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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後大事定矣

소요유 : 2015.11.24 10:32


오늘 한 생각 피어오르니, 이를 글로 담아둔다.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명에 의해,

방현령(房玄齡), 저수량(褚遂良), 이연수(李延壽) 등이 진서(晉書)를 편찬한다.

거기 이세민의 다음 말씀을 먼저 이끌어 두고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古人有云:「積善三年,知之者少,為惡一日,聞於天下。」可不謂然乎!雖自隱過當年,而終見嗤後代。亦猶竊鐘掩耳,以眾人為不聞;銳意盜金,謂市中為莫睹。故知貪於近者則遺遠,溺於利者則傷名;若不損己以益人,則當禍人而福己。順理而舉易為力,背時而動難為功。

(晉書)


“... 고인이 의 말씀이 있으니,


‘착한 일을 하길 삼년 쌓아도, 이를 아는 자는 적고,

나쁜 짓을 하루 하면, 온 천하 사람에 알려진다.’


어찌 이리 이르지 않겠음인가?


비록 당년은 스스로 허물을 감춘들, 종내 후대의 조소를 받을 것이다.

또한 이는 귀를 가리고 종을 훔치면서, 뭇 사람들이 듣지 못할 것이며,

돈을 훔치려고 작정을 하고서는 시중 사람들이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같다.


고로 가까운 것을 탐하면 먼 것을 잃고,

이(利)에 탐닉하는 자는 이름을 다치게 됨을 알아야 한다.


만약 자기가 손해를 보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곧 다른 이에게 화를 입히고, 자기가 복을 받고자 함이라.


순리를 따라 행하면 쉽게 힘을 쓸 수 있고, 

때를 거스르면, 거동하여 공을 이루기 어렵다.“


제왕의 말이지만 추상같이 엄정하다.

진서가 이러한 정신을 가진 제왕의 명에 의해 편찬되었다면,

방현령이 설혹 사실(史實)을 구부러뜨리려 하였다한들,

왕의 눈을 속여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방현령은 이세민의 지우지은(知遇之恩)을 받았음이니,

갈심진력(竭心盡力) 왕을 보필하였을진대, 어찌 거짓이 있으랴?


積善三年,知之者少,為惡一日,聞於天下。


‘착한 일을 하길 삼년 쌓아도, 이를 아는 자는 적고,

나쁜 짓을 하루 하면, 온 천하 사람에 알려진다.’


이 말을 앞두고 서면, 오늘날 우리네 현실이 이내 오버랩 된다.

도대체가 조금만 사리 분별력이 있는 이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뻔한 일을 두고,

온 시민들이 반반씩 패가 갈려 공방을 벌이고 있다.

일테면, 교과서 국정화 사태 말이다.

해괴한 노릇이다.


저 고인(古人)의 말씀이 사뭇 이치에 닿는 듯싶은데,

과연 저 말씀이 옳다면,

나쁜 짓을 하는데 어찌 나랏 사람 반이나 지지를 하고 있음인가?

착한 일이라면, 어찌 나랏 사람 반이나 반대를 하고 있음인가?


나쁜 짓을 하는데도, 지지를 하는 이들이라면,

저들이야 말로 필시 혼이 정상이 아닌 이들이 아니겠음인가?

착한 일을 하는데도, 반대를 하는 이들이라면,

저들이야 말로 필시 혈맥에 기운이 바로 흐르지 않는 이들이 아니겠음인가?


그런데 이 말은 또 무슨 뜻인가?


積善之家,必有餘慶;積不善之家,必有餘殃。(易)


“선한 일을 쌓는 집은 반드시 경사스런 일에 남음이 있고,

선하지 않은 일을 쌓는 집은 반드시 재앙이 따른다.“


이 역(易)의 말을 앞의 말과 함께 아우르면 이리 된다.

적선(積善)은 삼년(三年) 이상 일관되게 하여야 복이 되고,

적불선(積不善)은 단 하루라도 저지르면 화가 된다.

여기 삼년이란 곧 긴 시간을 뜻하니,

남이 알아주든 말든 상관없이 선함을 쌓아야 된다는 말이다.

이는 곧 음덕(陰德)이라,

남이 모르게 숨은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 폭이다.


그런데 현실에선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복은커녕 외려 화를 당하는 이들이 많다.

저 말들이 진짜라면, 이런 경우엔 내세(來世)로까지 말씀의 유효성을 유보하여야 한다.

구차스럽지만 이리 책임지지 않을 미래로 이월시켜야,

그나마 겨우 말씀의 체면을 차릴 수 있다.


한편, 악한 일을 거듭하는 이들이 화는커녕 복을 누리는 경우는 무엇인가?

악한 일은 단 하루만 지어도 온 천하에 소문이 퍼져 나간다.

그러함에도 복이 있다면, 

세속인들은 선악 시비를 가리지 않고,

이를 복속하여 따르며, 찬양을 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을쏜가?

현실에 보갚음이 일어나지 않아 미래 또는 가상의 세상으로 복을 이양하는,

저들 적선지가처럼 구차스러운 짓을 하느니,

차라리 현세에서 누리는 복을 차압(差押)하고,

미래로 유보되는 화를 외면함이 한결 수지가 맞을 노릇이 아니랴?


雖自隱過當年,而終見嗤後代。亦猶竊鐘掩耳,以眾人為不聞;銳意盜金,謂市中為莫睹。


“비록 당년은 스스로 허물을 감춘들, 종내 후대의 조소를 받을 것이다.

또한 이는 귀를 가리고 종을 훔치면서, 뭇 사람들이 듣지 못할 것이며,

돈을 훔치려고 작정을 하고서는 시중 사람들이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러함인데, 세상 사람들이 귀를 가리고 기꺼이 종을 훔치려들며,

보지 못할 것이라며 돈을 훔치길 꺼리지 않음은 무엇인가?

이는 당년에 화는 적고, 복은 크기 때문이 아니겠음인가?


그러하다면 저 말씀을 부절(符節)을 맞춤과 같이 똑 부러지는 진실이 되게 하려면,

일은 간단한 것이 아니랴?

즉 나쁜 짓을 하면, 화는 크고, 복은 적게 하면 되지 않겠음인가?

또한 착한 일을 하면, 상은 크고, 벌은 적게 하면 되지 않겠음인가?


是故明君之行賞也,曖乎如時雨,百姓利其澤;其行罰也,畏乎如雷霆,神聖不能解也。

(韓非子)


“그러하니, 현명한 군주가 상을 내리는 것은,

포근함이 마치 때맞춰 내리는 비와 같아서 백성들은 그 은혜를 좋아하고,

벌을 내릴 때에는,

두려운 것이 천둥소리 같아 귀신이라도 노여움을 풀 수 없다.”


공을 이룬 자에겐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자에겐 벌을 줌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네 현실이 이리 엉망이 된 것은,

이러한 원칙이 바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친일, 매국한 자는 자손 대대로 부와 귀를 누리고,

독립운동을 한 분들의 후손은 쪽방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누가 이리 만들었는가?

실로 생각할수록 가슴에 동통(疼痛)이 인다.


治亂無常,興亡有運。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어느 하나로 항상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흥하고 망함은 운수임이라.“


이 말씀이야말로 만고의 진리다.

허나 왜곡된 역사 현실을 오늘, 당장, 이고지고 살고 있기에,

이런 말씀은 그리 큰 위안이 되지 않는다.


수호지(水滸志)를 보면 급시우(及時雨) 송강(宋江)이 등장한다.


時常散施棺材藥餌,濟人貧苦,賙人之急,扶人之困,以此山東、河北聞名,都稱他做「及時雨」,卻把他比做天上下的及時雨一般,能救萬物。(水滸傳 第十八回)


“상시로 관재(棺材)와 약과 음식을 흩어 뿌려 빈궁한 이들을 구제하였다.

사람의 급함을 구하고 사람의 곤궁함을 부조하니,

이로써 산동, 하북 땅에 이름을 날리다.

모두는 그를 두고 급시우(及時雨)라 불렀다.

그를 하늘에서 때맞춰 내려 만물을 능히 구해주는 비에 견주었음이다.”


시우(時雨)처럼 아름다운 말이 세상에 어디에 있는가?

때맞춰 내리는 비라니.


春風吹拂,化雲為雨,以潤澤草木,化育萬物 


“봄바람이 불면 구름이 변하여 비가 되고,

초목을 촉촉이 적셔, 만물을 자라게 한다.”


이게 자연의 이치인데,

요즘엔 거꾸로 겨울비가 자주 내린다.

여름엔 거의 내리지도 않던 비가 장맛비처럼 잘도 온다.

허나, 이는 하늘을 원망할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대기를 오염시키는 일을 많이 하기 때문일 뿐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비가 많이 오면 하늘을 원망하며 농작물에 해가 될 것을 염려하며,

오래도록 날씨가 맑으면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또한 하늘을 원망한다.


공자는 우레 소리가 요란하고 질풍이 불면, 낯색을 바꾸며 경외의 태도를 갖췄다.


若有疾風迅雷甚雨,則必變,雖夜必興,衣服冠而坐。(禮記-玉藻)


“질풍이 불며 천둥소리가 심하면, 반듯이 큰 변화가 생긴 바이라,

비록 야밤일지라도 일어나, 의관을 바로 하고 앉는다.”


宋朝的程子,每次遇到了風雨,必定都會起身,因為必須要對天恭敬啊!


“송나라 정자(程子) 역시 비바람이 불면 반드시 몸을 일으켰으니,

이는 하늘을 공경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천기변화가 심하면 하늘을 원망할 일이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반성할 노릇이다.


내가 지난 일요일 시골 농장에 갔다 왔다.

논밭을 지나는데 매캐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지나더라,

이는 필시 어느 농부가 비닐 등속의 쓰레기를 태우는 짓일 것이다.

저들은 시도 때도 없이 논, 밭, 집을 가리지 않고 저리 흉칙한 짓을 일삼는다.


옛날엔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생기면,

위정자가 정치를 잘못하였는가 근신을 하였다.

기실 이게 오늘날의 사태 현실에 비춰 보더라도, 미신이 아님이니, 

예하건대, 지구 온난화의 상당 부분 그 책임은,

위정자들의 정책 수립과 집행의 과오와 태만에 기인한다.


그러함이니 가뭄이 심하게 들거나, 홍수가 질 때, 

하늘을 욕하면, 하늘에 크게 죄를 짓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는 바로 이어 고사 하나를 별도의 글로 남겨 두고자 한다.)


이제, 나는 송강의 짝으로 흑선풍(黑旋風) 이규(李逵)를 떠올려 본다.

그는 악의 무리들을 보는 족족 도끼로 목을 따지 않았던가?

그는 천진스럽고 솔직하다.

게다가 효성이 지극하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남의 재물을 약탈하고,

심지어 인육을 먹기까지 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以惡制惡, 악으로 악을 제압하는 소설 구성상의 설정이라 한다.

허나 나는 以惡制惡으로 보지 않는다.

악을 제압하는 데는 필시 위력(威力)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법,

그런즉 (以)惡이 아니라 엄벌(嚴罰)로 집행하는 자일뿐이다.


집금강(執金剛) 또는 지금강(持金剛)이라 불리우는 호법신(護法神)이 있다.

여기 금강 앞에 집(執) 또는 지(持) 자(字)가 들어가는 이유는,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개 분노상을 하고 있는데,

금강저를 들고서는 제악(諸惡)을 항복시킨다.

이러함인데 어찌 이를 두고 以惡이라 할 수 있겠음인가?


송강의 별명은 이외에도 호보의(呼保義)가 있다.

본디 송(宋)나라엔 보의랑(保義郎)이란 관직이 있었는데,

이는 무관으로선 최하위 말단이다.

송강은 요(遼)를 정벌하고 돌아와선 바로 이 직책을 받았다.

당시 보의(保義)란 귀인의 노복이란 뜻으로 흔히들 불렀다.


그런데도 송강은 자신을 호보의(呼保義)라 칭했다.

이는 송강이 스스로 노복임을 자임하고자 이리 자칭하였던 것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보의(保義)라는 곧 정의를 호위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게 당시 송나라에선 노복의 뜻으로 쓰였음이니,

도시(都是) 정의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있었단 말인가?


양산박(梁山泊)에 호걸들이 모여든 것은,

바로 이 땅에 떨어진 정의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함이 아니어든가?

하지만 저들의 말로는 편치 않다.

뿔뿔이 흩어지거나, 쫓기고, 죽고, ...

그러다 일부는 관에 투항하거나, 간신의 모략으로 죽임을 당하고 만다.


혹자는 수호지를 두고 도둑질을 가르친다든가, 반란을 부추기는 소설이라 평한다.

하지만 이는 피상적인 관찰이라 하겠다.

물론 도를 넘치는 잔인, 무도한 장면은 비판적으로 보아야하겠지만,

전편을 흐르고 있는 중심 주제 의식인 의(義)를 잃어서는 곤란하다. 

내가 생각하기엔 한마디로 ‘계급투쟁’을 그린 소설로 여겨진다.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이에 소외된 계층들 간의 갈등과 충돌을 심층적으로,

그리고 웅장한 서사로서 승화시켰다.


마지막으로 저들이 간신들, 

즉 요즘으로 치면 부패 관료내지는 기득권층으로 환치하여 보아도 좋다. 

바로 이들에 의해 주인공들이 거꾸러지는 장면을 다시 들춰보고자 한다.

오늘 날의 사회, 정치 현실과 견주어 음미해보라.


간신 고구(高俅), 양전(楊戩)은 천자가 노준의(盧俊義)에게 내린 음식에,

몰래 수은(水銀)을 타 넣고,

송강에겐 어사주(御賜酒) 속에 만약(慢藥)을 타 넣어 죽일 계획을 세운다.


이 때, 고구, 양전은 쾌재를 부르며 이리 외친다.


此後大事定矣!


“차후 대사는 정해졌다.”


노준의는 이도 모르고 그 음식을 먹고는 임지로 향한다.

그 후 노준의는 심한 허리통증을 느끼고, 말을 탈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배를 타고 가게 되는데 그날 밤 술에 취해 회하(淮河) 강 밑으로 떨어져 죽고 만다.


송강 역시 저들 간신배들이 몰래 탄 약이 든 어사주를 먹고는 죽어간다.

이 때 송강은 이규를 불러들여 남은 어사주를 먹게 하고는, 함께 죽는다.

이는 이규가 살아남아 일을 꾀할까 저어함이니 이로써 후일을 단속하기 위함이다.


수호지를 계급 갈등으로 독해한다면,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 허무한 결과를 목도하게 된다.

과연 정의는 살아서 마주할 수 있는가?


후에 천자가 이 사실을 알고 대노한다.

고구 등 간신배들을 벌하며, 송강 등의 충의 절개를 다시금 선양한다.

허나, 죽은 다음에 사당을 짓고 충의를 기린들, 죽고 나서니 다 부질없다.

천자가 어디 갔다 이제 와서 죽은 이를 어루만지고 있는가?

그가 현명한 이라면 애시당초 108인이 양산박에 가서 둥지를 틀 일도 없었을 터이며,

부름을 받고 세상에 나와서 충의를 다하다 간신배들에게 죽임을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此後大事定矣!


“차후 대사는 정해졌다.”


오늘날에도 이리 말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무리들이 왜 아니 없겠음인가?


대중 민주사회인 오늘날 천자는 없다.

허나, 대중 각자는 저마다 천자의 소임을 맡고 있는 것과 진배없음이라.

양산박의 108인 호한(好漢)들이 그리 쫓겨가지 않도록,

그리고 최후에 억울한 종말을 맞지 않도록 지켜주어야 한다.

당대를 사는 사람은 마땅히 부끄러운 역사를 짓고, 또 남기지도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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