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天下知之者少

소요유 : 2015. 11. 20. 16:59


동네에 골목 하나가 있다.

좁다란 그곳엔 종일 연기가 피어오른다.

사내, 계집 가리지 않고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기 때문이다.

거기로 면(面)한 주택 하나가 연신 상을 찡그리고 있다.

급기야 담벼락에 안내문이 붙는다.


‘금연구역이 아니라도 금연은 상식입니다.’


내가 곁을 지나면서 피식 웃고 만다.

저것은 이리 이르고 있음이 아니더냐?


‘이곳은 본디 금연구역이 아닙니다.’


전제가 이러한데,

저 불한당들로부터 어찌 양보를 받아낼 수 있겠음인가?


본디 거무칙칙하던 시멘트 바닥 길은,

언제나 꽁초로 하얗게 덮여 있다.


그러자 어느 날인가,

커다랗게 플래카드가 걸린다.


‘여기는 금연구역입니다.

위반 시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oo 구청’


급기야 구청의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리라.


그런데 이 이후 과연 골목길이 깨끗하여졌을까?

불문가지(不問可知)일 터.

굳이 물을 일이 있으랴?


예전 모퉁이 후미진 곳에 소변을 금하기 위해,

자지와 가위를 함께 그려 붙여도 여전히 그 자리에 소변을 보지 않았던가?

담배 든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은들 흡연하는 짓을 막을 수 있으랴?


民可使由之,不可使知之。

(論語)


“백성은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알게 할 수는 없느니.“


여기 由자는 여러 뜻을 갖고 있는데,

순수(順隨)나 종(從)으로 새기면 좋을 것이다.


내가 오늘 아침 처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어찌 하다 처가 이리 말한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처럼 배우는 사람은 좋은 환경에 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거 누구한테 물은들 틀린 말은 아니라 하겠지만,

때론 좋고 나쁜 곳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

선재동자는 법(法)을 구하러 53인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나선다.

바라문은 물론 외도, 어린 아이 그리고 창녀도 만난다.‘


53인은 일체지(一切智)를 뜻한다.

53인은 사람 쉰셋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나아가 동식물, 우주 삼라만상의 상징이니,

곧 무량(無量)과 같다.


그러하니 딱 53 선지식만 스승이 아니라,

모두가 선생이며 비로자나불의 당체이며,

곧 우리의 마음이다.


헌즉 맹모가 걱정하던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인(成人)이라면, 

선처(善處)가 별처(別處)로 따로 있다 할 것이 아니며,

선지식(善知識)이 따로 계시다 할 것도 없다.


진자리 피하고,

마른자리만 골라 딛고서,

과연 세상의 도리를 옳게 깨우칠 수 있겠음인가?


그렇다면 묻노니 이 말씀은 무엇이란 말인가?


民可使由之,不可使知之。

(論語)


“백성은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알게 할 수는 없느니.“


위세나 덕으로 따르게 할지언정,

사리를 알게 가르칠 형편들은 아니 된다니,

이것 사뭇,

백성을 얕잡아 본 것이 아닌가?


그러하다면 이것은 또 어떠한가?


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


“예(禮)는 서민에게 내려가지 않고, 형(形)은 사대부(士大夫)에 올라가지 않는다.”


이에 의하면,

서민은 예를 두고 논할 상대조차 아니 되며,

그저 형벌로 다스릴 객체로 전락하고 만다.


이 지경에 이르면,

서민은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겠단 말이 아닌가?


요즘 같은 대중 사회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가는, 

만고(萬古)의 지탄을 받을 적당(賊黨)이 되고 말리.


그런데,

民可使由之,不可使知之。

여기서, 백성을 알게 하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백성을 따르게 하는 것조차 공자 정도의 성인이나 혹 가능할까?

만약 범부라면 이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도리를 알지 못하는 이에게 언제까지 따르게 할 수 있겠음인가?

저 말씀은 가르치려도 가르칠 그릇이 아니란 말씀이 아니더냐?

그러함인데 공자는 어이 하여 천하를 철환하셨음인가?


공자가 14년간 철환천하(轍環天下)하며 도를 펴려 하였으나,

끝내 좌절하고 말았지 않은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68세에 노나라로 돌아와,

행단(杏壇)에서 강학하는 것이었다.


내가 시골에서 학당을 개설하였는데,

아직 하나도 받지를 못하고 있다.

어느 날 거기 시골 동네에서 면을 튼 이를 만났다.

녀석이 말하길 언제 막걸리 받아들고 찾아오겠다 한다.

공부하는 자리에 술을 말하고 있음이니,

도가 술자리 탁자 밑으로 굴러 떨어져 구둣발에 차이고 있음이다.


제 아이에게는 더욱 가르치지 못하겠단다.

이유인즉슨 지금처럼 험난한 세상에 공맹을 배우면,

어찌 세상을 헤쳐 나가겠는가?

이리 의심을 하고 있음이다.

그러하니 술안주 삼아 농지거리로 성인의 말씀을 희롱할 수는 있으나,

자식들에겐 그 돈도 아니 되는 소리를 가르칠 수 없다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실 내가 배우고 있는 바는 공맹이 아니라 한비자임이니,

이야말로 아무에게나 가르칠 것이 아니다.

외려 저런 녀석들에겐 쫓아오며 졸라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民可使由之,不可使知之。


그러함이니, 

도대체가 백성들을 따르게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나 한 것인가?


且夫堯、舜、桀、紂千世而一出,是比肩隨踵而生也,世之治者不絕於中。吾所以為言勢者,中也。中者,上不及堯、舜,而下亦不為桀、紂。抱法處勢則治,背法去勢則亂。今廢勢背法而待堯、舜,堯、舜至乃治,是千世亂而一治也。抱法處勢而待桀、紂,桀、紂至乃亂,是千世治而一亂也。且夫治千而亂一,與治一而亂千也,是猶乘驥駬而分馳也,相去亦遠矣。(韓非子)


“또한 요.순.걸.주는 천세에 한번 나타날까 말까한 사람들이다. 

세상의 치자란 보통 중간 정도의 인물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내가 세에 대해 말할 경우에는 바로 이런 중간 정도를 대상으로 한다. 

중간치들은 위로는 요순에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또한 걸주에 이르지 못한다. 

법을 지키고 세를 따르면 다스려진다. 

법을 어기고 세를 버리면 어지러워진다.

지금 세를 폐하고 법을 어기면서 요순을 기다리고 있다면, 

요순이 나타날 때 다스려지리라. 

이는 천세는 어지럽다가 일세만 다스려지는 결과가 될 것이다. 

법을 껴안고 세를 따르며 걸주를 기다린다고 하자. 

걸주가 나타나면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천세는 잘 다스려지고 일세는 어지러워질 것이다. 

천세가 다스려지고 일세가 문란해지는 것과,

일세가 다스려지고 천세가 문란해지는 것의 차이는,

마치 준마를 타고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리는 것과 같아,

그 거리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함이니 한비자(韓非子)는 결코 영웅이나 성인을 기다리지 않는다.

抱法處勢則治

다만 법(法)을 준수하고 세를 타면 바로 다스려질 뿐인 것을.


문제는 저 100만원 과태료 운운의 플랜카드는 법이 아니다.

법이 있다는 창백한 고지(告知)일 뿐, 붉은 집행이 따르지 않으니,

한낱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愚者固欲治而惡其所以治,皆惡危而喜其所以危者。何以知之?夫嚴刑重罰者,民之所惡也,而國之所以治也;哀憐百姓、輕刑罰者,民之所喜,而國之所以危也。聖人為法國者,必逆於世,而順於道德。知之者,同於義而異於俗;弗知之者,異於義而同於俗。天下知之者少,則義非矣。(韓非子)


“어리석은 자는 본디 다스려지길 바라나,

그 다스려지는 원인 행위를 싫어하며,

모두는 위험한 것을 싫어하지만,

그 위험해지는 원인은 기뻐한다.

어찌 그것을 아는가?

무릇 엄한 형과 무거운 벌은 백성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그로써 나라는 잘 다스려진다,

백성을 가엾게 여겨, 형벌을 가볍게 하면, 백성은 좋아하지만,

나라는 그로 인해 위험해진다.

성인은 나라에 법을 펼 때, 반드시 세상을 거스르며,

도와 덕의 이치를 따른다.

이를 아는 자는 법적 정의에 찬동하고, 세속인들의 속된 가치를 부정한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자는 법적 정의를 부정하고, 세속 가치에 동조한다.

천하에 이를 아는 자가 적으니,

법적 정의가 부정 당한다.“


내가 바로 며칠 전 겪은 일이다.

도로 앞길에 한 녀석이 빗자루질을 하고 있는데,

이 자가 연신 그것을 우수관로 그릴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내가 지나면서 이를 보게 되었다.

그리 집어넣을 일이 아니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랬더니 녀석이 빗자루를 들어, 내 팔뚝을 치며 오히려 화를 낸다.

이리 시비가 일었는데 마침 주민이라며 말리는 이가 나타났다.

이자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니 이리 말하고 있다.


‘모두 다 각자의 입장이 있으니 참으세요.’


그래 내가 이리 말해주었다.


‘백인백색(百人百色), 천인천색(千人千色)이라 하나,

이를 구실로, 이리 뻔한 사태 현장에 서서,

시시비비(是是非非)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겠다면,

이 얼마나 부끄럽고 비겁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소?’


無是非之心,非人也。


맹자의 준엄한 말씀이다.


“옳고 그름을 가릴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無羞惡之心,非人也;


“수치스러운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그러고 있는데,

빌딩 현관에 고개만 내민 아주머니 하나는 몸을 숨기며 내게 이리 말한다.


“오늘 지렁이 한 마리 밟았다고 여기세요.”


愚者固欲治而惡其所以治,皆惡危而喜其所以危者。何以知之?


“어리석은 자는 본디 다스려지길 바라나,

그 다스려지는 원인 행위를 싫어하며,

모두는 위험한 것을 싫어하지만,

그 위험해지는 원인은 기뻐한다.

어찌 그것을 아는가?“


나는 그날 제 점포 앞을 깨끗이 하기 위해,

공공의 시설을 더럽히는 잇속 빠른 한 인간을 보며,

한비자의 저 말씀의 뜻을 다시금 새겨 보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예의염치(禮義廉恥)란 말은 관자(管子)란 책에 보인다.

관자는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 관이오(管夷吾) 즉 관중(管仲)이다.


나라엔 4유(四維)가 있는데,

이게 결단이 나면 나라가 거덜이 나거나 망한다고 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바로 예의염치가 되겠다.


禮不踰節,義不自進,廉不蔽惡,恥不從枉。故不踰節,則上位安,不自進,則民無巧詐,不蔽惡,則行自全,不從枉,則邪事不生。


예절은 절도를 넘지 못하고, 의로움은 스스로 한계를 넘지 않고,

청렴함은 악을 (가리려) 덮지 않고, 수치는 굽은 것을 따르지 않는다.

그런즉 절도를 넘지 않으니 위가 안정되고,

한계를 넘어 사익을 꾀하지 않으니 백성은 교묘한 속임수를 쓰지 않으며,

악을 은폐하지 않으니 스스로 온전한 행실을 하고,

굽은 것을 따르지 않으니 사악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도대체가 백주대낮에 제 집 앞을 깨끗이 하기 위해,

쓰레기 쓸어 공공의 하수도 관로에 넣을 수 있음인가?

이리 예의염치 내팽겨치고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게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음이더냐?

내가 보기엔 그냥 쓰레기로 보인다.


이 현장에 같이 있으면서,

사람에겐 제 각기 입장이 따로 있다는 말을 뱉어내는 이웃이란,

이 얼마나 추접스럽고 비열한가?
廉不蔽惡라 하였으니,

악을 (감추려) 덮지 않는 것을 염(廉)이라 한다는 말씀이다.

당장 이웃을 핑계로 제 면을 챙기고자 악을 덮기에 급급하지 않음인가?


오늘날 사람들은 말한다.


‘정치가 엉망이다.

정치인을 못 믿겠다.’


나는 이게 본말을 뒤집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저런 불신의 정치인을 누가 뽑았음인가?


대로변 우수관(雨水管) 속으로 중인환시리에 제 점포 앞 쓰레기를 밀어 넣는 인간,

그리고 이를 두고 각자의 입장이 다 다르다는 소견을 내는 비겁한 이,

그리고 빌딩 그늘 속에 자신을 숨기고 말하는 나약한 아주머니.

이런 이들이 모여 저들 엉터리 정치인을 선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자는 民可使由之 이리 말씀하시고 계시나,

정작 그의 철환천하는 별무 소득이 아니었던가?

헌즉 엄법(嚴法)으로 다스림만 같지 못하다.


예의염치가 없어지면 어찌 되는가?


一維絕則傾,二維絕則危,三維絕則覆,四維絕則滅。


첫째가 결단이 나면, 나라가 기울어지고,

둘째가 결단이 나면, 나라가 위태스러워지며,

세째가 결단이 나면, 나라가 뒤집히며,

네째가 결단이 나면, 나라가 멸망한다.


傾可正也,危可安也,覆可起也,滅不可復錯也。 


기울어지는 것은 바로 세울 수 있으며,

위태스러운 것은 안정시킬 수 있으며,

엎어진 것은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허나 멸망한 것은 다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이 넷째가 무엇인가?

恥不從枉

수치를 아는 것이니, 

즉 구부러진 것, 바르지 않은 것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가 저런 따위의 인간들과 함께 바른 정치가 나오길 기대할 수 있겠음인가?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


“사람이 불인한데,

이를 심히 미워하면,

난을 일으킨다.“


저런 녀석들이 많아지면,

빗자루 아냐 나중엔 죽창을 들고,

제 사익을 취하기 위해,

눈을 붉혀 나서지 않겠음인가?

이를 난(亂)이라 이르지 않는다면 그 무엇을 난이라 하랴?


허나,

미워함을 그치면,

저들이 행여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이라도 할 것 같은가?

외려 마음 놓고 저 짓을 지속하지 않겠음인가 말이다.


헌즉 난을 두려워 할 일이 아니라,

嚴刑重罰

엄히 다스림만 같지 못하다.


나는 天下知之者少 천하에 이를 아는 이가 적은 것을 슬퍼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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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5. 11. 20. 16: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