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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절야(棋者切也)

소요유 : 2015. 4. 11. 23:53


기자절야(棋者切也)


바둑돌들은 우군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안전하다.

그렇다면 적군은 이들을 끊어 고립시키는 것이 득책(得策)일 수 있다. 


만약 같은 편끼리 서로 연결만 되어 있다면 더 이상의 변화가 생길 여지가 없다.

하지만 끊기어 외톨이로 될 때,

거기 긴장이 생기고, 갈등이 때려진다.

헌즉 적을 노리는 이라면 어찌되었든 상대의 무리를 쪼개고 흩어 쫓아 고립시켜야 한다.

이 때라야 변화가 생기고, 기회가 도래한다.


한(漢)의 대사마 망(大司馬莽)을 두고,

여럿 신하들이 그 공덕을 주공(周公)에 비견된다며 진언하였다.

당시 대사마 망에게 호를 내리고, 

태사 공광(太師孔光) 등에게 봉토를 더하였다.

게다가 천하 백성에게 작위를 일급씩 올리고,

2백석 이상의 관리 일체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 때 사고(師古)는 이를 두고 비상한 일이라며 이리 말하였다.


一切者,權時之事,如以刀切物,苟取整齊,不顧長短縱橫,故言一切。


일체(一切)란 권도를 부릴 때 일어나는 일이다.

물건을 칼로 자르듯, 가령 가지런히 취하려한들, 장단, 종횡을 돌보지 않는다.

고로 이를 일체(一切)라 이른다.


현재의 고착된 상황을 흔들어 변화를 구하고자 함인데,

어찌 가지런히 나눠지길 원한다한들 그리 이뤄지길 바랄 수만 있으랴?

다만 잘라 나눠지길 꾀할 뿐, 

그게 길든, 작든 혹은 상하, 좌우 어떤 형식으로 잘리우든 상관치 않는다.

그저 변화만 일어나도 족하리라.


정치로 치자면 무위지치(無爲之治)니 덕치(德治)니 하는 고상한 정치가 아니고,

패도(霸道)를 써서 술수를 마다하고, 세를 불리길 마다하지 않는 모습이 연상된다.

바둑이라면 기리(棋理)를 쫓아 정수(正手)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부르고 비를 불러 반상(盤上)에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키자는 것이라.

이 때라서야 변화가 일어나고 기회가 생긴다.


기회를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끊는 수도 있지만,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끊은 자리엔 변화가 잉태되고, 사건이 생긴다.

기자절야(棋者切也)라 하면,

백이면 백인 모두 다 ‘바둑은 끊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지만,

이게 바둑 세상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매사 무작정 끊음이 능사가 아니다.


기자절야(棋者切也)라는 언명(言明)은 마치,

절야(切也)라는 당위(當爲)가 바둑(棋者)이라는 존재(存在)에서 유출된다는 선언과 같아,

사뭇 엄숙하다.

허나, 존재 여부를 말하기 전에,

이런 직절(直切)한 기리(棋理)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벅찬 애정이 솟는다.

이러할 때 우리는 기예(棋藝)를 넘어 기도(棋道)라 칭한다.

가령 검술(劍術)이라 할 때, 

이리 그저 검의 기술, technique라 이르다가도,

검도(劍道)라 고쳐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 엄숙한 모습 앞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바둑 역시 기도(棋道)라 칭하는 순간,

천 년 돌 속에 숨겨진 비의(祕義)를 찾아,

반상(盤上) 위에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두 낭인(浪人)을 연상하게 된다.

 

다시 돌아와,

‘바둑은 끊어야 한다’라고 할 때, 

이런 언명을 당위(當爲)로만 받아들인다면 다소 위험하다.

그보다는 그 기능 또는, 작용 효과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즉 ’끊으면(끊기면) 변화가 생긴다’라는,

기리(棋理)에 대한 실전적, 실용적 차원의 통찰 역시 필요하다.


이런 입장에 서면,

바둑 두는 인간은 모두 끊어야 한다는 존재론적 도그마에 구속되지 않는다.

내가 필요하면 끊을 수도 있고, 아니면 굳이 그럴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상대가 끊어 올 때, 변화가 일어날 것을 알고 예비할 수 있다.

이런 태도야말로 차분하니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예비 조건이 아니겠음인가?


琴, 棋, 書, 畫

이들은 인류의 4대 예술적 분야이다.


요즘은 바둑 기사조차 바둑은 스포츠 또는 오락의 한 장르로 치부하곤 한다.

내가 우연히 수십 년 만에 바둑 프로를 접하게 되었는데,

거기 해설자로 등장한 어떤 프로 기사 녀석이,

바둑은 멘탈 스포츠라며 한 설(說)을 풀어낸다.

내가 바둑을 아니 둔 지 어언  수 십 성상을 헤아리지만,

그게 단순히 오락이라든가, 스포츠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애시당초 바둑은 오락 이전에 심오한 철리(哲理)가 숨겨져 있음이니,

이리 간단히 오락 따위로 전락시켜도 되는가 하는 데 나는 강한 의문이 있다.

녀석처럼 승부에 집착하고, 순위 경쟁에 몰두하는 이라면,

이외에 더 이상의 가치를 남겨둘 일이 없을 터다.


바둑은 네 가지 중에서 유독 오락적 요소가 강한 것은 일응 인정할지라도,

그와 동시에 자고로 인간지(人間智)의 미적 완결성이, 

예도(禮道)로 구현된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

하여, 재미있게도 바둑과 관련되어선, 허다한 철리(哲理)를 꿰뚫은 명언들이 존재한다.

이런 명언들은 거꾸로 대중들에게 심오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知其用而置得其處者勝,不知其用而置非其處者敗。


두어야 할 곳을 알아, 그곳에 돌을 놓는 이는 이기고,

그를 아지 못하는 이는 지는 법.


허나, 어찌 둘 곳과 아니 둘 곳을 모두 아는 것이 쉬우리.

다만 변화를 구함은 다음 기회를 도모함을 기하기 위함이리라.

기자절야(棋者切也)라 할 때,

이는,


變則通


변한즉 통할 것을 원하고 있음이 아니더냐?

헌데, 변한다 하여 그 결과가 어찌 자신의 원(願)대로 될 것인가?


궁(窮)하면 변(變)하는 것이 자연의 도리이건만,

그를 인위적으로 구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때론, 요행히, 형식이 본질을 규제하고,

기술이 존재를 규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헌즉 궁함에 몰리면,

무엇인가 변화를 구하면,

앞일의 전개를 원망(願望)할 수는 있으리라.

(※ 참고 글 : ☞ 2008/08/06 - [소요유] - 궁즉통(窮則通))


허나, 바둑을 두면서 시도 때도 없이 무작정 끊는다면,

그 결과는 어찌 전개 될 것인가?


窮則變


궁하면 변한다지만,

변함만을 미리 구한다면,

變則通

이로써 통함을 과연 이룰 수 있겠음인가?


弈者舉棋不定,不勝其藕。


바둑을 둘 때 정한 바 없이 대충 두면, 이기기 어렵다.

춘추(春秋) 시대 때 나온 말이다.

아마도 바둑 역사 상 가장 처음 기록된 격언일 것이다. 


기자절야(棋者切也)라고 무작정(無酌定) 끊어서는,

이기기 어려운 것이다.


切,責也。


끊음엔 상대를 나무람일 뿐,

그게 과연 곧고, 방정하니 옳은 일이냐 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切,直。方,義也。


절(切)은 곧으나,

방(方)은 의로움이다.


절은 직절(直切)하니 물어 갈 뿐,

그게 곧 방정하니 의로움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아, 의(義)로움조차 제대로 아지 못하는 이내사,

어찌 방정함을 구하랴?

그저 직(直)하니, 곧은 마음 하나 부여잡고,

세상을 절(切)하며,

돌개바람, 피바람을 일으키며,

달려 나가리니.

이 또한 장부의 호기(浩然之氣)라 과연 이를 수 있을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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