 덜 외로웠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니, 외로우려면 천하인은 늑대한테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배워야 할, 또는 배울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직 골수까지 외롭지도 않은데,
    외로운 척 흉내만 내고 있는 부끄러움만큼은 적어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야반삼경 (산에 올라) 그 부끄러움을 배우고 있습니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