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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사안(千生捨眼)

소요유 : 2016. 9. 26. 17:29


천생사안(千生捨眼)


佛語阿難:「四大海水尚可升量,身髓布施不可稱計。」

佛語賢者阿難:「乃往去世有王號曰月明,端正姝好威神巍巍,從宮而出,道見盲者貧窮飢餓隨道乞匃,往趣王所而白王言:『王獨尊貴安隱快樂,我獨貧窮加復眼盲。』爾時月明王見此盲人哀之淚出,謂於盲者:『有何等藥得愈卿病?』盲者答曰:『唯得王眼能愈我病,眼乃得視。』爾時王月明自取兩眼施與盲者,其心靜然無一悔意。月明王者,即我身是。」

(彌勒菩薩所問本願經 西晉月氏國三藏竺法護譯)


“부처가 아난에게 이르시다.천하의 모든 바닷물은 차라리 되질로 잴 수 있을지언정,

몸을 버려 보시하는 일은 (하도 많아) 헤아릴 수 없다.


지난 세상에 한 왕이 있었으니 월명(月明)이라,

용모가 단정하고, 위신이 산처럼 올올 우뚝하였다.

궁을 나와 길에서 맹인을 만났는데,

그는 빈궁하여 배를 곯아, 길가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가 월명왕께 이리 말하다.


‘왕은 홀로 귀하여 안온하고 쾌락하게 사시고 계십니다.

하지만 저만은 빈궁함도 모자라 눈까지 멀었습니다.’


이 때, 월명왕은 맹인이 슬퍼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맹인에게 이르다.


‘그대의 병을 치료할 약이 있느뇨?’


맹자가 답하여 말하다.


‘오로지 왕의 눈을 얻어야 제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즉시 제 눈이 보일 것입니다.’


때에, 월명왕은 양 눈을 뽑아 맹인에게 주었다.

그 마음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으며 일 점의 후회도 없었다.


당시의 월명왕은 곧 나(부처)이었느니라.”


소위 본생담(本生談)이라는 형식의 불교 경전내지는 문학은,

그 자체적으로 하나의 완결된 독립 문헌을 이루기도 하지만,

이처럼 본원경(本願經)에 끼어들어 그 일부분을 이루기도 한다.


부처의 전생을 다룬 본생담은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양도 엄청 많다.

끝날 것 같지 않게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내가 어제 밭에 가서 예초 작업을 하는데,

도대체가 풀은 어이하여 이리도 무성한가 하는 의문을 일으켰다.

그러다 오늘 아침 천생사안(千生捨眼)의 본생담을 대하다,

문득 한 생각이 굴뚝 연기처럼 지피어 올랐다.


천생사안이란 위에서 소개를 하였지만,

그렇다 하여, 단 일회의 사건으로 볼 이유가 없다.

과거세 누 겁을 두고 똑같은 일이 몇 천만억 번이고 일어났다 하여야 한다.
그래서 천생(千生)인 것이고,

천생(千生) 마다 천 번의 사안(捨眼),

즉 눈을 버려 혜시(惠施)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럼 미래세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서원과 혜시(惠施)에 의해,

맹인이 다 구하여져 그러한 일이 일어날 일이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미래세에도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여기 경전의 말씀을 이끌어둔다.


.....

爾時,四方天王,俱從座起,合掌恭敬,白佛言:「世尊!地藏菩薩於久遠劫來,發如是大願,云何至今,猶度未絕,更發廣大誓言?唯願世尊,為我等說。」


佛告四天王:「善哉!善哉!吾今為汝,及未來現在天人眾等,廣利益故,說地藏菩薩於娑婆世界,閻浮提內,生死道中,慈哀救拔,度脫一切罪苦眾生方便之事。」


四天王言:「唯然,世尊!願樂欲聞。」


佛告四天王:「地藏菩薩久遠劫來,迄至于今,度脫眾生,猶未畢願。慈愍此世罪苦眾生,復觀未來無量劫中,因蔓不斷,以是之故,又發重願。如是菩薩,於娑婆世界,閻浮提中,百千萬億方便,而為教化。

(地藏菩薩本願經 唐于闐國三藏沙門實叉難陀譯)


“... 때에, 사방의 천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며 여쭙다.


‘세존이시여! 지장보살이 오랜 겁이래 큰 원을 세우셨는데,

어이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중생 제도가 끝이 나지 않고,

다시 대 서원을 세워야 합니까?

세존께 바라옵건대 저희들을 위해 설해주십시오’


부처께서 사천왕에게 이르시다.


‘좋은 질문이구나.

내 너희들을 위하여 지장보살이 사바세계에서,

일제 중생을 위해 제도 사업을 하는 일에 대하여 설하겠노라.’


사천왕이 말하다.


‘홀로 위대하신 세존이시여, 원컨대 어서 빨리 듣고 싶습니다.’


부처께서 사천왕에게 이르시다.


‘지장보살이 오랜 겁부터 이제에 이르도록 중생을 구제하려는 원을 세웠으되,

아직도 그 원을 마치지 못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죄업에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을 자애를 베풀어 불쌍히 여기고,

다시 미래의 무량 겁 가운데 중생을 살피니, 

인연의 엉킴이 끊어지지 않고 있은즉,

다시 거듭 중생 구제의 서원을 세우는 것이다. 

이리 사바세계, 염부제(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보살은,

백천만억의 방편으로 교화를 하는도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빠진 중생을 모두 구제하기 전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중생을 위해 이런 서원을 세우신 미륵보살과 함께 한국에선 대표적인 신앙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지장, 미륵보살이 나타나 그리 서원을 세워, 중생을 구제하지만,

쉼도, 마침도 없이,

어찌 또 서원을 또 세우실 일이 있단 말인가?

사천왕은 이리 부처에게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대해 부처는,

因蔓不斷이라,

죄업의 인연이 덩굴처럼 엉켜, 끊임이 없기 때문에,

거듭하여 서원을 세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아, 순간 나는 풀을 생각하였다.

마치 업연(業緣)처럼 엉킨 저마다의 사연들을,

풀들은 밭에 머리 풀어 시연(示演)하고 있는 것이 아니랴?

과거세는 물론 미래세에도 풀들의 업연은 끝나지 않으리라.


헌즉, 이를 남김없이 뽑으려든다한들,

그 끝을 어이 볼 수 있으랴?


煩惱卽菩提。

生死不異涅槃。


‘번뇌과 보리요, 생사가 열반과 다르지 않다.’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미륵이나, 지장의 서원이란,

중생의 고통, 업보를 전제로 한즉,

업보가 끝이 나지 않는 한,

서원 역시 거듭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하다면, 중생의 고통은 곧 서원과 다르지 않다.

고통이 없다면 서원도 없을 것이로되,

서원이 끝이 없다면, 고통도 끝이 없다.

고로 이들은 연환쇄(連環鎖) 쇠고리 chain처럼,

연연(連連) 부절(不絶)하니 영겁을 함께 질러나간다.


허니, 고통을 없애려 노력하는 것은 다 부질없음이라,

서원도 공연한 부주(扶助)요, 쓸데없는 참견에 불과하다.


풀이 들녘에 번성함을 보고,

혹자는 여름 태양 빛을 받아 저리 힘차게 자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실상을 온전히 다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풀은 야밤 명월(明月)이 없으면 절대 저리 건강하게 자라지 못한다.

명월은 뽀얀 가슴을 풀어, 젖빛 월광(月光)을 지상에 뿌린다.

그러자 이내 풀잎엔 이슬이 맺힌다.

풀들은 이 이슬을 먹어야 제대로 큰다.

만약 이슬을 먹지 못하면,

해충이 창궐하여, 

잎, 줄기 심지어 뿌리까지 뜯기고, 갉아 먹히며, 

끝내 썩거나 죽어버리게 된다.


실제, 현명한 농부는 안다.

풀대를 꺾어버리기만 하여도 풀이 죽는다는 것을.

이는 통도조직인 관부(管部)가 막혔기 때문이 아니다.

밤이슬을 먹지 못하기에 죽는 것이다. 
(※ 여기 먹는다는 말은 비유적 표현이다.
'이슬의 세례를 받는다' 이리 말하면 또 어떠할까 싶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해만 없어지면 식물들이 다 죽을 것 같지만,

실인즉 달이 없어져도 식물들은 다 말라 죽고 말리라.


밤에 잠을 자는 이들은 이를 아지 못한다.

세상이 잠들 때도, 역사는 이뤄진다.


이것 내가 공연히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다.


四時節,日月光,風雨時,膏露降,五穀孰

(漢書)


“사시 절기, 

해, 달의 빛,

그리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자애로운 이슬이 내릴 때, 

오곡이 익는다.”


옛 사람들이,
여기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다.


농부들은 풀을 제압하려 노심초사 한다.

하여 어떤 이는 ‘풀은 적이다.’라고 선언하며,

모조리 없애야 한다고 기염을 토한다.


온 땅 위로 방초망을 뒤집어씌우고,

이도 성이 차지 않으면 제초제를 뿌려댄다.


그래 저들이 적들이라 이르는 풀들을 제압하였는가?

어림없는 소리.

년년세세 씩씩거리며 저 짓을 되풀이 할 뿐,

아직껏 이겼다는 이를 보지 못하겠다.


중들이, 번뇌를 없애고 보리(지혜)를 구하려 하지만,

보리 따로 번뇌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번뇌를 부정하고는 절대 보리를 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풀을 없애고 작물을 잘 키우리라고 다짐들을 하지만,

풀 따로, 작물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풀을 부정하고는 절대 작물을 건강하게 키울 수 없다.


천생사안(千生捨眼)


미륵보살, 지장보살 등속이 

천 번 태어나도 천 번 중생 구제의 서원을 세우고,

천 번 만난 맹인에게 제 눈을 뽑아 준다한들,

결코 맹인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 서사 구조 속에서 맹인을 없애겠다는 장면에 주목하면,

천억 겁이 흘러도 그대 자신이야말로 맹인, 벙어리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

제 눈을 뽑아주는 것은 맹인을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저들이 진정 부처요, 보살이라면,

맹인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왜 아니 모를 것이며,

서원을 아무리 세워도, 그 끝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어찌 모를쏜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원을 세우고,

제 눈을 뽑는 것은 어이 된 일인가?


내 물음에,

우물쭈물하지 말고,

단 일합(一合)에 대답하라!


풀을 기어코 뽑아 없애버리겠다고 악을 쓰는 한,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이는 하나도 없다.

진정 풀을 제압하려 한다면,

차라리 그대 눈을 뽑아,

밭에다 버려라.


이 때,

문득,

그대 자신이 미륵보살이 되고, 지장보살이 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나는 불교 또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다만, 내 생각을 펴기 위해, 

저들 경전을 주체적 선택에 따라 인용할 뿐, 

거기 매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놀라운 가르침에 감복(感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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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6. 9. 26. 1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