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세상의 본질

소요유 : 2013.08.17 08:30


내가 가끔씩 들리는 개인 블로그 하나.
만약 내가 기독교 신자가 된다면 이런 분이 이끄는 교회를 다니고 싶다.
오마이뉴스에도 목사 한 분이 더 계시는데,
이 분 이후, 一位 내가 마음 속에 모시고 있다.

거기 내가 댓글 하나를 달았는데,
이 또한 함께 여기 남겨두고자 한다.

***

http://blog.hani.co.kr/sydneytaxi/

막힌 하수도를 뚫고서
비정규 기독교 2013/08/15 15:31   http://blog.hani.co.kr/sydneytaxi/45461 
호주는 나무가 많아서 주변의 나무 뿌리들이 습기를 따라서 하수도를 찾아가서 작살을 내는 일이 년례 행사로 벌어진다. 그렇게 되면 최소한 200불은 들여서 장비를 갖춘 전문업체를 불러야 한다. 일단 하수도가 막히면 먹고 씻고 싸는 모든 일이 멈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다른 일은 참거나 미룰 수 있어도 화장실을 안 갈 수가 없는 일이다. 몸으로 들어가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밖으로 나오는 것은 참을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다행히 마당이 있어서 흙을 파고 야전식으로 처리를 할 수 있지만 야외에서 볼 일을 보자니 혹시 누구라도 볼까 보아서 몹시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또 볼 일을 마치고 혹시 내가 방금 쏟아낸 오물을 누가 볼까 보아서 황급히 묻었다.

그러면서 들은 생각이다. 몸이 이럴진데 내면의 세계는 어떠할까? 우리 내면에 쌓인 오물들을 밖으로 내 보내지 않으면 어찌될 것인가? 그리고 쏟아낸 내 오물을 보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얼마 전에 페이스 북에서 아는 후배가 있기에 친구 신청을 했더니 “……부끄럽게 살고 있습니다.”라는 매우 인상적인 답이 왔다. 그는 왜 부끄럽다고 했을까? 무엇이 떳떳한 것인지 알 수 있는 사람만이 부끄러움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나와 오랜 세월 함께 일을 했던 고 제정구 선생이 국회의원이 된 후 “국회에 들어가 보니 어떠세요?” 했더니 직설적 화법의 사용을 좋아하는 경상도 사나이답게 “똥구덩이에 앉아 있는 기분이예요.”라고 했다. 앞에서 쓴 후배가 자신의 부끄러움은 알았다면 그는 자신이 깨끗했기 때문에 밖의 부끄러움에도 예민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개인 개인이 모두 신성의 빛을 깨달아 온전함을 되찾으면 세상이 모두 잘된다는 뉴에이지 운동의 소박하고 단순한 논리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이다. 한 마디로 뉴에이지 운동은 대책 없는 자기애에서 출발해서 자기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고 자기 문제만 잘 되면 세상 모든 문제가 잘된다는 지극히 철부지 낙관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고상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중층 복합적인 이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있는 제 1 세계 유한 세력들의 유치한 세계관을 벋어날 수가 없다.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다면 왜 벌써 지상낙원이 안되었겠는가?

일단 기분은 좀 나쁘지만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보기 때문에 회개가 필요 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목적이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기 위함이라니 알고 보면 그렇게 기분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의 일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이런 소리를 하게 된 것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옛날 이스라엘은 '율법'과 '속죄'라는 상과 벌의 두 바퀴로 돌아가는 사회였다. 즉 정기적으로 '제사'라는 형식으로 막힐 듯한 하수도를 청소하는 정화장치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한 때 치밀하게 법으로 상과 벌을 정한 한비자의 법가가 유행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법가에는 영혼을 다루는 '제사'와 같은 정화정치가 없었다. 그러므로 법가의 상벌 기능이 제 아무리 훌륭해도 '제사'처럼 인간의 미묘하기 짝이 없는 내면을 청소하는 정화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잠깐 풍미했을 뿐이다. 만약 법가가 이스라엘처럼 속죄 같은 정화장치와 율법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면 동아시아 역사는 다르게 흘렀으리라.

그렇다면 인간의 내면을 청소하는 장치가 왜 중요한가?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산다고 해서 실제로 살아가는 데 무슨 지장이 있거나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장사를 지냈다고 해서 장례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갖가지 번거로움을 마다 않고 결혼식과 장례식을 반드시 치러야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인간이 사회에 살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전 세계에서 오직 한국에만 있는 예식장처럼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있었고  정기적인 죄 사함을 위한 통과의례로 성전에 올라가서 재물을 바치는 제사 제도가 있었다.

왜냐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나는 죄를 지은 죄인이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도 먹고 살기 힘들어서 교회를 가고 싶어도 못가는 사람이 있듯이 당시에도 생존에 급급해서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겨운 보통 민중들은 사제계급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이 까다로운 규례와 법도를 제대로 지킬 수 없어서 당연히 윤리적인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요즈음의 교회처럼 구태여 부흥회를 열어서 “당신들은 죄인이야. 알갔어?”라고 없는 죄의식을 주입시키지 않아도 ‘나는 회개한 필요한 죄인이다’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제사에는 제물이 따르고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제사장 가문은 제물 때문에 ‘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원래 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이 손에 묻기 마련이 아닌가?
이와 반대로 제사장 집안이기는 했지만 직접 제물을 드리는 제사와 상관이 없는 시골 깡촌의 사제들은 제사 대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하는 방법으로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광야에 은둔해서 공동체생활을 하던 엣센파가 바로 이런 경향을 가진 집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엣센파의 한 사람인 요한이 요단강에 나타나 물로 세례를 주며 죄를 사해주는 신상품을 개발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 되자 제물 중에 가장 작은 제물인 비둘기조차 살만한 돈도 없었던 민중들이 물로 세례를 베푸는 요한을 추종하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세례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장 세력의 제사행위와 구별되는, 요즘으로 말하면 민중 의례적 표현인 셈이다.
돈 안 드는데 좋아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돈 받고 제사 지내주는 제사장 계급에서 볼 때는 요한은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 선달이 아니라 요단강 물을 팔아먹는 사기꾼인 셈이다.
요한 선달은 당시 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서 소외된 민중들에게 제사장 중심의 유대교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셈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카리스마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예수의 등장이 가져오는 파격적인 의미가 있었다. 요한이 물로 죄사함을 주었다면 예수는그야말로  ‘맨 입으로’ 죄사함을 선포했다. 예수는 율법을 지키기 힘겨워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가까히 할 수 있도록 마치 베를린 장벽을 허문 것처럼 장벽을 무너뜨려 준 것이다. 예수는 죄 사함의 근거를 제사나 세례라는 밖으로 드러나는 형식 대신 ‘죄 사함의 확신’이라는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믿음에 두었다. 나중에 카톨릭에서 다시 사제가 개입되는 '고해성사'라는 야매 정화정치를 만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자! 이만하면 예수가 왜 유대인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가? 예수의 ‘확신을 통한 죄 사함'은 ‘제사를 통한 죄 사함’이라는 전매특허를 가진 제사장 집단의 철밥통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죽어 없어져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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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2013/08/16 19:46 
  재미있군요. 
물이든, 입이든 현실에 반하는 그 파격성이 과히 드라마틱하군요.

그런데 요즘 한국은 왜 다시 제사장을 불러들이고 그 발밑에 엎드려,
기꺼이 쩐을 받치고 빤쓰를 내려라 하면 내리는 신자들이 늘고 있는 것입니까?

물이나, 입은 싱겁기 때문이 아닐까요?
맹물이라도 쩐이 한번 스쳐가면 믿음이 좀더 짭짤해지고,
입이 아니라 확성기 달아 협박하면 쩐이 더 달려나오고,
신도들 역시 헌금액이 커질수록 내세행 티켓의 보장성이 더 커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요는 신뢰 프로세스로선 물이나, 입은 너무 미덥지 않은 것입니다.
요한이나 예수는 타락의 극점에 나타났기에 맹물이나, 입으로 장사를 멋지게 할 수 있었지만,
지목사 님이나, 여타 다른 목사들은 아직은 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한껏 타락할 때까지.

그 때까지는 지목사 님은 그저 호주에서 택시나 열심히 몰 수밖에.
하지만 택시도 그리 열심히 모는 것 같지도 않더구만,
툭하면 한국에 날라올 핑계나 만들기 바쁘고,
골방에 틀어박혀 기도는 아니하고 밤낮 이런 글질이나 하고 있으니.
아직 타락은 한참 멀다 하겠지요.

 
시드니 에뜨랑제 2013/08/16 20:03 
  폐부를 찌르는 말씀이군요. 세상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반쯤은 세상에서 정신을 버리고 살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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