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공부 못하는 사람의 특징.

소요유 : 2013. 4. 23. 10:55


내가 고안한 두더지 퇴치기 설치법을 배우러 한 사람이 어제 찾아왔다.
거래를 튼 적도 없는 이지만 어찌 사정을 알고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모든 것을 이제까지 숨기고 아껴 남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전날 전화상으로 한참 통화를 하였는데,
전기 장치 설치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다.
해서 묻기를 전기에 대하여 좀 아는 바가 있는가 하였더니,
배터리를 다루어 보았기 때문에 잘 안다고 한다.
그럼 전화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겠다 하며,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직렬, 병렬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다 배운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대개는 다 까먹고들 만다.
잊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운 문제는 아니다.
필요하면 다시 배우면 되니까.
내가 설명을 마치자 그는 잘 알았다고 전화를 끊었다.

얼마 후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찌 저찌 연결하였는데 소리가 잘 들린다고 한다.

‘그럼 다행이다. 하지만 잘못 연결하면 얼마가지 않아 기기가 터진다.’

이 소리를 듣더니만 걱정이 되었음일까?
그는 내일 당장 방문하겠단다.

그리고 온 것이 어제다.
그가 장비 일습을 손수 가져왔는데, 직렬로 연결하였단다.
내가 쓱 살펴보니 직렬이 아니라 병렬로 연결을 하였음이니,
이리 되면 조만간 탈이 나고 말 것이다.
순간 이 분이 전기에 대하여 별반 아는 바가 없었구나 싶다.

우선 자리에 앉히고는 직렬(serial), 병렬(parallel)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기본적인 설명을 해나갔다.
그러자니 이 분이 중간에 말허리를 끊고는,
바로 전격 자신이 가진 장비를 어찌 저찌 연결하면 되느냐 이리 묻는다.
아, 나는 바로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 분의 본 모습을.

당장 필요한 부분만 알려주면,
일시 해결은 될 터이지만,
만약 장비가 4개였다가 6개로 늘어나면 어찌 할 것인가?
그 때는 또 다시 내게 찾아와서 해결해 달라고 할 터인가?
내가 남의 문제를 매번 해결해 줄 도리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원리를 가르쳐줄 때 제대로 익히면,
4개뿐이런가?
8, 16 ..... 1024 얼마든지 혼자서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그 뿐인가 고장이 나도 무엇이 문제인가 추적할 수 있고,
이를 기초로 좀 더 나은 창조적인 아이디어, 설계 능력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언젠가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인터넷 옥션에 물건을 판매하려는데 포토샵을 가르쳐 달라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내가 기본적인 원리에 대하여 설명을 해나가자,
이 자가 대뜸 말허리를 끊더니만 그런 것 다 소용이 없고,
요 부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만 가르쳐 달라고 한다.
아, 나는 바로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 분의 한계를.

내가 고등학교 때 수학의 정석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데,
나는 문제 풀이를 별로 하지 않았다.
다만 기본 원리만 열심히 익혔다.
하지만 친구들은 대개 문제 풀이에 분주하였다.
그들은 몇 문제를 풀었다느니, 몇 백 개 씩 문제를 풀었다며 경쟁적으로 자랑하기 바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원리를 터득하는데 힘을 경주(傾注)했다.
내겐 시험 시간이 외려 문제풀이 연습시간이었던 폭이었는데 말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임이라,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앎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나아가 마주칠 수도 있겠음이다.

허나, 말단은 가지가 기백, 기천이나,
근원은 하나일 뿐이라,
하나를 꿰면 어찌 백, 천에 이르랴 종국엔 만, 억을 통하는데 거침이 없을 터.

도대체가 천변만화하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어찌 일일이 다 겪어가며,
앎을, 뜻을 풀어 갈 수 있겠음인가?

그런데 기실 문제는 순역(順逆)이 같고 다름이 아니다.

‘성(誠)’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저들의 행위 양식은 빤히 그 유형이 정해져 있다.
시험 문제에 행이나 잘 나올 문제를 찾기 바쁘다던가,
당장의 닥친 문제만 해결하고 나면 그 뿐이라든가,
‘진리 탐구욕’의 부재 따위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한 마디로 ‘誠欲’,
도대체가 성실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는 것이다.
간절한 정성, 모심, 신뢰가 부재하고, 
오로지 결과 획득만이 중요한 것이다. 

저자가 돌아가고 난 후에 그가 무엇인가를 가져간 것을 알아챘다.
해서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알고는 돌아갈 때 돌려주고 가라고 일렀다.
그러겠다고 확인한 이가 한참 있다가 오지는 않고 대신 전화를 주었다.
'오늘은 못가고 내일 가져다 주겠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곳인데 내일로 미루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만,
그 사정이야 내 알 바 아니고, 내일 가져다 주겠다는데 기다려주지 못할 바가 없다.
그런데 내가 진작 예상했듯이 그는 오지도 않았고, 아무런 연락을 주지도 않았다.
여기 시골엔 저런 예의 염치 저버린 인간들이 뒷골목 개똥처럼 지천으로 널브러져 있다.

한겨울 내내 궁리를 트며 고심참담 끝에 고안해낸 두더지 퇴치하는 기술을,
아무런 친분도 없는 이에게 아낌없이 그것도 아주 세밀히, 친절하게도 전수해주었는데,
저리 염치가 없을 수 있겠음인가?
저들은 얼굴이 없는 사람들이다.
신뢰를 저버린다는 것은 곧 제 자존심을 내팽겨치고 살아가겠다는 것인데,
어찌 제 챙길 얼굴이 있단 말인가?

한 인간의 선의를 저버리는 이런 파렴치한 인간들 때문에,
세상은 더욱 각박해지는 길로 나아가게 되질 않겠는가?
참으로 뻔뻔하니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지렁이들은 어찌하려야 할 도리가 없다. 


내가 가끔 만나는 여호와증인도 매 한가지다.
늘 그이는 말한다.

“도대체가 사람이 만물의 영장인데 왜 이대로 죽어야 하는가?”
“영생의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나는 영생에 관심이 없다.’
이리 말하자 바르르 떨며 화를 낸다.

지금의 삶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음인데,
죽은 다음의 일까지 걱정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지 않은 까닭이다.
그렇기도 하지만 도대체가 이런 물음을 물을 수 없는 문제에,
계박(繫縛)될 정도로 어리석지 않기 때문이다. 
(※ 참고 글 : ☞ 2008/10/08 - [소요유/묵은 글] - 물음을 물을 수 없는 물음)) 

그는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영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로또 복권 사서 당첨 되듯,
영생이란 티켓 그 자체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죽는 것이 마냥 두려운 것이다.
천하의 겁쟁이, 비겁자 같으니라고.

하마, 겁쟁이는 용서를 할 수 있어도,
비겁자는 용서하기 힘들다.

영생하고자 현생을 저버리며 전일(專一)하는 저 모습은,
상당히 욕심 사납기도 하거니와 비겁해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영생이 설혹 있다한들,
현생에서 지은 선업의 결과로써 영생이 주어져도 주어지는 것이지,
(혹은 영생은커녕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최상의 경지로 여기는 이도 있을 터이다.)
그 과정은 제각된 채 그저 믿으면 영생할 수 있다는 생각들은,
얼마나 어처구니없게도 욕심 사납고 비열한가 말이다.

비바람을 무릅쓰고,
일 년 내내 종일,
머리 털이 벗겨지도록,
정강이가 헐도록,
전도여행에 분주하지만, 
이게 일견 가상키는 하여도,
내 주견으론 결코 성실하다고 보아 줄 수 없음이다.
사실 처음에 잘 모를 때에는 저들의 변함없는 모습을 보고는,
참으로 근실하구나 하고 오해를 하기도 하였다.

난 저들이 저리 전도에 열심인 것이,
널리 사람을 구하여 함께 영생하자는 것이라기보다도,
내가 한 사람이라도 더 끌여 들이면 신에게 점수를 많이 따고,
그러면 영생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곤 한다.

마찬가지로,
공부(功夫)는 하나도 하지 않고,
사물의 이치는 하나도 밝히려 들지 않으면서,
다만 그 결과만 취하여 당장의 이익만 취하려는 태도는 얼마나 나태한가 말이다.

나야말로 말이다.
공부(功夫)는커녕 공부(工夫)도 잘 하지 못하였으면서,
이리 공부 얘기를 꺼내든 것은,
공부를 제대로 잘하지 못한 회한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外不著相 內不動心

선불교에서 하는 말씀이어듯,
외물의 상에 착(著)하지 말고,
안으로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이,
곧 수행인의 공부(功夫)가 지향하여야 할 경지가 아니겠는가?

머리가 아무리 나빠도,
성(誠)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음인 것을.

그리하기에 방아만 찧던,
일자무식 혜능도 의발을 전수 받지 않았음인가?

세상 사람들은 그저 결과만 취하기 바쁘구나.

최근 모 카페에 카펫으로 만든 백(bag)이 등장했다.
블루베리 재배하는 사람들 중에 커다란 백을 분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까지는 천이라든가, 차광막, 부직포 따위로 만들어 왔는데,
이번 경우엔 카펫 소재였던 것이다.
내가 카펫의 경우 염색물질인 벤젠 때문에 발암의 위험이 있다고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러함인데 누군가 단 하나도,
그러한가? 자세히 알아보야겠다든가, 조심하여야겠다는 의견은 없다.
빗겨간 변명, 궁색한 핑계에다 다만 질기고 좋다라는 반응 일색이었다.

카펫 재질이니 얼마나 질기고 오래 쓰겠는가?
외물에 착(着)하고 혹(惑)하여 다른 것은 돌아볼 여지도 없는 것이다.

과연, 저것이 우려대로 나중에 발암 위험이 있음이 판명된다면 어찌 할런가?
그러면 저이들뿐이 아니고 블루베리 농가 전체가 타격을 입을 것이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조사를 해보면 좋으련만,
내가 의견을 내놓자마자 어깃장 부리듯 바로 다음날 공구(共購) 공고를 내보낸다.
무엇이 그리 급하다고 저리 서두르는가?

이치가 이러함인데,
근원은 돌보지 않고,
당장의 제 이해만 돌보며 나아가고들 있다.
순간 여기도 공부(功夫)가 한참 모자란 이들이 참으로 많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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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몽 2013.04.26 12:12 PERM. MOD/DEL REPLY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에 혹하지 않고, 지혜로운 여인을 사모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대대로 땅을 파며 농사짓던 농부는, 귀농한 농대 교수를 의심하며 시험 합니다.

    "당장 필요한 부분만 배워 꽁짜로 해결하려는 것"이 세속인들의 인심이라면,
    " ‘誠欲’을 다해, 사물의 이치를 밝혀 근원을 돌아보게 하려는" 도인의 원려지심에 감읍하겠는지요?

    그러므로 옛 사람도, "非人不傳"이라 감추었으며, '子曰, 自行束脩以上 吾未嘗誨焉' 이라 하였음인즉,
    두 손은 무겁고, 정성이 극진한 사람에게만 '格物致知法'을 전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용자 bongta 2013.04.27 15:54 신고 PERM MOD/DEL

    서울 갔다 며칠 만에 이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서울에 있는 동안은 컴퓨터 접속을 삼갔기로 뒤늦게 주신 글을 뵙니다.

    제가 여기 시골에 와서 별별 봉변을 다 당했습니다.
    어느 날은 술 처먹고 양아치가 쳐들어와 난동을 부리기도 하였지요.
    타이르다 아니 되어 경찰을 불렀습니다.

    제가 경찰에게 이르길,
    “여기 와서 년년세세 때마다 일마다
    동네 사람들에게 수박덩이도, 떡도, 막걸리도 건네길 거르지 않았음에도,
    답례 한번 받은 적이 없다.
    도대체가 시골 인심이란 왜 이다지도 사나운가?”

    이리 하였지요.
    그러자 그 경찰이 아주 귀가 확 뚫리는 명언을 지어 제게 던져주었습니다.

    “그래도 부족하다 더욱 더 풀어야 한다.”

    나중 이 경찰과는 면식을 트고 친구가 된 셈인데,
    지금은 다른 면으로 전출을 갔군요.

    속수지례를 바라지도 않지만,
    다 자란 키 큰 어른들이 어찌 이리도 염치를 모를까 정말 딱합니다.

  2. 은유시인 2013.04.26 13:49 PERM. MOD/DEL REPLY

    은혜를 웬수로 갚는 인간들이 지천에 널려있습니다.
    머릿속으론 도리를 알면서도 정작 실천하지 않는 인간들이지요.
    이런 인간들을 위해 천국은 없더라도 지옥은 꼭 있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사용자 bongta 2013.04.27 15:54 신고 PERM MOD/DEL

    제가 집사람에게 말합니다.
    “우리야 이리 당하고 그냥 말지만,
    만약 저들끼리 저리 상대하고 겪으면 저들은 어떤 생각들을 할까?”

    저들은 거지반 인사불성, 비몽사몽으로 사니 서로간 별반 잘못된 것을 의식 못할까요?
    하여간 어지간한 사람들입니다.

    공기도 외려 서울보다 못하고, 인심은 사납기가 늑대보다 더한데도,
    이상하게도 서울에 가 있으면 그래도 시골로 빨리 오고 싶습니다.
    왜 그런가?
    잠깐 생각해보았는데,
    그깟 촌놈들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마도 산천 자연이 주는 무한한 사랑, 신뢰 같은 느낌 때문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3. 玄武 2013.04.26 14:27 PERM. MOD/DEL REPLY

    저는 공부는 못해도 저 정도는 아닌데…….ㅎ
    읽어보니 찔리는 부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어제도 아이보고 모빌 폰으로 이메일
    골뱅이 올리는 법 배워두라고 했으니.

    아이 없으면 나는 이메일 번호 못 친다?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꼭 차서 그런 것이지요.
    가계야치家鷄野雉는 아니고 작은 일은 누군가에게
    밀어 버립니다. 이것이 머리 용량이 작은 사람의 한계같아요.
     

    사용자 bongta 2013.04.27 15:54 신고 PERM MOD/DEL

    작은 일은 남에게 미루는 것이야말로 대인의 풍모라 하겠습니다.

    割雞焉用牛刀

    어찌, 닭 잡는데 굳이 소 잡는 칼이 나서겠습니까?

  4. 玄武 2013.04.28 11:46 PERM. MOD/DEL REPLY


    자전거 타고 삐딱삐딱 비탈길 오르는데.
    주인장님께서 그랜저로 바꿔 태워 주셨습니다그려. 하하

    역시, 모든 생물들은 주변 환경이 좋아야 합니다.
    향수가게 들렀다 나오면 향수를 사지 않아도 좋은 냄새가 배듯이.
    블루베리도 그렇게 주인장님 인품이 배어 향기롭고 튼 실이 잘 자라서
    풍성한 수확하시길 기원합니다.

    사용자 bongta 2013.04.28 22:04 신고 PERM MOD/DEL

    감사합니다.

    제 블루베리가 과연 남들처럼 품질이 좋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 밭만큼은 가근방에서,
    아니 연천군 전체를 통털어 제일 깨끗할 것입니다.
    흙을 퍼먹어도 괜찮은 수준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더 깨끗이 하기 위한 노력은,
    농사를 그만 둘 때까지 년년세세 이어질 것입니다.

    향수 말씀을 듣잡고는,
    그 내용을 예전에 다루었던 적이 있어 다시 전재해봅니다.

    ***

    <法句譬喻經雙要品>
    ......
    地有故紙,佛告比丘取之,
    受教即取。佛問比丘:「以為何紙?」諸比丘白佛:
    「此裹香紙,今雖捐棄處香如故。」佛復前行,
    地有斷索,佛告比丘取之,受教即取。佛復問曰:
    「此何等索?」諸比丘白佛:「其索腥臭,此繫魚之索。」
    佛語比丘:「夫物本淨,皆由因緣以興罪福,
    近賢明則道義隆,友愚闇則殃罪臻。
    譬彼紙索近香則香,繫魚則腥,
    漸染翫習各不自覺。」 於是世尊即說偈言:
    「鄙夫染人,  如近臭物,  漸迷習非,
    不覺成惡。  賢夫染人,  如附香熏,
    進智習善,  行成芳潔。」

    땅에 떨어져 있는 오래된 종이를 보시고,
    부처께서 비구를 시켜 그것을 줍게 하였다.
    비구는 가르침을 따라 그것을 주었다.
    부처께서 물으셨다.

    “그게 어떤 종이냐?”

    비구가 말한다.

    “이것은 향을 쌌던 종이입니다.
    비록 버려져 있었습니다만 아직 향내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셨다.

    땅엔 끊어진 줄이 하나 버려져 있었다.
    비구에게 그것을 줏으라 이르셨다.
    가르침을 받자와 그것을 줏으니,
    부처께서 다시 물으신다.

    “그 줄은 무엇이드냐?”

    비구가 부처에게 고한다.

    “그것은 비린내가 납니다. 생선을 묶었던 것인가 봅니다.”

    부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신다.

    “무릇 만물은 본래 청정하다.
    모두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부른다.
    현명한 이를 가까이 하면 도의가 흥륭하고,
    우암한 이를 벗으로 가까이 하면 재앙과 죄가 이른다.
    저 종이는 향을 가까이 한즉 향내가 나고,
    저 줄은 생선을 묶었은즉 비린내가 난다.
    차츰 차츰 물들어 자신도 모르는 새 익숙해지고 만다.”

    이에 세존께서 게를 지어 내리 설하신다.

    비루한 인간은 더러운 냄새나는 물건을 가까이 하듯,
    점차 그릇된 것에 익어 악에 빠지는 것을 모른다.
    현명한 이는 아름다운 향기에 젖듯,
    지혜롭게 나아가 선을 익히니,
    향기롭고 깨끗한 덕행을 이루나니.

  5. 玄武 2013.05.01 12:39 PERM. MOD/DEL REPLY

    좋은 공부 했습니다.
    좋은 글 모셔가서 공부 좀 더 하겟습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감사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도 여자는 좀 경원시 했다고 하지요?
    유모도 여자라 해서‘계’를 늦게 주었다던가요?
    전생 때문 이었나요?
     

    사용자 bongta 2013.05.01 22:45 신고 PERM MOD/DEL

    유모 역할을 하였다 할 수 있지만, 기실은 이모이지요.
    석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은 산욕기의 후유증으로 이레 만에 돌아가시게 되고,
    결국 이모인 마하파자파티가 양육을 하였습니다.
    이모가 젖을 먹였을 수도 있지만,
    마침 젖이 나올 상태에 놓였을 가능성은 적었을 터이니,
    아마도 유모를 들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야부인이 돌아가자 이 이모는 석가 아버지인 정반왕과 결혼합니다.
    그러하니, 유모라기보다는 그저 양육인 또는 대모(代母), 양모(養母)내지는 계모(繼母)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초기에 여성을 꺼려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당시의 사회상에 비추어볼 때 여성을 받아들인 것은 파격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성을 받아들이므로 해서 정법이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이는 부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후에 교단내의 남성들이 지어낸 말일 것입니다.

    저는 불교(교리)처럼 여성에 대하여 차별이 없는 종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유불성이라 유정물은 물론 무정물도 불성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여성이란 이유로 차별을 가할 이치가 없지요.

    하지만 현실의 세계에선 상당 부분 여성에게 차별이 가해지고 있지요.
    이는 기득권을 장악한 비구 세력들의 교묘한 수구보수 책동의 결과라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보문사 등의 비구니 중심의 종단도 있고,
    비구니 주지승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는 가톨릭이라든가 개신교에서,
    여성이 사제나 목사가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용인하지 않는 것과 견주어볼 때,
    아주 인상적인 사례라 하겠습니다.

    후기불교인 밀교라든가 딴뜨리즘으로 들어가면,
    거기 여성이 도인(道引)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일찍이 어느 종교가 이리 여성을 열린 자세로 받아들였습니까?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말씀을 남성이 독점할 이유가 없지요.
    여성에겐 예외라면 저 말씀은 사뭇 빛을 잃고 말 것입니다.
    저는 저 말씀을 남성, 여성은 물론 동물들, 만물에까지 외연 확장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도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유독 불교의 경우엔 여성 신도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여성에 의해 불교가 지탱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불교는 여성에게 진 빚이 많습니다.

    게다가 작금의 비구는 부처의 말씀을 왜곡하여,
    비구 위주로 판을 짜고 제들끼리 이끌고 있지요.
    불교계가 여성에게 가하는 제도적인 제한이라든가 차별 의식을,
    하루 빨리 불식하길 기대합니다.

    하지만, 여성들 역시 자리에 합당한 실력을 갖추길 바랍니다.
    제가 보기엔 아직까지는 여성들의 역량이 사뭇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나름 정리해둔 바가 있습니다만,
    공개하면 여러분들로부터 개인의 그릇된 편견이란
    주의의 말씀을 듣기 십상이라 여기선 약하렵니다.

  6. 玄武 2013.05.02 00:36 PERM. MOD/DEL REPLY


    또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여자들을
    같은 반열에 있게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랑, 평화, 평등, 이런 말은 제일 많이
    사용하는 집단이지만 말이지요.

    베트남은 여자 때문에 지탱하는 나라라고 할 정도로
    남자보다 여자들이 일도 잘하고 특히나 부끄러워 할 줄 압니다.
    --이것은 남자들보다 좀 더 도덕적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종교가 무섭기 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많이 미워합니다.
    혹세무민 하는 최상의 구룹들.

    본질을 들여다보면 간단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지요.

    원산지에 가까운 유럽에서 건너와야 할 것이 쌀 많이
    나는 이분법의 나라에서 건너온 것이 문제 같습니다.

    밖에서 굴러온 백년도 안 된 것들이 반만년 자기 조상의
    목을 치는 나라는 지구상에 우리나라 뿐일 것입니다.
    이런 걸 家鷄野雉라고 하기에도 너무 어리석습니다.



    사용자 bongta 2013.05.02 09:58 신고 PERM MOD/DEL

    “특히나 부끄러워 할 줄 압니다.”

    이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길가다 보면 전봇대에 전단이 붙어 있습니다.
    베트남 여인네와 결혼을 주선하는 내용입니다.

    한국 여인네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중국, 필리핀을 넘어 급기야 베트남에 이르고 있는데,
    귓가로 베트남 여인네들이 수줍어할 줄 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즘엔,
    이 땅의 여인네들은 물론 어린 계집아이들에게서도 도대체가 수줍어하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모두들 당당하니 가슴팍을 쑥 내밀어 뽐내고,
    허벅지를 들어내고 색향을 뿜어내기 바쁘니 그럴 틈이 없지요.
    이게 도대체가 모든 계집들을 색주가에서 뽑아 데려다 모아놓은 것인지,
    곡곡(曲曲) 온 고을이 색향(色鄕) 일색입니다.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

    저는 그것을 떨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풍이 나무 가지를 스칩니다.
    이 때 거기 매달린 가녀린 잎새가 잔물결처럼 바르르 떨립니다.
    바람이 불어도 거기 저항하여 미동도하지 않으련다 하고 버티면 종국에 찢기고 맙니다.

    떨림이란 우선은 일차적으로 잎새가 조심스레 바람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로되,
    그를 넘어 ‘내가 당신을 의식하고 있는 모습’을 들켜버렸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러움을 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비밀이어야 하는데,
    숨길 정도로 뻔뻔하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기어이 노출이 되고 맙니다.
    이게 못내 송구하고, 못나 보이고, 안타깝고,..
    한마디로 몸 둘 바를 모르게 됩니다.

    하니 부끄러와 바르르 떨지 않을 수 없지요.
    아마 이를 색체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분홍색일 것입니다.
    이를 홍조(紅潮)라 하지요.
    기어이 얼굴이 발그스름히 물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조(紅調)가 아니지요.
    이는 단순히 색조를 일컫는데 그치지만,
    홍조(紅潮)는 마치 저녁놀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동태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서산에 지는 놀처럼 서럽고 안타깝기에 계집 낯색도 자연 놀을 닮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집갈 때 곤지 연지 찍어 바르는 것은,
    얼굴이 발갛게 물들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확대하여 알림으로써,
    자신이 지금 한참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선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려 붉게 물들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연지, 곤지 속으로 숨기려고 하는데,
    있음이 아닐까요?
    차마 민낯을 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원초적인 순결의 외적 표징.
    저는 이것을 부끄러움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 여인네들은 어떻습니까?
    속눈썹도 문신하듯 아예 그려 새겨 넣고,
    입술은 아래로 홀랑 까뒤집어서는 자신은 색녀임을 만천하에 고합니다.
    색조 화장술은 놀랍도록 발달하여 계조(階調,gradation)로 칠하면,
    부끄러와 번지는 실제의 홍조보다 더 섬세한 표현이 가능합니다.
    이 경지에 도달하면,
    이젠 민낯을 감추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꾸민 낯을 팔지 못하여 안달이 나게 됩니다.
    이게 성에 차지 않으면, 이젠 가슴 깃을 도려 파내 젖통을 드러내고,
    치마 끝동을 잘라 허벅지, 사타구니를 남에게 보여주려 다투어 기를 쓰게 됩니다.

    이것은 부끄러움이 아니지요.
    실(實)은 거세되고 다만 명(名)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천하 장사꾼은 매명(賣名)에 일로 매진하고,
    천하 계집들은 매색(賣色)에 분주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기에 베트남 여인네들이 아직도 부끄러워 할 줄 안다는 소식을 듣자,
    저들을 사모하는 마음이 일더란 말입니다.
    꽃은커녕 곰팡이가 슬어도 하등 이상하다 이를 이가 없을,
    묵은 고목 처지임에도,
    연분홍 홍조가 제 가슴에도 물무늬져 번지고 있음이니,
    저야말로 부끄러움을 아는 이 시대 마지막 사내가 아니올는지?

    벌레의 더듬이처럼,
    외물을 섬세하게 의식하고 있는 기관이 아직 제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개 천하의 사내는 물론이거니와 계집들조차도 진작에,
    예민하니 외물을 감수(感受)하는,
    그 감수성이 다들 뭉그러져 망가져 있는 것입니다.

    더듬이가 망가져 버린 벌레들이라니.
    이 어찌 가련타 하지 않을손가?

    베트남 여인들이여 영원하라!

    玄武님은 전생에 지은 복이 많으셔서,
    사시장철 꽃피는 아름다운 복사골을 점지 받으셨을 것입니다.
    부끄럽도록 부럽습니다.

  7. 玄武 2013.05.02 20:07 PERM. MOD/DEL REPLY

    아래 글 참 좋습니다.
    제 수준에 딱 맞는 가르침이십니다.
    그래서 제 글 창고에 모셔 두었습니다.
    우선 제가 희망한 곳이 여기쯤 입니다.


    {미풍이 나무 가지를 스칩니다.
    이 때 거기 매달린 가녀린 잎새가 잔물결처럼 바르르 떨립니다.
    바람이 불어도 거기 저항하여 미동도하지 않으련다 하고 버티면 종국에 찢기고 맙니다.

    떨림이란 우선은 일차적으로 잎새가 조심스레 바람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로되,
    그를 넘어 ‘내가 당신을 의식하고 있는 모습’을 들켜버렸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러움을 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비밀이어야 하는데,
    숨길 정도로 뻔뻔하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기어이 노출이 되고 맙니다.
    이게 못내 송구하고, 못나 보이고, 안타깝고,..
    한마디로 몸 둘 바를 모르게 됩니다.
    .......

    시집갈 때 곤지 연지 찍어 바르는 것은,
    얼굴이 발갛게 물들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확대하여 알림으로써,
    자신이 지금 한참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선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려 붉게 물들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연지, 곤지 속으로 숨기려고 하는데,
    있음이 아닐까요? 차마 민낯을 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 유원지에 미니 한국 민속촌을 만들어 말 타고 가마타고
    치루는 우리의 옛날 결혼식을 재현하여 이곳 인민들을 신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용하게 해주려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신부 족두리야 장식이려니 하겠지만 연지 곤지는 왜 찍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생각한 적이 있어서 더욱 가슴에 와 닿은 모양입니다.
    주인장님 덕분에 개안이 된 것처럼 시원해 졌습니다. 하하

    참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베우는 것도 크게 두 가지라 생각합니다.
    1+1=2 이런 배움은 도서관에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스승의 느낌을 받은 배움이 더욱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서 많이 배웠다고 하는 것은 후자에 해당됩니다.

    제가 전생에 지은 복은 모르게지만.
    지금 인복은 많은 것 같습니다.

    공자님도 배우려고 안타까이 찾는 이가 아니면 말을 삼간다고 하셨는데.
    제 몇 마디에 이렇게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니 그저 송구스러울 따릅니다.

    일이 잘되어서 연지곤지 찍고 베트남 인민들 신나게
    노는 날이 오면 이쪽 복사골로 나들이 하시옵소서.

    이곳이 복사골이라시면 제가 家鷄野雉?



    사용자 bongta 2013.05.02 21:34 신고 PERM MOD/DEL

    과찬의 말씀은 내려주신 격려로 새기겠습니다.

    색체 -> 색채(色彩)
    일로 매진 -> 일로매진(一路邁進)

    제가 눈이 나빠지니 이젠 자판도 얼보여 오타가 자주 나옵니다.
    그리 강한 쇠도 공기 중에 노출되면 녹슬고,
    육신도 시간의 세례를 받으며 점차 허물어져 갑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래서 간절히 영생을 구하고 있으리오나,
    진시황과 같은 절대권력자도 불로초를 구하려 그리 애를 썼으나,
    서복(徐福)에게 잔뜩 농락 당하고는 종내 실패하고 말았음을 저들은 알고나 있을까요?
    아니 그러하기에 왕보다 더욱 강력한 슈퍼 파워인 신과 직접 교섭하여,
    불로초를 구하려 하고 있음임입니다.

    갈 감나무에 달린 홍시가 붉힘으로서 온 가을을 맞이하여, 문득 가을과 一體가 되듯,
    새 색시는 제 낭군 앞에서 얼굴을 발갛게 물들임으로써 온 하늘을 모셔, 순간 一心이 됩니다.

    홍시나 색시나,
    바로 그 순간 영원으로 나아갑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죽어서 영생할 것을 기약합니다만,
    저들은 오늘 수줍음으로써 바로 영원을 살아갑니다.

    연지 곤지 찍는 사연은 부끄러움에 있는 것인데,
    만약 저것이 연출이 되면 부끄러움은 증발되고,
    다만 시끌벅적한 놀이로 전락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부끄러움과 놀이가 과연 한곳에서 병립할 수 있는 가치인가?
    이 부분을 좀더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남아,
    부끄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베트남 여인이기에,
    슬기롭게 그 이 둘을 아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분들의 부끄러움을 소중하게 지켜주시길 빕니다.

  8. 은유시인 2013.05.07 21:19 PERM. MOD/DEL REPLY

    요즘은 카카오스토리에 문학작품을 열나게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부터
    올리는 글마다 승인반려가 옵니다.
    내용이 19금이라서 그렇다는군요.
    아!
    문학작품에서 성적인 대화를 모조리 삭제하면 뭐가 남지요?
    도덕책도 아니고....

    사용자 bongta 2013.05.08 02:02 신고 PERM MOD/DEL

    제가 명색이 공학도인데 저는 카카오니 하는 것을 아직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저녁에 컴퓨터 잠깐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 눈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네들은 온통 벗은 연예인들로 대문을 도배를 하다시피 하면서,
    순수문학 작품을 저리 검열하려들다니 처사가 사뭇 단작스럽군요.

    도대체가 나가려하여도 세상이 아직 어둡고 몽매하고,
    앞서 빛을 던져 세상을 밝히려 하여도 장막이 어른거리며 덮여 있습니다.

    하지만, 물러서지 마십시오.
    세상의 섣부른 헤살 치는 짓은 개인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굳굳하게 제 길을 갈 때라서야,
    내가 나를 구원, 아니 바르게 짓는 것일 뿐이니까요.

    은유시인 선생님의 글은 제가 겪은 바로는,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순수 열정이 녹아 있습니다.

    이 열정을 잃지 않고 담그고, 벼리면,
    마치 서라벌 어느 여인네의 그 간절한 소망처럼,
    천년세 아름다운 소리를 이어갈 것이란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봉타는 밭 언덕 위에 서면,
    가끔 그런 소망을 영글리며,
    바람 따라 소지(燒紙)를 올리곤 합니다.

    친구 봉타 올림.



  9. 은유시인 2013.05.09 09:38 PERM. MOD/DEL REPLY

    봉타 선생님!
    격려 감사합니다.

    제가 글을 써온지 10년이 조금 더 지났습니다.
    물론 글을 썼다가 말았다가를 되풀이 하면서 지나온 세월이지요.
    글을 쓸 땐 폭풍처럼 썼다가 안 쓸 땐 몇 년이고 글 한 줄 못 쓴답니다.
    한때는 대단한 작가, 유명한 작가가 되리란 희망에 잠조차 설쳤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점점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이문열, 황석영, 조정래 씨 등 제가 닮고자 하는 작가들의 실력은
    저로서는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겠고,
    그 외에 저보다 못한 작가라도 유명세를 날리는 작가들 또한 따라잡을 방법이 없답니다.
    써놓은 글들이 많아도 누군가가 읽어줄 사람이 없다면
    그 글을 쓰는 동안 허비했을 시간과 정력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제가 갑자기 준비도 없이 세상을 더나게 된다면
    그동안 써온 글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통장에 몇 푼 남은 돈은 그 누군가가 쓰면서 고맙다는 소리라도 주절거려주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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