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바보와 은자

소요유 : 2016.04.26 19:33


어제 FM 방송에서 들은 말이다.


‘바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몇 가지 들고는 그 어원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 영어 단어 어원을 들어보니 마치 동양의 무엇을 가리키는 것과 같더라.

그래 나 역시 이를 나름 새겨 보고자 한다.


우선, 영어 단어의 어원을 내가 다시 조사하였은즉 여기 먼저 늘어놓는다.


idiot

라틴어의 idiota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본 뜻은 ordinary person, layman, outsider라 한다.

이는 곧 보통 사람, 문외한 정도로 새기면 되겠다.

그리스어로는 전문적 기술이 부족한 사람이란 뜻을 가졌는데, 

가령 작가, 군인처럼 특정 분야 전문인이 아니란 뜻이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중의 일엔 무관심하고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를 뜻한다.


fool

이 말의 대표적인 어원은 본디 "blacksmith's bellows“ 즉 대장간의 풀무인데,

이로부터 더 진화하여 머릿 속이 빈 바람주머니란 뜻으로 변해갔다.

방송에선 이러한 것을 놔두고 ‘바람’ 운운하며 좀 충분치 않은 해석을 하였다.


silly

이것은 어원학적으로는 happy, to comfort, cheerful, merry에 당한다.


방송에선 ‘바보’라는 것이 그 어원으로 보건대,

그리 나쁜 것이 아니라며, 설을 풀어내고 있다.


제번(除煩)하고 나는 idiot에 주목한다.

전문적이 아니란 말은 지적 수준이 떨어진다든가, 능력이 못하다는 말이 아니다.

어디 묶여 전속적인 기술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expert, technician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즉 specialist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어느 특정 분야에 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같이 고도로 분업화된 사회에선,

그들의 능력은 사회적 인정을 받아, 그 평가가 사뭇 높다.

반면, 여러 분야에 두루 능통한 generalist는 쉬이 만나기 어렵다.

specialist란 어느 특정 분야에 전문성이 있지만,

거꾸로 보자면 그 분야 외에는 서투른 이라 하겠다.

부족한 부분은 도리 없이 남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조직, 집단 속에서는 살아갈 수는 있지만,

이 밖을 벗어나면 삶을 지탱하기 어렵다.

왜냐 하면 삶이란 총체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컴퓨터 전문가가 절해고도(絶海孤島)에 떨어진다면,

컴퓨터 전문지식이란 생존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specialist는 본원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다.

제 삶을 남에게 의탁하고, 남을 위해 헌신한다.


하지만, 은자(隱者)는 남에게 의지 하지 않고,

홀로 자족적인 삶을 꾸린다.


松下問童子,言師采藥去。

只在此山中,雲深不知處。

(唐‧賈島 尋隱者不遇)


“소나무 아래 동자에게 묻자,

선생은 약초를 캐러 가셨다 한다.

이 산 속에 계시련만,

구름이 깊어 그곳을 모르겠다.”


松, 藥, 山, 雲


이 사자(四者)는 각 구절마다 오똑 하나씩 들어 있다.

모두 도가(道家)의 핵심 사상을 추상해내는 지시어이다.

이게 도대체가 어디에 있는지 오리무중이다.

다만 산 속에 있기는 있을 터지만.


은자 역시 이 도시 속 어딘가에 살고 계시다.


小隱隱陵藪,大隱隱朝市 (小隱隱於山野,大隱則隱於都市)


"소은은 산야에 숨고, 대은은 저잣거리에 숨는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오늘을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게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묻지도 않는다.


찾고자 하는 이,

묻는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idiot

오히려, 바보라고 손가락질 한다.


결혼 정보회사에선,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들을 최고의 배우자 후보로 친다.

최고가 되기 위해선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송하(松下)에 찾아 가지도 않고,

채약(採藥)에도 관심이 없다.

도시 속에서 채금(採金)을 하고 말지,

구름 속에 숨은 것이 무엇이 귀하랴?


佛法無用功處。秖是平常無事。屙屎送尿。著衣喫飯。困來即臥。愚人笑我。智乃知焉。古人云。向外作功夫。總是癡頑漢。儞且隨處作主。立處皆真。

(天聖廣燈錄) 


“불법은 공을 이루는 데는 쓸모가 없다.

다만 평상무사하는 데만 쓰일 뿐.

똥 누고 오줌 싸며, 

옷 걸치고, 밥 먹고,

곤하면 누울 뿐인 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보고 비웃으나,

지혜로운 이는 이를 안다.


밖을 향해 공부를 하는 이는,

모두 어리석고 미련한 놈들이다.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있는 자리가 참되다.”


이것은 원래 鎮州臨濟慧照禪師語錄에 나오는 것인데,

참고 삼아, 天聖廣燈錄에 있는 것을 소개하였다. 

둘 다 거의 대동소이하다.


여기서 압권은,


隨處作主。立處皆真。


이 글귀이다.


여기서 處는 공간을 가리키지만,

시공을 모두 아우른다.

다만 處 하나로 축약하여, 이를 모두 대표한다.


隨란 따른다는 뜻이니,

시공간에 놓여진 운명은,

선택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수동적으로 맞이할 뿐이다.

하지만 作主라,

게서, 그 때, 

주체적으로 주인이 되라는 말이다.


그러면,

立處,

서있는 자리,

상황 상황마다 모두 참되다.


隨處 ↔ 立處


수동적, 개별적 시공간이,

주체적, 우주적 시공간으로 확대된다.


作主 ↔ 皆真


개별 자각 주체에서,

우주적 진리의 세계가 왼통으로 열린다.


그러니까 개별 주체가 자각할 때,

전체도 진리의 모습으로 나투게 된다.


이제까지 임제록의 이 글귀를 두고,

개인의 깨우침에 한정하여 해석을 하여왔다.

하지만, 立處皆真은 개별 위(位)에 전속되지 않는다.

개별 단위가 각자(覺者)가 될 때,

전 우주 역시 ‘참’으로 귀향하게 된다.


거꾸로 개별 단자가 깨우치지 못하면,

우주는 혼천흑지(昏天黑地)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불각(不覺)의 개인은 우주적 책임을 져야 한다.


다시, 되돌아와, 바보 이야기를 잇자.


유비(劉備)의 뒤를 잇는 유선(劉禪)은 촉(蜀)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그래 그를 두고는 암둔(闇鈍)하다는 역사적 평가를 많이 접하게 된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되는 기술도 적지 아니 만나 볼 수 있다.

가령 삼국지주증유(三國志注證遣)를 지은 주수창(周壽昌)은 

恐傳聞失實,不則養晦以自全耳。이리 말하고 있다.

즉 ‘아마도 뜬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기회를 노리며 자기를 보전하였으리요?’

이리 그를 평하고 있는 것이다.


촉(蜀)이 망하자, 위(魏)는 그를 위나라 낙양(洛陽)으로 데려가 살려준다.

그는 음주가무를 즐기며 희희낙락하였다.

사마소(司馬昭)가 연회를 베풀고 그에게 촉나라 생각이 나지 않는가라고 묻자,

그는 “此間樂,不思蜀也。”라고 답하였다.

즉 ‘즐기는 중에는 촉나라를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는 제갈량이 아무리 분발하였어도,

저 정도라면 나라가 아니 망할 수 없었으리라.

세인들은 이리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망국의 한을 품고,

종일 비분강개만 하고 있었더라면,

제 명에 죽게 내버려 두었을까?


장풍매사(裝瘋賣傻)


짐짓 미치광이 흉내를 내며, 바보 행세를 하다.

사태가 여의치 않을 때, 흔히 이리 바보 행세를 하며,

상대를 안심케 하는 일은 역사상 적지 않다.


병법에도 가치부전(假痴不癲)이란 술책이 있다.

거짓으로 바보인 양 상대를 속이지만,

속으로는 미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계산이 서서 어리석은 척 꾸미고, 상대를 기만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미치지 않았음이니 철저하니 연기를 하는 것이다.

不癲를 잘못 해석하여,

(바보인 척 하지만,) 미치지 않아야 한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이것은 아주 엉터리다.

바보인 척하건, 미치광이인 척 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속으로 不癲, 즉 진짜로는 미치지 않았다라는 뜻이다.


이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難得糊塗

“聰明難,糊塗難,由聰明而轉入糊塗更難,放一著,退一步,當下心安,非圖後來福報也。”


“총명하기도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렵다.

총명한 사람이 어리석게 되기는 더욱 어렵다.

집착을 놔버리고, 한 걸음 물러서, 마음을 놓아버리면, 편안하다.

후에 복을 받고자 함이 아니다.”


(※ 糊塗 : 흐리멍덩하다.)



이 글은 청나라의 정판교(鄭板橋)의 글이다.

총명하면서도 이를 감추고 운봉산(雲峰山)에,

은거한 자칭 호도노인(糊塗老人)과의 우연한 만남 중에,

이 글을 지었다.

정판교는 지방 유지로부터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는데,

유현(濰縣)이란 곳의 지방 관리로 있을 때,

편액(匾額)을 많이 남겼다.

그 중 난득호도는 후대에까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명작이다.


내가 전에 동네 근처 고물할아버지를 하나 알고 지냈다.

이이가 강아지를 여러 집에서 받어 데려다 놓고는,

밥도 주지 않고, 물도 주지 않은 채, 

그저 마당에 묶어놓고 모진 학대를 하였다.


나는 당시 그 집의 가여운 강아지들과 인연 지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여럿 편 글을 쓰기도 하였다.

난득호도란 글은 그가 주어온 고물, 쓰레기 더미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고물할아버지에게 이를 풀이해주며,

은근히 그자의 패악질을 돌려 나무랐으나,

그는 마이동풍이라 도무지 알아듣질 못하였다.


바보가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성정이 곧고 바른 이는 쉬이 이 짓을 하지 못한다.

지략이 뛰어나고, 임기응변이 강한 이는 그나마 좀 낫다.

하지만, 그 뜻이 굳고, 전략 목표가 확고하면,

누구라도 바보가 될 수 있다.

그리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


내 지금, 바로 좀전 은자(隱者)라 하였는가?


나는 도시 길가에서 저들 은자들의 행렬을 쉬이 목격한다.

동네에서 파지는 줍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자주 만난다.


등은 굽고, 표정은 굳어있다.

입성은 남루하다.

그저 앞 만 보고 수레를 끈다.

뒤는 물론이거니와 옆도 보지 않는다.

특히 파지 수집소 근처에라도 이를 참이면,

저들의 열 지은 행렬을 보게 된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다.

살아 움직이되, 마치 정물처럼 도시란 물속에 잠겨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저들은 개인화를 넘어, 스스로로부터도 잊혀진 사람으로 살아간다.

- private person to ignorant person

이 어찌 은자가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마치 호도노인(糊塗老人)처럼, 

저 가운데,

가슴에 불을 지피우고,

머리에 차가운 칼을 벼리고 계신 이가 혹 숨어 계시지나 않을까?


이 얼마나 경이로운 상상인가?

그들을 만나고 싶다.

아니, 그냥 놔두리라.

모른 채.

왜?

은자니까.


그래,

그렇다.

은자가 아닌 이가, 

은자를 만나고자 하는 것은 자못 불손한 일이다.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옥시와 새 떼  (0) 2016.05.03
나는 촌놈이 싫다.  (2) 2016.05.02
도요타의 간판방식  (0) 2016.04.29
바보와 은자  (2) 2016.04.26
TNR  (4) 2016.04.22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0) 2016.04.22
요설(饒舌)  (0) 2016.04.21
Bongta LicenseBongta Stock License bottomtop
이 저작물은 봉타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행위에 제한을 받습니다.
  1. 은유시인 2016.04.27 18:34 PERM. MOD/DEL REPLY

    오늘도 좋은 글 읽고 갑니다.
    뜻한 바가 있어 일부러 바보로 살아가는 이도 있겠으나
    바보로 취급되어 바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을거라 여겨집니다.

    bongta 2016.04.27 20:11 신고 PERM MOD/DEL

    고물상에 일하는 정신발육부전자 하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언제나 혼자 활동합니다.
    밥 먹으러 갈 때도,
    동료들은 함께 가지 않습니다.
    하여 그는 외톨박이로 살아갑니다.
    이 사람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고물 분류, 정리하는 일을 하는가 본데,
    그 일은 단순 작업이니까 얼추 따라가는가 봅니다.
    고물상 주인 입장에선 아마도 헐한 노임으로 부릴 만하다는 판단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림자처럼 제 존재를 들어내지 않고,
    제 일에 충실할 뿐입니다.
    처음엔 아마 가슴 속에 슬픔이 시냇물 되어 졸졸 흘렀을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제 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지나 않았을까 싶습니다.
    동료들은 자신을 내버려두고, 알지 못하리라 여기고,
    마음껏 치부를 드러내고, 안하무인으로 못된 짓도 불사할 것입니다.

    이 분을 두고 바보라 할 수도 있지만,
    저는 도시 속에 숨어 있는 은자라 부르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유리된 채,
    제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한 이로서,
    그는 제 홀로 자기 길을 걸어 갑니다.

    파지 줍는 할머니 한 분을 압니다.
    며칠 전 제게 말합니다.
    리어카를 끌고 가다 세워둔 차를 긁어버렸는데,
    그런데 그게 외제차랍니다.
    89만원 변상을 하여야 한답니다.

    얼굴은 언제나 인디언 추장처럼 무표정합니다.
    그의 얼굴로는 낙관도, 비관도 그 아무런 표상이 읽혀지지 않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는 그런 표정으로 골목 길을 걸어갑니다.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합니다.
    그 때 은자를 떠올린 적이 있습니다.

    실제 오늘날 중국에선,
    거리 노숙자들을 은자라 칭하기도 합니다.
    저들이 그리 부르는 것은 다분히 복지사회학적 관점이 작용하였다 생각됩니다.
    실용적, 실천적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은자라 할 때는,
    이런 관점이 아니라,
    역사학적, 철학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에 기반합니다.
    물론 그 이해는 아직 충분치 못합니다만,
    그리 그 연못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