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종말론과 저녁

소요유 : 2011. 10. 7. 09:43


1992년도에 다미선교회 이장림 목사는 시한부 종말론을 유포했다.
당시 이를 본뜬 아류 종말론이 우후죽순처럼 나오기도 하였다.

당시 내가 아는 지인 중에도 종말론을 믿는 사람이 있었는데,
대개 평소 정신이 허랑(虛浪)하거나 생활이 궁핍한 편이었다.

내가 늘 주장하듯이 사람의 본바탕은 비상(非常)한 상황이라야,
야반삼경 관솔 빛에 비추이듯 밝히 드러나고 만다.
평소엔 꽃 같은 미소 짓고, 아름다운 말씀을 주고받으며,
한훤수작(寒暄酬酌) 나누지만 급박한 위험이 닥치면,
상대를 진구렁텅이에 밀어 넣으며,
저만 살겠다고 홀로 달아난다.
(* 함훤수작(喊喧酬酌) : 큰 소리로 외치며 떠들썩하게 서로 주고받는 수작)

종말론에 빠진 사람들은,
가족붙이, 친구를 버리고,
온 재산 모두 교회에 헌납하며,
저만 공중에 들림(携擧) 받겠다고 그날을 기다린다.

당시 내가 지하철 로비를 걷고 있었다.
아이를 들쳐 입은 한 여인이 행색도 초초하니 통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종말이 가까웠다는 피켓을 들고,
또 한손에는 종말론 말씀이 들어 있다는 테이프가 들려 있었다.

여인은 실색(失色)되어 거의 탈혼(奪魂) 지경인데,
그 때 열차가 플랫폼에 막 들어오고 있었다.

부인네 둘이 승강구에 오르면서 내뱉는다.

‘저 여자 집에 저녁은 지어놓고 왔는지 모르겠어?’

저 말씀이 던져지자,
한 귀퉁이로부터 서서히 음울한 기운이 번지던 승강장은,
일순 현실로 재복귀하고 만다.

여인 하나는 이장림에게 전 재산 바치고,
테이프 하나 얻어들고는 저리 넋이 다 나가 있는데,
또 다른 한편의 여인은 가족의 저녁을 걱정하고 있는 정경.
이 극대비의 콘트라스트가 당시 시대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휴거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과연 어디로 갔는가?
종말론이 불발로 끝나자,
신도들은 잠시 혼란에 빠져든다.
하지만 이도 잠시 그 뿐.
그들은 다시 그 교회에 모여든다.
그리고는 다시 다음 휴거를 기다린다.

명백하다.
정작, 그들이 바라는 것은 휴거가 아니다.
바람을 바랄 수 있는 기회인 것을.
소망을 소망할 수 있는 교회가, 교주가 필요했을 뿐인 것을.

종말론뿐 아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교주가 사기, 횡령, 폭행, 살인미수 따위로 수감이 된다.
이쯤 되면 교회가 와해되고 신도들은 흩어질 만하다.
하지만 열성교인들은 옥에 갇혀 수난(?)받는 교주를 알현하고,
그가 형을 마치고 나오면 그를 다시 추대하여,
그 밑에 복속하고 만다.

저들은 실인즉 종말론, 교주를 믿는 것이 아니다.
뻥 뚫린 자신의 시린 가슴을 덮어줄 담요가 필요한 것이고,
밑 터진 제 사타구니를 가려줄 거적때기가 요청될 뿐인 것을.

그런데 말이다.
저녁을 걱정하고 있는 저 여인네들은 행복하다.
정작은 걱정하고 싶어도,
저녁꺼리를 마련할 형편도 미처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혹은 저녁 말고,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저녁 어스름에 이르러,
평범한 아낙이 식구들 저녁을 걱정하게 하지 못하게 하거나,
시린 가슴, 어두운 영혼들을,
이리저리 꾀어 온 재산을 알거내고 삶을 송두리 채 파괴하는,
저 사탄의 무리들은 또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대가 '저녁을 걱정할 수 있는' 처지라면,
얼마나 절절 고마운 노릇인가?
그대, 오늘 저녁,
저녁을 걱정하라.
충실히.

나는,
오늘도,
허리에 전대를 두르고 밭에 나선다.
(※ 참고 글 : ☞ 2010/10/13 - [소요유] - 쓰레기 전대(纏帶))

저,
길에서 저녁을 걱정하는 아낙이나,
밭에서 비닐 조각을 줍는 나나,
오늘,
그래서 복되다.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토(凍土)  (4) 2011.10.20
인터넷은 대라대고(大鑼大鼓)  (0) 2011.10.17
개시허망(皆是虛妄)  (0) 2011.10.10
Apple  (0) 2011.10.06
재(灰)  (3) 2011.10.03
지주회시(鼅鼄會豕)  (10) 2011.09.17
Bongta LicenseBongta Stock License bottomtop
이 저작물은 봉타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행위에 제한을 받습니다.
소요유 : 2011. 10. 7. 09: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