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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

소요유 : 2016. 9. 27. 19:59


현장(玄奘, 602~664)은 중국 당(唐)나라 때의 중이지만,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서유기(西遊記)의 중심인물인 당삼장(唐三藏) 또는 당승(唐僧)은,

바로 실존 인물인 이 현장(玄奘)을 모델로 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현장은 인도로의 유학(留學)을 꿈꾸었다.

오늘 날 유학은 대개 일신의 출세를 위한 방편으로 치부되곤 한다.

물론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나,

학문을 닦기 위해서 유학을 결행하기보다는,

남과는 다른 차별적 위치나 지위 획득을 꾀하려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현장은 애오라지 구법(求法)을 위해 인도로 들어가길 원했다.

당시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종파마다 달라 서로 상위(相違)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현장은 三乘學說인 瑜伽師地論을 배우길 원했다.

인도로 들어가 구법(求法)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당나라는 외국 여행을 통제하였다.

오늘 날 여권에 해당하는 소위 호조(護照)를 얻을 수가 없었다.

627년 그는 드디어 이를 무시하고 장안을 떠나 천축(天竺)행을 결행한다.

갖은 고난을 다 겪고 마침내 천축에 도착한 그는,

원하는 대로 유가사지론과 기타 경론을 배우게 되는데,

당시 세계 최고의 대학이자, 학술 중심인 나란타사(那爛陀寺)에서,

戒賢(Śīlabhadra)을 법사로 모시게 된다.


643년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657部의 불경(佛經)을 인도로부터 가져왔다.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장안에 역경원(譯經院)을 건립하고 가져온 불경을 한어(漢語)로 번역하였다.


당시 불경은 이미 구마라습(鳩摩羅什)에 의해서도 번역이 되어 있었다.

고종(高宗)은 칙령을 내려, 이리 주문하였다.

無者先翻,有者在後

즉 이미 번역이 된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 먼저 번역하라.


구마라습과 현장의 번역은 차이가 있었으니,

구마라습의 번역본은 훨씬 문학적이고 현장 번역본은 직역에 충실하였다.

구마라습의 것은 읽기가 훨씬 쉬우나, 현장의 것은 딱딱하여 생경스럽다는 평이 있다.


현장과 관련된 책으로는 大唐西域記와 大慈恩寺玄奘法師傳이 유명한데,

전자는 주로 인도의 지리서에 가깝고,

후자는 기행일지에 가까워 훨씬 재미가 있다.


내가 오늘 이 글을 적고자 하는 바는,

위에서 적은 일반적인 이야기를 새삼 하려는 데 있지 않다.

길닦음으로 앞서 약간의 배경 정보를 소개를 해두는 것이다.

기실은, 대자은사현장법사전(大慈恩寺玄奘法師傳)에 나오는 다음의 말씀이 희한하여,

이를 다시금 새겨보려는 데 있다.


大城東南二里有窣堵波,高三百餘尺,無憂王所造,是釋迦菩薩於第二僧祇遇然燈佛敷鹿皮衣及布髮掩泥得受記處。雖經劫壞,此跡恒存,天散眾華,常為供養。法師至彼禮拜旋遶,傍有老僧為法師說建塔因緣。法師問曰:「菩薩布髮之時,既是第二僧祇,從第二僧祇至第三僧祇中間經無量劫,一一劫中世界有多成壞,如火災起時,蘇迷盧山尚為灰燼,如何此跡獨得無虧?」答曰:「世界壞時,此亦隨壞,世界成時,當其舊處跡現如本。且如蘇迷盧山壞已還有在乎,聖迹何得獨無?以此校之,不煩疑也。」亦為名答。

(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沙門慧立本 釋彥悰箋)


“큰 성 동남 2리에 솔도파(窣堵波) 즉 탑이 있는데,

높이 삼백여 척으로, 무우왕(無憂王, 아쇼카왕)이 지은 것이다.

이곳은 석가보살이 제2승지(오랜 시간) 때에, 

연등불을 만나 사슴가죽 옷을 깔고,

머리카락으로 땅을 덮고 수기를 받은 곳이다.

그로부터 몇 번이나 겁괴(劫壞)를 겪었으나, 

이 유적은 그대로 남아 있어,

하늘에서 여러 꽃을 뿌려 항상 공양을 하였다.


법사가 그에 이르러 예배하고 탑돌이를 하였다.

탑 옆에 노승이 있었는데,

법사에게 탑을 지은 인연을 말해주었다.

법사가 물었다.


‘보살이 머리카락을 땅에 덮었을 때는 제이승지 때였습니다.

제2승지로부터 제3승지에 이르도록 무량겁이 지났습니다.

그 하나하나의 겁마다 세계는 생겼다 없어졌습니다.

화재가 일어나면, 수미산도 잿가루가 된다고 하는데,

어째서 이 탑만은 홀로 멀쩡한 것입니까?’


답하여 말하다.


‘세계가 없어질 때, 이 유적도 역시 따라 없어집니다.

세계가 생길 때, 옛 터의 유적도 다시 원래대로 나타납니다.

저 수미산도 없어졌던 것이나, 지금 저처럼 우뚝 솟아 있지 않습니까?

어찌 성적(聖迹)만이 홀로 재현되지 않겠습니까?

저 수미산을 두고 견주어보면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역시나 명답이다.”


불교의 우주관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주기설이 있다.

즉 우주는 생기고 머무르다 파괴된 후 공으로 돌아간다.


아쇼카 왕이 지은 솔도파(窣堵波)의 항존성(恒存性)과 성주괴공 간 괴리가,

노승에 의해 멋지게 극복되고 있다.


성주괴공(成住壞空) 

이 4 phase는 각기 단독으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예컨대 괴(壞)는 다음 단계인 공(空)으로 연결되지만,

공(空)은 다시 성(成)을 예비하고 있다.

직선이 아니라 원환(圓環) 구조이기 때문에,

노승의 논변은 멋지게 성공한다.


그런데, 이것은 무아설(無我說)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삼법인 중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를 부정하고서는 불법을 논할 수 없다.

게다가 제행무상(諸行無常)에도 위배된다.


이제, 저 노승은 어찌 답할까나?


그를 소환하여 묻자 하여도,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천만에,

그는 저 탑을 지키며 大城東南二里에 아직도 있을 터인데,

무엇이 걱정인가?


수미산처럼, 성적(聖迹)처럼,

그 역시 다시 태어나 저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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