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행군(行軍)

소요유 : 2011. 11. 4. 11:46


며칠 전 농원 앞 부대 장병들이 밖으로 나와 행군 열을 짓는다.
일을 멈추고 멀리 물러나 길게 자른 통나무에 걸터앉아 저들이 지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멀리서 보니 저들 사병들 손에 무엇인가가 들려있다.
가만히 보니 우유팩과 사탕 등이다.
아하, 행군하는 동안 먹으라는 배려인가 보다.

우리 때는 행군 간에는 잡담은 물론 껌조차 함부로 씹을 수 없었다.
그러한 것인데 지금은 세월이 좋아져 간식까지 제공이 되는가 싶다.
지금 당장 전쟁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훈련 상황이라면,
목도 추길 겸. 피로도 덜 겸 군것질을 하는 것이 무엇이 대수랴?
무조건 조이고 닦달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리라.

하지만 순간 의문 하나가 들기는 든다.

行軍也是危險事
‘행군이란 위험한 일이다.’

이러하지 않았던가?
무거운 철모를 쓰고, 총칼 허리에 차고, 중무장 등짐을 지고 나아가는 것임이라.
또한 언제 길섶을 박차고 적이 뛰쳐나올지 알 수가 없다.
왼쪽 숲 속에서 찰나간 기관총이 난사될지,
오른편 강 언덕을 넘어 폭우처럼 포탄이 쏟아질지,
조마조마한 긴장이 연속되는 일이라,
어찌 위험하지 않으리.

그러하니 행군 간에 주전부리하며 걸을 정도로 여유를 부릴 수 있는가?
훈련일지라도 실전과 다름없는 상황을 부과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차라리 간식을 먹으려면 휴식 시간에 먹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上國用兵之法何如?”
“整。”
“귀국에서는 군사 쓰는 법이 어떠하오?”
“정돈(整).”

난침(欒針)이란 어린아이가 영제(嬰齊)란 적군 공자(公子)에게 용병에 대하여 하는 말이다.
도대체가 군대가 정돈되어 있지 않다면,
어찌 영(令)이 서고, 적을 맞을 수 있으리.
(※ 참고 글 : ☞ 2009/04/14 - [소요유] - 용병하는 법)

하여간 이는 내가 주도하는 것도, 책임질 입장도 아니 되니, 주제넘게 참견할 일이 아니다.
하니, 여기서 그만 그친다.

그런데 순간 저들이 사탕껍질을 하나 둘 까서 입에 넣고 있지 않는가?
아차, 저것이 필경은 길가에 버려지겠구나.
이런 염려가 드는 찰나,
아니나 다를까 비 맞은 개가 물에 젖은 털을 털 듯,
우수수 사탕 껍질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내가 부드럽게 말을 닦아 저들에게 외친다.

‘쓰레기 길에다 버리지 마세요.’

‘네.’

말이야 늘 그러하듯이 반듯하다.

한참 후, 앰뷸런스 차량이 지난다.
이게 대개는 후미에 따라가는 즉 이제 행군 행렬은 농원 앞을 다 지난 것이리라.
내가 일어나 저들이 지난 도로가를 쓱 쳐다보니 점점(點點)이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

화가 솟는다.
마침 지휘 차량쯤으로 보이는 지프 하나가 지난다.
내가 쫓아가니 운전병 하나만이 타고 있다.
내가 차를 세우고 주의를 주었다.

“행군을 하려면 질서를 지켜야지,
지나가는 길마다, 저리 온 국토를 쓰레기장으로 만들어야 되겠는가?
지휘관에게 내 말을 꼭 전하라.”

그리 호통을 치고는 돌아와 나는 다시 하던 일을 시작했다.
필경은 저들이 버린 쓰레기를 내가 치워야 할 것이다.
그러한데 조금 있다 부대장이 되돌아 내게 왔다.

중령 계급장을 단 부대장은 예전에도 부딪힌 적이 있다.
부대 면회객 차량은 물론 육중한 보급 차량이 매일 농원 안으로 들어와,
주차장을 훼손시켜 주의를 주었는데,
이자가 나와서는 그럼 도로 한가운데 철말뚝을 박으라고 큰 소리를 쳤다.
이게 큰소리를 칠 사안인가?
남의 땅에 들어와 폐를 끼쳤으면 사과를 하고,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단도리를 잘하겠다고 하는 것이 도리이지.

부대 앞 도로는 물론 그들 정문 땅도 기실은 우리 소유다.
나중 이게 정식으로 확인이 되자 상급부대에서 나와 선처를 바랬다.
나는 그럼 부대장이 예전에 무례하게 군 것에 대해,
내게 와서 정식으로 사과하라고 이르라고 주문했다.
물론(?) 그 이후 그자는 오지 않았었다.

온 국토를 쓰레기장화 한다는 말이 거슬렸으리라.
그런데 이게 어찌 과장이며, 추호의 거짓됨이 있으랴?
장장 40km의 행군이라면,
가면서 줍지는 못할망정 여기저기 더럽히는 것이 온당한 일이겠는가?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닌가?

그는 버린 것이 아니라,
흘린 것일 뿐이라고 강변한다.

참으론 단작스러운 변명에 속으로 실소가 다 나온다.
물론 흘린 것도 있겠지만 버린 것이 왜 아니 없겠는가?
내가 이미 사진으로 그 현장을 다 박아두었는데,
이리 억지를 부릴 수 있겠음인가?
항차 온전히 흘린 것뿐이라도,
그게 국민에게 송구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일 터인데 말이다.

우리 농원 앞 도로가만 하여도 부지기수로 떨어진 것인데,
문제는 저들이 지나는 40km 길가마다 오죽 하겠는가?
나는 이게 더 염려스러워 우정 저들을 쫓아가 주의를 준 것이다.

정상적이라면,
설혹 내 말이 거슬렸을지언정 쓰레기 버린 것에 대해 사과를 하고,
다음을 조리껏 밟아나갔어야 했다.

내가 상급부대에 정식으로 공문을 띄어 허실을 다루겠다고 하자,
이때서야 말의 기세가 수그러지고 자리가 정돈돼간다.
그가 차라도 한잔 주시라고 운을 뗀다.
그러마 그럼 농원 안으로 들어오시라.

사화(私和) 술은 못 나눌망정 어찌 차 한 잔을 아끼랴.

내가 운을 뗀다.

“내 말이 설혹 귀에 거슬렸을지언정,
쓰레기 버려 원인을 제공한 것은 귀측이니 먼저 사과를 하는 게 도리가 아닌가?
그런 연후에라야 내게 섭섭함을 따져도 따져야 할 것임이라.
이게 아니라면 피차 다 제가 옳다고 자기주장만 하다가 끝나지.
갈등을 어떻게 잘 풀고, 상호 소통을 어찌 기할 수 있는가 하는 것,
이게 리더십의 중요 과제가 아닌가?”

내가 은근히 지휘 책임자로서의 역할 소홀에 대하여 짚어두자,
그가 말한다.

“요즘 사병들은 잘 말을 듣지 않는다.
담배공초를 버리지 말라고 하는데도 부대 내에 툭하면 버린다.
망각 주기라는 것이 있어 잃어버릴 만 하면 다시 되풀이 하여 교육을 시킨다.”

부대 내에서도 저리 쓰레기를 함부로 버린다면 저들이 과연 한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감내할 수 있음인가?
규율과 명령/복무의 생활 속에서 사회 예절, 질서를 배울 수 없다면,
저들이 사회에 나오면 어떤 인간이 되겠는가?

내가 말을 막아서며, 잠깐 이견(異見)이 있다며 말 하나를 덧붙인다.

“저들을 망각의 객체로 볼 것이 아니라,
자각의 주체로 보아야 한다.
그러할 때, 그에 맞는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시키면 한번 배움에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살게 된다.”

망각의 객체로 취급되기 때문에,
2년 내내 똑같은 교육이 무한 반복된다.
이런 과정은 실로 짜증이 난다.
결국 건성으로 흉내만 내다 제대 날짜를 받는다.

그런데 부대장을 돌려보내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본다.
과연 저들이 자각의 주체씩이나 될까?

맹자는 말씀했다.

萬物皆備於我 
“만물의 이치가 다 내게 갖추어져 있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도 이런 말씀이 있다.

一切衆生悉有佛性
“일체 중생에 불성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기실
개비어아, 실유불성
이를 깨닫지 못한 채, 화택(火宅)에 갇혀 질척질척 되는 것이 중생이 아니던가?

그러하다면,
내가 말한 자각의 주체가 정녕 옳은가?
저이가 말한 망각의 주체가 옳은가?

불교에선 법(法)을 구한다.
한비자(韓非子) 역시 법(法)에 의지한다.

하지만, 이 양자는 글자는 같지만 가리키는 뜻은 전혀 다르다.
불교에서 말하는 법(Dharma)은 자각의 주체가 찾아가야 할 자리이지만,
한비자가 논하는 법은 몰각주체들에게 가하는 위정자의 채찍 같은 것임이라.

여기 시골에 들어와 평생 겪지 못한 인간 군상들을 단 몇 년 사이에 셀 수도 없이 만난다.
저이들에게 전차(前次)의 법(法)을 구하는 것은 거의 연목구어(緣木求魚)임이라,
그저 후차(後次)의 법(法)을 고삐 삼아 죄어 다스릴 수밖에 없지 않음인가?
제마술(制馬術)의 으뜸은 역시 고삐(轡)임인 게라.

저 일이 있고 나서.
바로 부대 장병들이 우르르 나와서 농원 부근을 청소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이웃 농원 도로변은 그 사품에 덩달아 깨끗해졌다.
저 농원 개원이후 아니 밭이 있고나서 단 한 차례도 청소하지 않은 그곳 도로변,
수십년 묵고 찌든 때를 벗고 기지개를 편다.

오죽 쓰레기가 쌓여 없는 것이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으면,
부대 장병 하나가 게서 와이파이가 버려진 것을 주었다고 싱글벙글하였을까?
저곳을 뒤지면 아마 이 세상 만물이 다 찾아질 것이다.
하마, 계집 개짐은 아니 버려졌을까나?
저자는 이 사정을 알까?
참으로 추하고 부끄러운 노릇이다.
하기사 저것도 萬物皆備於我라 부르며 희희낙락한다면 말릴 틈은 없으리.  
내겐 저것이 그저 慢物皆備於你로 보일 뿐인데.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인지심(防人之心)  (0) 2011.12.02
길 없는 길 - 분불(焚佛)  (0) 2011.11.30
화(火)  (2) 2011.11.27
신산고초(辛酸苦楚)  (0) 2011.11.02
버린 아이  (4) 2011.10.28
이무기  (7) 2011.10.24
Bongta LicenseBongta Stock License bottomtop
이 저작물은 봉타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행위에 제한을 받습니다.
소요유 : 2011. 11. 4. 11: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