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신선

소요유 : 2015. 11. 24. 16:32


재미 있는 글 하나를 이리 남겨 둔다.


所謂善人,人皆敬之,天道佑之,福祿隨之,眾邪遠之,神靈衛之;所作必成,神仙可冀。欲求天仙者,當立一千三百善;欲求地仙者,當立三百善。


“소위 착한 이를 사람들은 모두 존경한다.

하늘도 그를 도우니 복록이 그를 따르며,

뭇 사악함도 그를 멀리 피해 달아난다.

신령이 그를 보위하며, 하는 일마다 이룬다.


신선을 가히 바랄 수 있는데,

하늘의 신선이 되려면 마땅히 일천 삼백 가지 선을 행하고,

땅의 신선이 되려면 마땅히 삼백 가지 선을 행하여야 한다.”


나는 사실 이리 양(量)을 헤아리며 재는 것을 마뜩치 않게 생각한다.

일천 삼백이니, 삼백이니 이리 선행 가짓수를 따지게 되면,

사람들은 선행 그 자체가 아니라 목표 숫자를 채우느라 본질을 잊어버리고 만다.


본질을 찾는 과정은 그리 명확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쉬이 양적 대상에 매이게 된다.

물적 세계는 분명 양적 계량 평가가 유효하나,

정신적 세계는 양적 계량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애매함이 있다.

이 때문에 양적 성적에 이끌리게 되면,

본질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 안주하게 된다.


그런데 묻거니와 과연 본질이란 것이 별도로 있기나 있는가?

혹자는 우리가 추구하는 본질 그 자체가 아예 없다고 주장하기 한다.


차론(此論)은 이에 멈추거니와,

나는 다만 화자가 말한 일천 삼백과 삼백이란 대비에 흥미를 느낀다.

하늘 신선이 되려면 땅의 신선에 비해 무려 천을 더 보태야 한다.

이것은 그저 악을 쓴다고 이룰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차원이 다른 경지를 개척하여야 한다.

그게 무엇인가?


한(漢)나라에 종리(鍾離)라는 이가 있었는데 철을 금으로 바꾸는 연단법에 능했다.

해서 과시 궁한 사람들을 구제할 만하였다.

이 기술을 여동빈(呂洞賓)에게 전하였는데,

여동빈이 이리 여쭈었다.


“금으로 바뀐 후에 다시 철로 바뀌진 않습니까?”


이에 종리가 말한다.


“오백년 이후엔 다시 원래의 철로 되돌아온다.”


여동빈이 말한다.


“그렇다면 오백년 이후엔 사람을 해칠 수도 있겠군요.

저는 이런 짓을 저지르기 원치 않습니다.”


종리가 여동빈에게 연단법을 가르치려 함은 그의 마음보를 시험하고자 함에 다름 아니다.

이제 여동빈이 선량한 이임을 알 수 있다.

그러자 그에게 이리 말하였다.


“선도를 닦으려면 삼천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데,

너는 이미 원만히 이 수준을 뛰어 넘었느니라.“


이제 일천 삼백이니, 삼백이니, 혹은 삼천이니 하는 숫자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 이르는 말씀의 경계가 바로 다가올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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