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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모르는 사람들

소요유 : 2008.02.23 15:33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

이 글은 시비가 일어났을 때,
'좋은게 좋다라는 식'으로 덮고 말자라고 의견에 대한 반론 성격의 글입니다.

여기 사건 당사자 aaa와 bbb가 있고,
객관자로서 과객이 등장합니다.

상황은,
생판 모르는 aaa가 bbb 집에 와서
아는 척하며 차를 청하고,
bbb는 이를 거절하며 무례하다고 합니다.
후에 aaa는 이를 불쾌히 여기고,
동네방네 bbb를 험담합니다.

이 때, 동네 사람 하나가
그저 무마하고자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덮고자 합니다.
이에 대해 지나던 과객은
덮을 것이라면, 먼저 사단을 벌인 aaa의 사과가 있는 게 마땅하지,
애매하게 봉변을 당한 사람은 억울하지 않는가 하는 차원에서
그를 상대하며 댓거리를 합니다.

이리 짐짓 상황 연출하고,
그 한토막을 잘라 과객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 가보았습니다.
과객의 주요 논착점은 시비석명에선 시간에 대한 고려가 요긴하다는 점입니다.

이는 앞 선글
☞ 2008/02/23 - [소요유] - 황희-일리-삼리 와 짝을 이룹니다.

***

인간은 時.空間 제약적 존재입니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신화가 된다”
이병주는 이리 말했지요.

신화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때문에 신화는 우리 핏줄에 담겨져 달빛처럼 은은히 고여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곧 시간의 흔적입니다.
시간축에 따라 공간의 변천을 먹으로 새겨 기록합니다.
저는 이를 태양의 기록이라 말합니다.

환언하면 시간이 거세된 세계이기에,
우리는 몽환적 은빛 신화, 전설의 세계를 아름답게 거닐거니와,
역사 현실속에서는 창을 갈고 칼을 벼리어,
이성이란 고깔모자를 쓰고
황량한 시대를 방랑합니다.

사건이란 시간축을 따라 전개됩니다.
만약 시간축을 제거해버린다면
우리는 시간축 양단에 있던 공간을
한 주먹에 쥐고 거량하게 됩니다.
이 순간 우리는 곧 신화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시간의 전후가 아니라,
양단의 사건(event)은 제 순수 존재 무게만으로 우리 앞에 서게 됩니다.
만약 이 상태로 양자를 평가하게 되면,
수미관계없이 각자는 자신의 무게대로
제 고유의 존재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참으로 멋진 세계입니다.

저는 이런 현묘한 세계에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모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시.공간 제약적 존재인고로
타자와 더불어 이를 함께 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이 때 우리는 private distance 域內에서 비로소 
제 안위를 돌보게 됩니다.
그러하므로 인생은 곧 지상에 유배된 천사들의
고독한 행진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정당방위”란 무엇입니까 ?

폭력 對 폭력
살인 對 살인

이 양자의 공간행위를
오로지 시간적 전후관계로 규정짓고자 하는 각박한 짓거리입니다.
하지만, 시공간제약적 존재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아주 충실한 노력이기도 합니다.

같은 폭력, 같은 살인이되,
시간의 선후에 따라 양자는 가치를 달리 합니다.
이것이 역사 현실 속의 존재조건인 것입니다.

이 域內에 갇힌 우리들은 그래서 슬픈 존재들입니다.

oo님은 말씀 하십니다.
어울렁 더울렁 다독이며 사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저 역시 그런 세상을 꿈꿉니다.

하지만,
사건(event)이 발생하고,
이를 평가하려면 우리는 만부득 시간축을 따라 거슬러
사물의 이치를 더듬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시간축을 제거하게 되면,
역사공간은 곧 왜곡되어버립니다.

즉 신화공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 신화속에서 우리는 달 보고 떡 찧으며,
어깨동무하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순간 우리는 정당성을 잃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
정당방위에서 후자의 폭력은 구제 받을 길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후자가 전자의 폭력과 同價, 同量의 가치로 평가 받는 게 정당한 것일까요 ?
이 역시 시간축에 갇힌 우리로서는 불편한 환상인 것입니다.

그런즉,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곧 역사적 존재임을 자각하여야 합니다.
그 때 시간의 선후를 따지고,
이치를 좇아 진실을 탐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게 불편하다고,
외면하게 되면 우리는 환상속을 거닐 게 됩니다.
사건 국외자, 각자에겐 참으로 멋진 신세계일 것입니다.
아무런 지불 부담도 없이,
제법 어깨도 으쓱,
뿌듯하니 착한 사람이 된 기분이 됩니다.
신화 세계 속성은 그러합니다.
그를 일러 우리는 신화라 부릅니다.
고백하거니와 저 역시 그런 세계를 동경합니다.

하지만, 사건 당사자 모두도 그런 세계를 수용할까요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건 당사자의 입장을
국외자는 그 누구도 외면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법에선 특히나 이를 보호하려고 심각하게 집중합니다.
그러하니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려면,
국외자 자신도 곧 사건 당사자 자리로 환치되어
사물에 임하여야 합니다.

이 때 우리는 온전히, 바르게 시간을 의식하게 됩니다.
만약 그러하지 않으면,
역사를 바로 쓸 수 없습니다.
저는 죄송합니다만,
이런 분들을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어찌 보면 대단히 편리한 노릇이지요,
시간을 잊는다는 것은 말입니다.
시간을 잊으면 우선은 몽환적인 아름다움 속을 거닐 수 있거든요.
책임질 일도 없고,
제법 관용이란 덕성도 풍부하고,
인간성도 좋고,
이런 제 자신을 발견하는 것만 하여도 아주 황홀해집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이리 물어야 합니다.
내가 그 사건 당사자일지라도 시간이란 족쇄를 벗어버릴 수 있는가 ?

이 물음에 성실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선 양 사건 당사자,
aaa와 bbb뿐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이리 오래 머무르고 있는 것은,
제가 신화를 모르는 팍팍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난 여름 산에서 저는 시집을 끼고 살았습니다.
물소리, 낙엽 구르는 소리, 달 내음을 사랑합니다.
다만, 사건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모두 신화에 집중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여기는 지금 역사현장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뚝뚝 흐르는 현장.

이것이 양 당사자에게 명확히 확인되고 수용되어,
그리 매듭이 지어졌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
그 후에 절구질 하여 떡 내놓고,
막걸리 권하며 한바탕 춤을 춘다면
저 역시 한 자리 축내어 함께 어울리고 싶습니다.

특히 bbb가 즐긴다는 생막걸리 얻어 먹고 싶습니다.
aaa 돌집 앞 양지 바른 언덕에서
주인 내외 분과 함게 茶談을 나누고도 싶습니다.
제가 주말마다 다녔던 곳에선 막걸리가 생이 없더군요.

***

조주스님의 끽다거(喫茶去)가 생각납니다.
그저 “차나 마시고 가거라”

bbb 스님이 차를 청하는 aaa 객승에게
그저 끽다거(喫茶去)하였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로되,
문제는 bbb 스님은 차를 내놓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 선문답은 실은 양 당사자에게 맡겨 두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왜 차를 대접하지 않았을까요 ?
aaa 객승이 근기(根機)가 아니라고 여겨 아예 외면하였던 것일까요 ?
아니면 절 짓고 아직은 법당에 부처를 모셔드리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니, 진속(塵俗)에 허우적 거리는 가여운 중생에 불과한 과객은
이리 세속법대로 잣대를 들이대고
감히 한 말씀 까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스님네들도 가끔은 세속법에 기대어
제들 중살림 시비를 가려달라고
내려오지 않습니까 ?

하니 제 주제 넘은 짓거리가
그리 허망만 하지 않으리란
기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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