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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처(瞳人)

소요유 : 2015.05.10 17:05


눈부처(瞳人)


여럿이 손을 잡고, 

빙 둘러 앉아 상대의 눈을 보면,

거기 슬픔이 강물 되어 흐른다.

억만 겁 흘러 한곳에 모여 손잡고 앉아 있는,

인연이란 묘(妙)하고, 귀(貴)하다.


상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내가 키우던 강아지들 체리, 버찌, 풀방구리.


녀석들을 안아 올리고 그 천진난만한 눈을 쳐다본다.

아무리 사랑스런 마음으로 저들을 응시하여도,

죄 많고, 더럽혀진 인간 하나의 눈이란 것이 얼마나 흉하랴?

감히 그 소종래를 찾아간들, 

끝간 곳을 몰라 난측막측(難測莫測), 난지막지(難知莫知)하리라. 

내 악기(惡氣)가 저들에게 쏴 나아가니,

잠깐 마주하던 녀석들의 눈은 이내 눅고 만다.

저들 눈에 어리던 눈부처도 찰라 사이에 빛이 바랜다.


눈부처란 무엇인가?

둘이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각자의 눈엔 상대의 모습이 어린다.

이 때 이 상대의 눈에 어린 자기 모습을 쳐다 볼 수 있게 된다.


나의 상(像)이 상대의 눈에 오롯이 새겨지고,

그것은 그대로 상대의 안식(眼識) 체계 내로 전파되어 나간다.

역으로 나는 그의 눈에 비춘 내 상을 취한다.


한편, 내 눈엔 그의 상(像)이 비추고,

그 상은 내 안식(眼識)이란 인식 체계 안으로 들어온다.

또한 상대는 내 눈을 통해 자신의 상을 취할 것이다.


이 상(像)을 눈부처라 이른다.

아름다운 말이다.

내 눈 안에 상대의 부처를 모시고 있다니,

게다가 상대의 눈 안에 내가 깃들고 있음이니,

이 범상치 않은 인연이란 귀하기 짝이 없다.


중중무진(重重無盡)

이런 과정은 광학(光學)적, 물리학적으로만 보아도,

무한으로 중첩되어 되비추며 너와 나의 눈 사이를 전격(電擊) 억만으로 오간다.

마치 만다라(曼陀羅)처럼 꽃비가 되어 온 우주를 침윤(浸潤)해 들어간다.


너와 나의 눈 사이 거리는 짧지만,

서로를 되비추이는 인식의 폭죽, 그 점화식(點火式)은 그 끝이 없으니,

온 온주를 가로질러 가없이 나아간다.

이리 펼쳐진 인식의 인드라망(因陀羅網) 안의 각 망점(網點, node)들은,

또한 인식의 주체이기도 하니, 이를 부처라 부른들 어찌 허물이 있으랴?

헌즉 일찍이 석가는 말하지 않았던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 말씀의 문법은 독선(獨善)이라든가, 아만(我慢)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독(唯獨) 아존(我尊)의 귀함을 적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독존(獨尊) 단독자들의 연기적 관계성이 체현된 세상을 일러 불국토라 한다.

이 때래서야 비로소 대아(大我)라 할 수 있을진대,

한 때 노태우가 부르짖던 보통 사람들의 세상이란 가짜인 게라.

모두는 다 특별한 사람일 때라야,

보편적 세상이 도래한다.

반대로 보통사람들로 채워진 세상은,

특별한 세상이 된다.

이 때 여기서 이르는 특별하다 함은 모두가 멍청하다든가? 

사특(邪慝)하다든가 하는 별난 모습이 되리라.


도대체 나는 저 강아지 녀석들과는 무슨 인연이 있어,

이리 하나로 만나 눈을 마주하고 있는가?


촛불 집회시 우리는 저마다 손에 촛불 하나를 밝힌다.

도대체가 말이다.

눈을 가진 인물들이,

낮에 만나 눈을 직접 마주하지 못하고,

밤거미가 내린 곳에,

기껏 촛불이란 외물에 의지하여 마음을 밝히고 있음이더란 말인가?


내 강아지들과는 시도 때도 없이,

촛불 하나 켜지도 않고 눈부처를 서로 모시지 않았음이던가?


허나, 

오늘날 우리네,

시청 앞엔,

낮에 좌절한 영혼들이 모여,

매양 사무처 울고들 있다.

저들은 눈부처를 모실 수 없는 처지들임이라,

차디 찬 밀납을 태워 따스하니 데우며,

어둠을 밝히울 뿐,

거기 눈부처는 부재(不在)하다.


개별 단자들의 울부짖음,

외부로 투사(投射)된 파편화된 외로움.

어둠 가운데 촛불을 켜 들었을 때, 사람들은 왜 숙연해지는가?

단독자의 외로움, 슬픔이 촛불에 가탁(假託)되어 외재화(外在化)된다.

거기, 외로움은 또렷해지고, 

제 슬픔이 내동댕이쳐진 채,

홀로 떨고 있음을 비로소 목격하게 된다.

이 선연(鮮然)한 아픔을,

자신이 마주하고 있음이다.

어찌 숙연해지지 않을 도리가 있으랴?


허나, 촛불을 켜 한데 모일 때,

외로움이 가시는 것이 아니라,

외려 더 투명하게 수정처럼 얼어 빛난다.

슬픔은 예리한 창으로 찔리듯 심장에 꽂혀 동통(疼痛)을 일으킨다.


저들은 말하길, 

한마음, 한 뜻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다 하지만,

그리고 거기 저런 촛불 제례를 통해 슬픔을 위로하고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소외된 인간들의 자기 확인 과정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갖곤 한다.


촛불이 꺼지고 집에 돌아갈 때,

저마다는 제 슬픔을 다시 안고 돌아가야 한다.

굿 마친 후 흩어진 무당년 앞마당처럼 외로움의 파도는 강물처럼 넘실된다.


花燈百枝,消暗衰微。精光訖盡,奄有灰飛。


꽃등이 가지마다 걸렸으니,

어둠이 쇄미하니 사라져 간다.

빛이 다할 때,

사방으로 덮이듯 재가 날리다.


서양엔 ‘apple of a person's eye’란 표현이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엽다든가 소중한 상태를 뜻한다.

저들은 사랑하는 이를 honey라 지칭하곤 한다.

과연 저들은 맛있다, 달콤하다 따위의 직감적(直感的) 느낌에 충실하구나 싶다.


하지만, 고작 눈에 우겨넣어도 아프지 않을 상징으로서 사과를 떠올리는 이들과

눈에 어린 상(像)을 두고 부처를 읽어내는 이들은 얼마나도 다른가?


전자는 아픔과 달콤함의 극단적 콘트라스트(contrast)를 통해,

감각적 성취를 기도(企圖)할 뿐,

진실된 사랑의 내용은 확인해주지 않는다.

허나, 후자는 중생(衆生)들의 연기적(緣起的) 관계,

그리고 그 실존적 고(苦, 이하 집(集), 멸(滅), 도(道))를,

부처란 함축적 언어로 증언한다.


촛불을 필요로 한다든가, 이에 의지함은 실로 비극적 사태인 것이다.

거기 그 자리 슬픔과 외로움이 현전(現前)하고 있다는 것을 서로는 확인하고,

그리고 그런 이들이 함께 모여 있다는 집합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어느 순간 연대란 이름의 집적된 힘이,

물리적 임계점을 넘어 화학적으로 폭발하기도 한다.

그를 강 건너 저들은 시위, 데모 때로는 폭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쪽은 이를 의거, 혁명이라 언명한다.


그 무엇이 되었든 이 역시 다분히 비극적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부재를 물리력으로 증명하고 있음이니,

그 업의 성공과 실패를 불문하고,

이 사태가 어찌 슬프지 않은가?


大樹百根,比與山連。


무릇 큰 나무는 수많은 뿌리를 두고 있다.

마치 산이 더불어 연이어 있듯. 

연대(連帶)란,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것.

호형호제(呼兄呼弟),

앞서거니 뒤서며 혼란스런 세상을 나아간다.

촛불은 바람에 출렁 출렁일 때마다 점두(點頭)하며,

과연 그러하구나 하며 밤을 울어 옌다.


中夜狗吠,盜在廬外。神光佐助,消散歸去。


한밤에 개가 짖으니,

도적은 오두막 바깥에 있다.

신명이 보우(保佑)하사,

흩어져 돌아들 가다.


난, 촛불 모임에 모인 분들을 폄훼(貶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저들이 처한 비극적 한계상황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외려, 저들에게 가해진 그 역사적 질곡, 정치적 폭압을 슬퍼하고, 분노한다.

난, 이들 아픈 이들을 눈 속의 부처로 기억한다.


모든 이들이 눈에 부처를, 또는 예수를 모실 수 있을까?

그날을 기대하거나 예비하는 것은 무망한 짓일까?

외물인 촛불에나 기대어야 서로를 구인(拘引)할 수 있다면,

그곳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 있는 것이 아닌가?

사뭇 가엽다.


다신 움 틔지 않을 마른 목불(木佛)이나,

십자가에 기대는 중생들의 가여운 모습이나 무엇이 다른가?

하기에 단하천연(丹霞天然)은 木佛像을 도끼로 패서,

기껏 어한(禦寒)의 용처(用處)로 삼을 뿐이었다.


아, 가여운 저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며 촛불을 들게 한 이들을 어찌 할 것인가?


동네에 파지를 줍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시다.

최근 고약한 이웃 할머니에게 시달림을 당하였다.

게다가 그 집 아들은 양아치인데, 그 녀석에게도 협박을 당하였다 한다.


‘합기도를 배워 혼을 내주겠다.’


아, 할머니의 슬픔이 아프다.


남을 혼내기 위해 합기도를 배워야 하는 세상은 얼마나 아픈가?

촛불을 앞에 켜들고 세상을 향해 고함을 치는 세상은 얼마나 슬픈가?


저마다의 눈 속엔 부처가 계시며,

저마다의 가슴 속엔 예수가 계시다.


누구라도 이 도리를 알게 되면,

눈치 볼 것 없이 목불상을 도끼로 뽀개는 단하천연이 되리라.


눈부처는 한자로는 瞳子, 瞳人, 瞳仁 등으로 쓴다.


동자(瞳子)는 눈동자이니 눈알의 가운데 까만 부분을 이른다.

헌즉 눈부처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리 칭하는 물리적 개소(個所)를 가리킨다.


동인(瞳人)은 눈부처에 거지반 합치(合致)한다.

눈동자 안에 깃든 사람이니,

실유불성(悉有佛性)인 게라, 

이를 부처로 환치한들 무리가 없다.


“瞳人之大小隨黃仁之展縮,黃仁展則瞳人小,黃仁縮則瞳人大。” - 銀海精微


동인(瞳人)의 대소 크기는 황인(黃仁)의 확장, 수축에 따른다. 

황인이 커지면 동인이 작아지며,

황인이 수축하면 동인이 커진다.


(※ 黃仁,解剖名。出《銀海精微》。又名眼帘、睛簾、虹彩。即今之虹膜,位於黑睛後內。其色因人種而異,我國多為黑褐色。黃仁中央有約2.5-4毫米大小之圓形洞孔,名瞳神。黃仁內應於肝,肝膽相表裡,故病變常與肝膽有關。)


동인(瞳仁)은 역시 눈동자를 가리키는데,

여기서 인(仁)은 본디 과일 씨 또는 과일 껍질 속의 속살을 뜻한다.

가령, 과인(果仁)은 열매의 과핵(果核, kernel of fruit)으로서,

예컨대 瓜子仁, 杏仁은 각각 오이씨(속살), 살구씨(속살)을 뜻한다.

따라서 통상 속칭 눈알(眼珠) 중 가운데 핵심 부분을 가리키는데,

홍막(虹膜) 가운데 조그마한 구멍 즉 동공(瞳孔)을 통해 빛이 눈 안으로 들어간다.

인(仁)이라 함은 그 가운데 핵심 부분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仁)은, 파자(破字)해보면 사람 둘을 가리키니,

상호 눈 속에 비추고, 비추이는 양인을 함께 의식하고 있는 조어(造語)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동인(瞳人)보다는 사물 간의 관계성을 더욱 끽긴(喫緊)하니 조명하고 있다 하겠다.


여담이지만,

중용(中庸)에선 仁者,人也。

맹자(孟子)에선 仁也者,人也。라 하였음이니,

이들에게 仁은 人의 본질적인 조건이자 그 외표(外表)이기도 하다.


仁者人也,親親為大

이리 유학에선 친친을 크게 여긴다 하였음이니,

사람을 사랑하는데 친소에 따라 차별을 둔다.

이는 묵가라든가, 기독교, 불교의 사람 일반에 대한 무차별적 태도와는 다르다.

때문에 유가에선 禮所生也 예가 발생한다.


이리 볼 때,

동인(瞳人)은 유가적 표현임이나,

눈부처는 불교나 묵가에 가깝다 하겠다.

내 이를 동불(瞳佛)로 이름 붙여본다.


동인(瞳人)은 사람 간에도 차서를 두어 예를 차리며 차별하는 세상을 예비한다.

허나 동불(瞳佛)은 사람 간은 물론 동물, 식물, ...

모든 중생(衆生)에게 까지 자비(慈悲)로 대하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어제 주택가 사이 뒷켠 좁다란 공간에 아기 고양이가 떨어져 종일 울어대었다.

아마도 최근 세상에 나온 고양이 새끼이리라.

처의 염려를 무지르며 공연히 아는 척하다,

동티가 날 수 있으니 내버려 두라 이르다.

나중 인연 따라 마주치면,

그 때 조처할 일이라 하였다.

헌데 녀석이 창문을 발로 두드리며 야단이다.

처의 해석에 따르면 구조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야밤에 전등을 들고 살펴보다.

처의 말대로 좁은 공간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둘이 협동하여 잡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다.

녀석을 들어 올릴 때,

녀석의 눈에도, 처의 눈에도 동불(瞳佛)이 나타났으리라.

내 눈은 한참 더러움으로 흐려져 있을 터이니,

동불(瞳佛)은 온데간데없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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