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private distance(個人距離)

소요유 : 2008. 2. 22. 21:12


private distance를 우리말로 바꿔보자니
적당한 말을 찾기 어려워 그냥 사용하도록 합니다만,
한자로 하면 이게 개인거리(個人距離), 개체거리(個體距離) 또는
사적거리(私的距離)쯤으로 처리하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이게 무엇이냐 하면, 너와 나 사이에 거리가 있다란 말입니다.
너와 나를 인간으로 한정해도 되지만, 굳이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닙니다.
동물, 식물은 물론 사물 사이에도 개체간(個體間)에는
떨어져 유지되는 私的인 거리(距離)가 있습니다.

그저 거리라고 하기보다는 상거(相距)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것입니다.
풀이하자면 개체와 개체 상호간의 떨어짐이니,
이 말뜻에는 거리를 의식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개체들,
그 존재가 부각되고 있기에 보다 적합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처음으로 농사라고 감히 말하기도 부끄러운 농사를 지었습니다만,
콩을 심는데, 간격을 어찌할까 잘 몰라, 인터넷을 살펴보니,
사방 15cm 간격으로 심으라는 곳도 있고, 어떤 곳은 40-50cm,
혹은 두뼘 간격으로 심어라 이리 지도하고 있더군요.

이게 콩 종류에 따라도 조금씩 차이가 나고,
땅의 비옥도 등에 따라서도 차이가 나는 등,
기준을 정하기 어려워 나름대로 짐작하고 심었습니다.

심고 나니 어떤 것은 너무 밭이 심었고, 어떤 곳은 널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에 따라 작황이 차이가 나더군요.
아마도 그들 콩은 저희들끼리 가까이 해도 성장에 무리가 따르지 않는
최소한의 격(隔)한 거리가 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제가 지금 끄집어낸 private distance란 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개체와 개체 사이에 상대를 해(害)하지 않는 최소한의 安全 유지 거리를 말합니다.
여기서 안전이란 말을 영어로 한다면 safe 또는 peace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위험, 위협을 걱정하는 않아도 되는 이격(離隔),
공포로부터의 자유 등이 확보되는 최소한의 상거(相距).

만약 농부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콩들을 이 최소한의 거리,
즉 private distance를 어겨 더 가까이 심는다면,
개체는 충분한 생육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사물도 매한가지입니다.
자동차의 브레이크 디스크와 패드와의 사이도 적당한 유격이 필요하며,
엔진밸브 간극도 적당히 유지되어야 제 기능을 발휘합니다.
사물과 인간사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컴퓨터 모니터와 인간의 눈 사이는 30-40cm 인가요
이 정도 떨어져야 좋다고 합니다.

private distance가 동물 차원에 이르면 아주 섬세하며 미묘한 문제가 야기됩니다.
거리라고 하면 물리적인 떨어진 정도를 말하고 있습니다만,
동물 레벨에 이르르면,
이런 공간적인 거리 외에도 시간적인 거리, 심리적인 거리도 고려하여야 합니다.
이 후자들은 상대적이며, 가변적입니다.
예컨대, 시간거리로 표현한 “5분 거리”는,
이게 물리적으로는 사람에 따라 300m일 수도 있고, 400m일 수도 있지요.
심리적으로도 상황과 사람에 따라 1m가 되기도 하고 1000km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동물의 private distance는 복잡하고, 동태적이며, 개체적 차이가 큽니다.

동물의 경우 개체간에 일정 거리이상 떨어져 있지 않으면, 서로 다투게 됩니다.
흥부네 초가는 그리하여 스물다섯 아이들끼리 노상 싸움박질로 하루 해가 다 갑니다.

동물들을 좁은 공간에 집단으로 사육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대단히 공격적이 됩니다.
동물工場주들은 그저 최대한의 이익을 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닭 부리를 자르고, 돼지 꼬리, 이빨을 자르며,
이도 부족하여 필연으로 나타날 공격성향을 줄이기 위한 호르몬 처방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동물공장주들의 꿈의 목표는 저들 동물 private distance를
영화(零化)하는 것일 것입니다.
zero private distance를 향한 저 악랄한 욕망이 버려지지 않는 한,
광우병, 구제역, 조류독감이란 동물들의 인간을 향한 슬픈 저항 의례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라면, 한시라도 떨어져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요즘은 한국사회에서도 지하철 같은 데 보면 남녀가 둘이 들러붙어 접문(接吻)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목격합니다.
이 때의 private distance는 averaged zero입니다.
가슴과 가슴의 private distance는 fixed zero지만,
양설첨(兩舌尖)은 구순(口脣)을 경계로 active하게 plus, minus를 넘나들며
zero 경계에서 달디단 꿈의 묘기를 현란하게 연출합니다.

이 수준을 넘어,
눈에 꽃이 피고,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 眼花耳熱
둘만의 은밀한 공간에 이르게 되고, 이내 교접(交接)까지 하게 된다면,
그 때의 private distance는 minus가 됩니다.
개체 안으로 개체가 함입(陷入)되는 열락의 경지.

그러므로 사랑이란 private distance를 陰으로 하려는 개체들의 기도(企圖)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그 시도가 영원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체들간 사랑의 밀도가 아무리 꿀처럼 진하더라도,
그들은 영원히 은밀한 공간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다시 거리로 나와 각자는 찢어져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private distance는 햇빛을 쪼이는 순간, 종내 plus로 되돌아옵니다.
저는 이것을 private distance의 solariz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개체의 운명입니다. 아니 운명이라는 말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운명이라면 가끔은 비극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저 속성(attribute)이라고 하는 것이 담담하니 편안합니다.

때문에 private distance는 日常 plus입니다.
개체는 도리없이 남과 떨어진 몸뚱아리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하니, 외려 거기에 익숙해진 것일까요 ?
아니면 외부의 자극,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 때문인가요 ?

private distance만큼의 크기를 빌어, 갑각류의 단단한 껍질처럼
자신을 지켜나가려 하는 안전의 의지,
그 청청한 독립된 개체 정신이 읽히웁니다.

이게 때로는 개체와 개체간의 투쟁과 갈등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만,
당당한 자존, 순결한 고독의 형식이기도 합니다.
이 자존, 고독에 충실할 때라야,
타자를 향해 비굴하지 않은,
종내 아름다운 사랑을 일구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즉 개체 사방사유상하(四方四維上下)의 private distance 相距는
자존이 영그는 동그라미이자,
고독이 익어가는 존재의 술항아리입니다.

***

얼마전 등산할 때의 일입니다.
등산 길을 조금 빗긴, 계곡 건너에 외부와 알맞게 격리된 너럭바위,
거기 앉아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몇 년전만 하여도 아주 조용하고 인적이 거의 없던 곳인데,
해가 갈수록 이곳까지 사람이 조금씩 밀려들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그 계곡변에 화투치고, 담배피고,
떠드는 이들이 많아 거의 외면하고 다녔습니다만,
날씨가 쌀쌀해지자 오래간만에 다시 저에게도 잠깐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모처럼 호젓하니 자연과 벗하며, 독서 삼매에 빠져 들고 있던 차,
젊은 부부가 계곡을 건너, 제가 앉은 너럭바위 곁을 바로 다가옵니다.

“야 여기 참 좋다.”
“정말, 우리 여름에 이리 와서 놀다가면 아주 좋겠다.”
“어머, 물이 참 깨끗하다....”
“고기는 살지 않는 것 같으네.”
“어 이것 봐 이리 넓은 터가 여기 숨어 있네, 저 위로 가는 길도 있어.”

“저 위로 올라가 보자...”

"......."

저만이 아닌 누구나 함께 누려야 할 자연이지만,
솔직히 놀다간다는 말만 들어도 긴장하게 됩니다.
그 계곡은 제가 틈틈이 내려가 쓰레기도 줍고, 살피고 다니는 곳이지만,
이즈음에는 하도 소란 피우는 객이 많아 여름에는 아예 앉아 쉬지 않고 지나치는 곳입니다.
그런데, 한 떼들이 놀다간 다음에 가보면 반수는 이것저것 쓰레기를 흘리고 가곤합니다.
이젠 슬그머니 버리고 간 쓰레기는 아예 그려러니 하고, 화도 나지 않습니다.
이용하지도 않으면서 때마다 깨끗이 치워놓은 자리,
거기서 놀다간다라는 말을 들으면 걱정이 먼저 서립니다.

등산길로부터 동 떨어진 곳에 책을 읽고 있는 곁에 와서
한참 큰 소리로 떠들고 가는 몰염치에 슬그머니 기분이 언짢아집니다.
책을 들고 있다는 것은 곧 그가 private distance라 불리우는 사적 경계 영역내에
홀로 잠겨 있다라는 외적 표상(表象)입니다.
이 때 의식이 있는 개체라면, 자연 상대의 private distance를 피해가게 마련입니다.

동물들도 오줌 등의 분비물로 경계역이 표시되면, 그 영역을 존중하여 피해갑니다.
만약 그 경계역 안으로 들어왔다면,
그것은 상대를 능멸하여, 그 자리를 빼앗으려고 작정한 경우입니다.
이러한 때는 양자간에 필연코 전쟁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려서부터 private distance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웁니다.
이것을 에티켓이라고 부르든, 예절이라고 부르든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동물들도 제풀로 아는 것을, 평생 훈련한 사람들이 모를 수는 없습니다.
최소 남한테 폐를 끼치지는 말아야 합니다.

private distance가 
오작교 양쪽으로 나뉘어 찢긴 실연(失戀)의 상처일까요 ?
그 때의 그것이 잃어버린 사랑일지언정 공적인 것이 아닙니다.
떨어진 거리만큼 극복하고 싶은 사적 아픔의 흔적일 테지만,
그 사랑의 상대가 아닌, 외부 사람한테는 여전히 유효한 경계의 장치입니다.
때문에, 함부로 타자의 private distance안으로 들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

악수란 private distance를 의식하며,
신체의 지극히 일부인 손만을 무장해제시키며,
너와 나를 거래하는 의식입니다.
얼굴로는 웃음을 짓지만,
가슴속엔 무엇이 졸졸 흐르고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

역린(逆鱗)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편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용과 친하게 되면, 용을 부려 함께 놀 수도 있지만,
잘못하여 턱밑에 거꾸로 난 길이 한 자의 비늘, 즉 역린(逆鱗)을 건드리게 되면,
오히려 죽임을 당한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이게 임금을 상징하여 제 아무리 임금의 총애를 받더라도,
어느 순간 그의 노여움을 사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다는 경계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게 임금한테만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 역시 저마다의 역린을 가슴속에 심어놓고 삽니다.
그 역린이 뻗친 거리인즉 private distance라 불리웁니다.

조금 친해졌다고,
어깨를 툭치며 친근감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쳐 역린이 건드려졌다는 사실을 감지할 틈도 주지 않고,
내 private distance 영역 안으로 전격 들어와 혼을 빼놓습니다.
그 자는 한껏 웃음 짓고, 바로 양 손을 벌리며,
“나는 너의 친구야”라는 듯 제스쳐를 취합니다.
“나는 너의 private distance 안으로 이리 스스럼없이 들어올 정도로
아무런 적의가 없어, 이 정도라면 나를 인정해 줄 수도 있지 않겠니 ?”
아, 이 넉살 좋은 자신감이라니...
이 때 어떨 결에 그가 나를 해할 사람이 아니라고 느껴지면 이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덜 익었을 때는 무례한 짓거리가 되며, 바로 노여움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한비자는 이를 세난(說難)이라고 편명을 붙였던 것입니다.
지극히 어려운 바, private distance를 두고 벌어지는 인간간의 거래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제일 으뜸의 난사(難事) 중에 난사가 아닌가 합니다.

*

지하철을 타면, 곁곁이 끼어 서거나, 앉습니다.
이 때, 불가불 private distance는 통조림캔처럼 압축되어 버립니다.
이 강제된 압축공간에서 사람들은 모두 하나 같이
영화에서 만나는 인디언 추장처럼 지극히 무표정한, 아니 그래서 더 근엄한 얼굴들이 됩니다.

하지만, 마치 휴화산 밑의 용암처럼,
그 가죽 가면 속으로는 용서치 못할 분노의 아우성과 헐떡거리는 거친 소리가 흐릅니다.
침해받은 자유,
해제된 무장,
서민들은 서로가 서로의 창살없는 감옥이 되며, 이리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런 훈련을 10년, 20년, 30년 하게 되면 무엇이 될까요 ?

곰이 될까요 ?
여우가 될까요 ?

인디언 얼굴은
오늘 아메리카가 아닌 서울 지하철역에 가면 수없이 만났을 수 있습니다.
실인즉, 그대뿐만이 아니라 들어선 내가 곧 인디언 추장이 되고 마는 것이지만.

곱게 물든 단풍닢을 한 자루 가득 담아,
지하철 통로 위로 곱게 흩뿌려주고 싶습니다.
그들 머리에, 어깨에, 입가에 단풍닢이 하나씩 내려 앉으며
가을 미소가 피워나는 꿈을 꿔봅니다.

***

사람과 사람의 낯선 만남에는 설레임과 기대가 교차합니다.
때문에 상대를 알고 싶은 욕구가 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private distance를 알고 있다면,
상대를 얼마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네 고향은 어디냐 ?”

“학교는 어디 나왔는가 ?”

“어디에 사는가 ?”

“집식구는 몇이냐 ?”

“나이는 어떻게 되느냐 ?”

“부자냐 ? 가난하냐 ?”

“네 집 숟가락 갯수는 몇 개냐 ?”

“.......”

끊임없는 질문이 항아리의 물이 넘치듯 흘러내립니다.
이게 도를 넘어 얼핏 상대의 private distance까지 침범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관찰하면 이게 기실은 상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정작은 이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는 욕심의 변용일 때도 적지 않습니다.
중심이 자기가 아니라,
상대를 통해,
비교교량(比較較量)하므로서야
비로소 안심하고 마는 나약함이라니.

그러한즉,
만남에는 최소 private distance만한 크기의 절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상대가 말하기 전까지는 기다려 주는 유보,
그,

“기다림”,
“don't care”,
“공란”의 미학.

private distance는 그를 예비하기 위한 마지막 안전변(安全瓣)인가 합니다.

***

private distance는

부자지간에도,
부부지간에도
애인간에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실은 친밀한 사이일수록
상대의 private distance를 멀리 떨어져 지켜 줄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고독은 곧 사랑의 원천이며,
사랑은 고독의 완성이 아닌가 합니다.

그저 떠오르는 상념들을 채 정리도 못하고,
서툰 며느리 그릇 기명(器皿) 엎어치듯 
주르룩 어질러 놓고 말았습니다.

계절 탓일까 ?
non plus distance
고독, 그녀에게 그리 안기고 싶다.

아름다운 오늘, 이리 함께 소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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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금빛 2008.04.05 00:50 PERM. MOD/DEL REPLY

    사적보장 이나 개인 인권의 존중이 시작되면서 어쩌면 가장 우리나라 답지 못하게 변한 부분이 '지적질' 같다는 생각입니다.
    남의 잘못을 지적했다가는 '왠 참견이냐' 라는 소리를 듣기 쉬운 외국의 상황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게 된거죠.
    하지만 남에 대한 배려가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적보장은 오히려 '배려' 가 부족한 사회를 만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조금 더 전체가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 사용자 bongta 2008.04.06 12:29 신고 PERM. MOD/DEL REPLY

    그런 생각도 가능하겠군요.

    하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사적보장이 곧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사적보장이 전제되지 않은 배려란 참견이 되고, 간섭이 됩니다.
    환언하면, '절제'란 반성적성찰로 걸러지지 않는 한,
    그게 관심이 되었든, 염려가 되었든 그 어떠한 외피를 둘렀다한들,
    그를 배려라고 부를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한즉, 배려에는 적극적, 소극적 양방향의 두가지 형식이 있다고 하겠군요.
    포지티브한 행동으로 남을 돕거나, 네거티브한 행위 양식 즉 절제로
    상대를 살펴주는 것 말입니다.
    외양으로 나타난 방향은 다르지만, 속살로 헤집어 보면 내내 지향하는 바는
    굳이 다를 바 없다는 생각입니다.
    거기엔 남을 존중해주는 의식이 살아 있으니까요.

    private distance를 유지하려는 양식있는 행동은
    남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으려는 긴장된 의식,
    (저는 이를 각성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즉 깨어있는 의식이 작동되어야 가능합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이를 소홀히 하고 있음이 문제가 아닙니까 ?

    저는 지금 우리사회는 배려가 넘친다거나, 모자란다라는 것을 떠나,
    교양내지는 소양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감에 빠지곤 합니다.
    아니, 그들의 운명이 아닌가 ?
    이게 분노를 자아내기도 합니다만,
    곰곰이 생각하면 가여운 노릇이기도 합니다.
    어딘가 바삐 달려가야 하는 사연을 간직한 슬픈 존재들.
    그러하니 남을 생각할 겨를이 없지요.
    그러기에 차라리 이는 분노에 앞서 가여움이 일기도 하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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