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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반이다.’를 탄박한다.

소요유 : 2016. 9. 20. 18:33


‘시작이 반이다.’


이 말을 소싯적에 들었다.

당시 이 말이 내게 좀 어색하게 들렸다.

격려의 말인 것을 알겠으나,

말 갈피에 숨어있는 과장과 속임의 낌새를 엿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로써, 준비도 아니 된 사람을 충동질하게 되면,

나중에 난처한 일이 대책없이 벌어질 위험도 있다.


이런 말은 한자 문명권에선 나오지 않는다.

아니 나올 수 없는 말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원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한 말이란다.


Well begun is half done.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시작이 반이다.’란 소리가 아니라,

‘잘 시작된 것이면 반은 성공한 것이다.’란 뜻이니,

‘시작이 반이다.’란 말은 너무 무책임하고도 저돌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시작이 반이다.’

남에게 이 말을 들려주면서,

으쓱 폼을 잡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하회(下回)를 따라가며 챙겨주지도 않을 것이라면,

자칫 선동(煽動)한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요즘 현대 중국인들은 이 말을 이리들 사용한다.


好的開始是成功的一半。


이것은 그래도 원의(原意)를 좇아 제대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다.’ 이 말은 원의를 사뭇 손상하며 조급히 굴었다.

과시 개발 독재 시대 우리나라에서 나온 말답다 하겠다.

여기 친족 간이 되는 말이 또 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우격다짐이라도 마구 질러 놓고 보자는 심산.

저 저열한 조급성(躁急性)을 규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Well begun is half done.


이것은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善因善果라 하겠다.

제대로 된 원인이 먼저고, 그래야 나중에 제대로 된 결과가 도출된다.


菩薩見善果福利而求善因。


‘보살은 선과를 보고서는 선인을 구한다.’


善因生善果。


선인이 먼저 선행함으로써, 선과가 맺어진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이런 말엔 선인이 빠져 있다.


無因善果。


무작정 저지르고는 선과를 구하고 있다.

이를 나는 앞에선 그래도 점잖게 조급하다 하였다.

하지만 툭 터놓고 말하자면 천박하고도 흉한 마음보의 발로라 하겠다. 


제대로 된 시작이 아니면,

반은커녕 한 톨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안 되면 되게 할 것이 아니라,

안 되면 아니 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惡因惡果。

악인을 지으면 악과를 받게 되는 것이지,


惡因善果。

악인을 저지르고서도 선과를 구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망령된가?


行百里者半於九十。

(戰國策)


“백리를 간다면, 구십리가 반이다.”


이것은 앞의 말과는 정반대로,

시작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업(業)의 종결에 비중을 둔다.


전자나 후자 모두 일의 반(半)을 과장하고 있다.

전자는 반을 말하되, 시작만으로 이를 이루고,

후자는 반을 말하되, 마지막 종결로써 반을 완성한다.


전국책의 行百里者半於九十 이 말이 등장하는 근처엔 시경의 이런 말이 실려 있다.


靡不有初,鮮克有終。


“처음이 없는 이는 없으나,

마지막을 제대로 맺는 사람은 드물다.”


“백리를 간다면, 구십리가 반이다.”처럼,

이 말 역시 유종의 미를 중심 과제로 삼고 있다. 


‘시작이 반이다.’ ↔ “백리를 간다면, 구십리가 반이다.”


전자는 일견 시작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양 싶지만,

기실은 결과 중심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일단 질러놓고 결과를 구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반면, 후자는 결과를 중시하고 있는 양 싶지만,

기실 잘 살펴보면, 제대로 된 원인 행위를 더 중히 의식하고 있다.

시작은 신중하게, 마지막은 겸손하게 최선을 다하며 구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신중함과 겸손함.

이것은 동양의 미덕이다.


다시 지적한다.

전자에선,

시작은 무작정,

결말은 무조건.

욕심껏 구하는 모습을 그리게 된다.

이것은 얼마나 천박한가 말이다.

마치 로또 긁으며 대박을 꿈꾸는 이들처럼 말이다.

나는 대박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여기선 저들을 수식하기 위해 이 말을 차용해둔다.


故先王之所重者,唯始與終。


“고로 선왕이 중하게 여기는 것은 시작과 결말 모두인 것입니다.”


나는 오늘,


‘시작이 반이다.’


이 말을 탄박(彈駁)하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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