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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죽지세와 남상

소요유 : 2012. 5. 8. 08:03


내가 지난 번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데,
출구 조사원이 다가와 설문지를 내민다.

설문지는 투표한 정당과 인물을 표하게 되어 있다.
내가 체크 표시를 하고 돌아서자 조사원은 껌 한통을 준다.

껌 하나를 까내 씹고는,
나머지는 찬장 곁에 두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나둥그러져 있는지 모르겠다.

당시, 곁에 있던 처가 한 마디 거든다.

‘정당 표시하는 것을 보니 한참 아래에 있는 것을 찍데.’

‘그럼.
 진실은 저 은밀한 안짝, 밑에 숨어 있지.’

지금 그 당은 채 1%도 지지를 받지 못하여 당 해산 절차를 밟고 있다.

한참 아래에 있는 것.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당.
흔히들 말하길 勢가 없는 당.

사람들은 옳고 마땅하냐가 아니라,
지금 勢가 있느냐 아니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파죽지세(破竹之勢)란 무엇인가?
대나무를 쪼갤 땐 한쪽 끝에 쐐기를 박고 죽 가른다.
처음 쐐기를 지를 때 조금 어렵지,
일단 쪼개지기 시작하면 단숨에 자르르 갈라지고 만다.
대나무가 쪼개지듯 한 勢의 일방적인 전개 양식을,
우리는 파죽지세라 이른다.

일단 勢가 만들어지면 형성된 경로를 따라 강잉히 강제되듯 흐르게 된다.
이를 gradient라고 한다.
이게 물리학이나 수학에선 ∇ 이런 기호로 표기한다.
사물의 안쪽 깊숙한 곳엔 이런 결, 理, 理致, gradient(기울기)가 잠재태(潛在態)로 숨어 있다.
(※ 참고 글 :  ☞ 2008/04/20 - [소요유] - 결(理))

그러하니,
세인들이 勢가 있는 곳을 좇아다니며,
찍어대는 것은 일견 사물의 이치를 꿰뚫는 그럴 듯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주체적으로 그 이치를 파악하여 그리들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물의 이치를 재현하는 그저 수동적인 질료, 도구들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한 노예적인 삶.
미안하지만, 나는 저들에게 이런 의혹을 품는다.

단지 지금 현재 勢가 없다는 이유로,
시민들로 외면을 받고, 끝내 국가가 해산하라고 명령하는 세상.
그래 이런 당이 있는 반면,
이번 선거에서 10석 이상을 받은 통진당은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지금 당장 勢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존재를 박탈당하여야 한다면,
그래 만약 이게 옳은 일이라면 말이다.

이 땅의 어린 아이들은 모두 태어나자마자 부정되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은 마냥 바닥에 방치되어야 한다.
비정규직은 언제나 백만 원 안짝의 부림으로 그 질곡 안으로 가둬두어야 한다.

하지만 모두는 안다.
어린아이가 나중에라야 큰 어른이 되며,
가난한 이들이 제 재주를 갈고 닦고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부자가 될 수도 있음을.

이게 처음부터 억압되고 부정되는 세상은 그른 것이다.
나는 그러하기에 지금은 비록 勢가 미약하더라도,
그가 옳다고 판단되면 그를 지지한다.
반면,
제 아무리 勢가 강하더라도,
막 파죽지세로 치달아 세상을 말아먹을 형국이라도,
그가 바르지 않다면 그를 지지할 수 없다.

이게 자연의 이치와 다른 사람의 길이다.
이를 나는 人文의 길 또는 人道라 이른다.
혹은 義路라 일러도 좋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진보라면 민통당 아니면 통진당을 생각하지,
녹색당이라든가 진보신당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하마, 저 통자 껴들은 당들은 차마 진보라 이르기 부끄러운 구석이 많다.)
이들은 저들이 말하길 勢가 약하여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昔者江出於山,其始出也,其源可以濫觴。

큰 강물도 처음엔 작은 샛물로부터 시작되는 것.
남상(濫觴)이라,
잔을 띄울 정도의 작은 샘으로부터 발원(發源)되는 것임이라.

성경에서도,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리 말하고 있지 않음인가?

내부적으로 저리 썩었는데,
저들이 다만 勢가 그럴듯하다는 이유만으로 지지를 받을 까닭이 있는가?
그러함인데 이제까지 사람들은 어찌 저 내막을 몰랐다는 듯이,
작금에 이르러 저리들 호들갑을 떨면 야단들인가?
나는 저 당의 치부도 한심하지만,
이게 더 해괴하다.

나는 정치에 문외한이지만,
진작 저들을 알아보았음이다.

하여,
지금은 勢가 약하지만,
옳다고 판단되는 者와 黨을 지지한다.

저 안짝에 싹을 키우며 숨을 쉬고 있는,
저들의 義를 열렬히 지지한다.

아니 勢의 강약을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그가 옳으냐 그르냐가 나의 정치적 판단의 잣대일 뿐이다.

티끌일지라도 하나 하나 쌓아가며,
강을, 바다를 꿈꾼다.

이게 뭐가 그리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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