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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布敎)

소요유 : 2015. 6. 18. 23:19


포교(布敎)


포교라 함은 말 그대로 가르침을 편다는 뜻이다.

그 가르침의 주인 즉 교주(敎主)가 가르치신 말씀을 널리 알려 펴는 일이다.

포교란 말은 불교도들이 주로 쓰는 말이로되,

기독교도들은 흔히 전도(傳道)란 말을 쓴다.


내가 시골에 와서 가만히 관찰해보건대,

여호와의 증인만큼 전도활동에 전념하는 이들이 없다.

비바람이 부나, 눈, 비가 내려도 여일(如一)하게,

동네를 순력(巡歷)한다.

도를 알리고, 가르침을 전하는데,

저리 정성을 다하여 갈심진력(竭心盡力)하고 있음이니,

저 절절한 간구(懇求)의 모용(貌容)이 여간 심상(尋常)치 않아 보인다. 


둔세(遁世)내지는 초세(超世)를 향한 저 달뜬 열정이라니.

들녘에 종일 지피어져 떠오르는 저 절절한 정경에 아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동구마다 저녁 때 밥 짓는 연기가 지피어져 오르는 듯,

나는 심상(心象) 속에 그 아련하니 번지는,

저들 영혼의 번제(燔祭) 보랏빛 연기 그 자연(紫煙) 속에 잠긴다.


헌데, 의문이 드는 바 하나가 있음이니,

저분들의 간절한 독행(篤行)이란,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있는가?

아니면 이러한 전도의 행업(行業)으로써,

차후를 도모하고자 하는 증표를 하늘나라 표석(標石)에 남겨 새기기 위함에 있음인가?

즉 천국행을 예비하기 위하여 그 실적을 쌓는데 열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회의가 들곤 하는 것이다.

노적가리를 하늘나라에 쌓아놓고자 함이나,

정작은 살고 있는 이 땅의 노역(勞役)에 종사하는 게,

땅에 사는 사람의 도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음인가?  


그런데, 기실 가르침을 전한다는 일조차 나는 일정분 회의(懷疑)를 한다. 

물론 그 누군가가 있어 가르침을 펴는 이가 필요할지라도,

가르침의 내용을 실천하는데 소홀히 하고,

애오라지 가르침 전도에 일로매진(一路邁進)함이 마땅한 도리인가?

나는 이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포교(布敎)나 전도(傳道)에 앞서,

그 가르침 내용의 실천행인 행덕(行德)이 없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 하는 것이다.


仲尼,天下聖人也,

修行明道以遊海內,海內說其仁,美其義,而為服役者七十人,蓋貴仁者寡,能義者難也。


공자는 천하의 성인이다.

행을 닦고, 도를 밝혀, 천하를 돌아다녔다.

천하가 그 인(仁)을 좋아하고,

그 의(義)를 찬미하였으나,

이를 섬기고 따르는 이는 일흔이었다.

대개 인을 귀히 여기는 자는 드물고,

의를 행하는 자는 찾기 어렵다.(의를 행하긴 어렵다.)


귀인(貴仁), 능의(能義)가 따르지 않는다?

수행(修行) 즉 고심참담, 시행착오를 거치며,

가르침의 내용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도대체가 공자의 가르침이 아무리 높고, 중하다한들,

모두 다 하늘 위를 정처 없이 떠도는 조각구름과 같이 허랑스럽지 않으랴?


수행(修行)이 없는 포교, 전도란,

현실에서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게 겨운 이들이,

열심인 양 외양(外樣)을 꾸며 차리며 제 양심을 감추려 함이 아니어든가?


우리네 속담에 이르길,

중이 염불엔 뜻이 없고 잿밥에 마음을 둔다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이런 중이야말로 절집의 도적이요, 

신도들의 신심을 훔치는 강도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살아 수행은 등한히 하면서,

죽어 하늘나라로 가길 꿈꿔,

애오라지 포교나 전도합네 하며 떼로 몰려다니면서,

모양내기에 분주하다면,

이야말로 가르침에 어긋나는 삿된 짓이라 할 것이다.


보험(保險)들 듯,

복표(福票)를 사 듯.


본말(本末)이 전도(轉倒)되고,

내용과 실천을 표상(表象)과 선전(宣傳)으로,

엿 바꿔 먹는 짓거리라 할 터이다.


종교생활이라는 것이 이렇듯,

종교적 체험이나 깨달음의 성취가 아닌,

자리(自利) 중심이 되는 바,

소위 기복(祈福)으로 흐르게 될 위험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포교(布敎)보다,

포덕(布德)이 우선(優先) 실천적 요목(要目)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덕(行德)이 부재한 상태에서,

바른 전교(傳敎)가 담보될 수 있는가?

이는 수미(首尾) 상관 논리적으로도 사뭇 의심스럽다.


물론 자신이 겪은 체험이나, 깨달음의 성취를 남에게 전달하기 위해, 

포교나 전도에 나선 이도 있을 것이다.

소위 입전수수(入廛垂手)라,

저잣거리에 나가 홍진(紅塵) 가운데 하화중생(下化衆生)한다.

사도 바울 역시 영적 체험을 하고서는 평생 전도행에 나선다.

이런 이들의 행교(行敎)는 물론 앞선 내용의 차한(此限)에 부재(不在)하다.


헌즉, 포교든, 전도든 이를 주도하는 이,

즉 포교사, 전도사 등은 펴고 전하는 일에 앞서,

자신의 행덕(行德)이 과연 가르침에 따라,

그 경계 가까이 머물고 있는가 자문하여야 할 것이다.


최근 이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의문 하나가 문득 떠오르는 바,

이리 적기(摘記)해보는 것이다.


교리를 탐구하는 공부 모임에 끼든,

새벽녘 어둠을 가르며 깊은 산사에 올라 불공을 드리든,

정작 일상에선 행(行)과 덕(德)이 따르지 못한다면,

저게 다 부질없는 짓거리가 아니런가?


그저 취미생활에 다름 아니며,

제집 복을 구하는 祈福 행위요,

무당년 앞마당에 제물 쌓아두고 재수굿 올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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