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義와 忠

소요유 : 2017.01.15 15:43


(副題 : 聚義廳과 忠義堂)


수호지(水滸誌)를 보면, 영웅호걸들이 양산박(梁山泊)에 모여 들자,

그들은 회의장에 취의청(聚義廳)이란 현판을 걸어둔다.

사회에서 죄를 짓고 쫓기듯 이곳에 들어왔지만,

자신들의 의인(義人)들인 바, 이들이 무리지어 모인 곳이란 뜻이다.


(출처 : http://you.ctrip.com/travels/wuxi10/1558636.html)


죄를 짓고 싶어 지은 것이 아니오,

악을 응징하며, 의기를 폈을 뿐이다.

법이 있으되 간신배들에 의해 법이 구부러지고,

그 집행이 바로 이뤄질 것이 도대체가 전망이 되지 않는 바,

사적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부득불 나라를 버리고 양산박에 숨어 들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장래를 지향하는 뜻이 한결 같은 것은 아니었다.

조개(晁蓋)뒤를 이은 두령 송강(宋江)은 조정에 귀순할 뜻을 품고 여러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에 의해 취의청(聚義廳) 현판은 내려지고 충의당(忠義堂)으로 바뀌어 걸려진다.

이는 단순히 현판이 달라진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忠義堂이라 하였기에 忠과 義가 동시에 내세워지고 있지만,

이는 애초의 義보다 忠으로 무게 중심이 급격히 쏠리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출처 : youtube)


나는 이 현판이 바꿔 달리는 장면에 이르자,

수호지는 비극으로 이어질 것을 앞서 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양산박으로 숨어들었을 때 비극이 잉태된 것이 아니라,

바로 송강에 의해 현판이 바뀌어 달리자 비로소 비극의 서막이 열리고 만다.


왜 그런가?

忠에 복속하는 순간 義는 외부 국가 권력이나 실제 행사 권력들에게 제한을 받게 된다.
이 양자는 얼핏 양립적이거나 상보적 가치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 공간에선 왜곡되기 일쑤고, 충돌하며 갈등을 생산해내곤 한다.


송강은 급시우(及時雨)란 별호가 있듯이,

때 맞춰 내리는 비처럼,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다.

과시, 인자(仁者)라 하겠다.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그는 忠으로 나아갈 줄만 알았지,

그게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義로부터 점점 멀어져감을 몰랐다.


길다란 줄 끝에 돌멩이를 매달고 큰 원을 그리며 돌릴 때,

원심력(遠心力)과 구심력(求心力)은 상호 힘의 균형을 팽팽히 유지한다.

하지만 줄을 손에서 놓으면 줄 끝에 매달린 돌은 원(圓)의 접선 방향으로 탈출하여,

지평선을 넘어 가없는 우주 밖으로 나아가게 된다.

자신을 넘어 황제, 국가를 향한 대원(大遠), 대충(大忠)의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상엔 중력이 작용하고 있으므로,

포물선(抛物線)을 그리며 나아가다 끝내는 지평선에도 이르지 못하고 바다로 추락하게 된다.

이게 중력에 구속된 물리적 세계의 실상이며,

불의에 물든 인간 세상의 모습과 비슷하다.


사실 이 정도만 되어도 잘 풀린 경우다.

때론 잠자리채에 포집되거나,
미사일에 요격 당하여,

미처 피지도 못하고 공중에서 박살이 나곤 한다.


송강 그는 忠을 쫓다,

仁도 잃고, 

급기야 형제들이 추구하던 義까지 와해(瓦解)시키고 말았다.

이 현실 제약적 문제 구도를 입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한 송강은,

108 영웅호걸의 양산박 두령을 맡기엔 역부족인 인물이라 하겠다.


(출처 : youtube, 영웅들은 간데 없고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한다.'는 깃발만 다 찢어져 홀로 나부끼다.)


양산박 인물들을 영웅호걸이라 한다면,

당시 강남 지방의 목주(睦州)에서 난을 일으킨 방랍(方臘) 역시 영웅호걸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송강은 조정에 귀의하여 사면을 받아 제 묵은 숙원을 이뤘다 하지만,

간신배들의 농간에 의해, 방랍을 제거하는 전선에 투입되어,

양산박 호걸들의 근 삼분지이(三分之二)를 잃고 만다.


당시 위정자들의 사치는 극에 달하였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방랍은 농민들을 규합하여 큰 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양산박 호걸들 역시 위정자들의 부패와 사회적 부정 때문에,

뜻을 펴지 못하고 양산박으로 숨어 든 것이 아니던가?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패라 할 수 있는 방랍 제거에 이용되어,

이웃 동료를 꺾고, 제 스스로도 패망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당시 방랍과의 전투에서 108인 중,

59명이 전사하고 일부는 이탈하고, 겨우 27명 만이 귀환한다.

귀환 후에도 저들 간신배들의 독수에 걸려,

독을 탄 어주(御酒)를 먹고 송강 자신도 죽고 만다.


결국 지리멸렬하고, 중간에 빠져 나간 사람들,

즉, 공손승, 노지심, 무송, 이준, 연청, 동위, 동맹 등 여남은 정도만 겨우 살아남는다.

사면(赦免)을 바라며, 조정에 귀순하지 않고,

양산박에 남아 끝까지 義를 지켰으면 이 지경에 이르진 않았을 것이다.


착한 것이 能함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능하지 못한 것을 무작정 비난할 일은 아니지만,

송강처럼 능하지 못하면서 두령이 된 점은 비난 받아야 한다.


우리네 정치 현실에서도 이와 같다.

악한 이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개중엔 착해 보이는 이일지라도,

이게, 대권을 맡기기엔 염려가 많이 되는 이유가 된다.


故曰仁者人也,義者我也

(春秋繁露)


“고로 仁은 타인이며, 義는 나인 것이다.”


직역을 하였은즉, 좀 부연 설명을 해두어야겠다.

이 말은 서한(西漢)의 동중서(董仲舒)가 한 것인데,

仁은 타인과 관련된 것이며, 義는 오로지 나와 관련된 것이란 말이다.

義란 글자는 羊과 我자로 되어 있는데, 羊은 善을 뜻하고 我는 나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義는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의 태도, 의식이 바른가, 宜 즉 마땅한가 여부의 판단에 관련된 것이다. 


仁謂往,義謂來,仁大遠,義大近。

(春秋繁露)


“仁은 감을, 義는 옴을 이르며,

仁은 大遠, 義는 大近이다.”


仁은 타인에게 미치는 것인즉 멀리 가 많이 미칠수록 그 지극함에 이르고,

義는 자기 자신의 문제인즉 내게 다가와 안으로 깊숙이 미칠수록 그 지극함에 이른다 하겠다.


때문에, 義는 필연적으로 주체적인 개인의 의식 자각과 자유 의지 문제를 일으킨다.

我가 羊한가 아닌가?

내가 善한가? 의로운가(宜, 誼, 義)?


정치 현실에선,

황제에 충성하고, 국가를 향해 애국하는 것은 외부에서 규율되어 강제될 경우가 많다.

하지만 義란 것은 전적으로 자기 전속적인 차원의 덕목이다.


孟子曰:「魚,我所欲也;熊掌,亦我所欲也,二者不可得兼,舍魚而取熊掌者也。生,亦我所欲也;義,亦我所欲也,二者不可得兼,舍生而取義者也。生亦我所欲,所欲有甚於生者,故不為苟得也;死亦我所惡,所惡有甚於死者,故患有所不辟也。

(孟子)


“맹자 말씀하시다.


‘생선도 좋아하고, 곰발바닥 요리도 좋아하지만,

둘을 모두 먹을 수 없다면, 

생선을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할 것이다.

삶도 바라고, 義도 바라지만,

둘을 모두 다 가질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義를 가질 것이다.

삶을 원하는 바이지만, 삶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는 바, 구차한 삶을 구하지 않는다.

죽음을 싫어하지만,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는 바, 환난일지라도 피하지 않는다.’”


맹자의 말씀을 음미하면,

義란 것이 충(忠)이나 애국(愛國)과는 사뭇 다른 가치임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子路曰:「君子尚勇乎?」子曰:「君子義以為上。君子有勇而無義為亂,小人有勇而無義為盜。」

(論語)


“자로가 여쭙다.


‘군자는 항상 용기가 있습니까?’


공자 말씀하시다.


‘군자는 義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군자가 용기는 있되 의로움이 없으면 난이 일어난다.

소인이 용기는 있되 의로움이 없으면 도적이 된다.’”


어제처럼 강추위에도 십만여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었다.

이것은 시민들이 나라에 충성하고 애국하려고 나온 것이 아니다.

시민 각자의 자각에 따라 스스로 나온 것이다.

그 자각의 내용을 나는 義라고 생각한다.


대학생 서넛이 얇은 수의(囚衣) 입은 이재용 역할을 하며 취위에 떨고 있다.
저것을 두고 그 누가 있어 나라에 충성하고, 애국하고 있다고 하겠는가?

저것은 그저 다만 義로움를 자각하고, 한편 不義에 분노하고 있는 것임을.

저런 자리에 태극기를 흔드는 것은 차라리 辱된 짓이다.


羞惡之心,義之端也

(孟子)


여기 수오지심을 나는 한마디로 마땅함이라 규정한다.

마땅히 그러해야 함에 대한 자각 의식,

그렇지 않음을 두고 부끄러워하고, 분노하는 마음.

그것을 일러 義로움의 단서라 한다.


때문에 저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오지 않는다.

다만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선다.

촛불을 드는 것은,

제 마음을 밝히고자 함이지,

제 양심을 가리거나, 팔려고, 

태극기 뒤에 숨는 소위 자칭 애국 단체들과는 다른 것이다.


때론 어떤 이에게 광장은 곧잘 장터가 된다.

슬픈 일이다.


※ 참고 글 

☞ 촛불과 태극기


ps)

義란 글자는 羊과 我로 되어 있다.

羊은 善을, 我는 남이 아닌 자신을 뜻한다.

여기 善은 남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對한 것이다.

남을 향하면 仁이 되지만, 자신을 향하면 義가 된다.


仁과 義를 겸비하면 좋겠지만,

하나만 가진 이를 택하여야 한다면,

이 暴烈하는 惡의 시대엔 仁보단 義에 철저한 인물을 취하겠다.

다음 번 대선엔 義氣로움에 충만한 이가 정치 대표가 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善한 義人은,

잘 벼린 푸른 칼처럼, 

언제나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남에게 당당하며, 

對사회적 책임을 철저하게 의식하기 때문이다.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현지패(韋弦之佩)  (0) 2017.01.24
호가호위(狐假虎威)  (0) 2017.01.24
새벽길 하얀 봉투 하나  (0) 2017.01.19
義와 忠  (0) 2017.01.15
조윤선과 아포플라네시스 그리고 횡설수설  (0) 2017.01.12
염파석  (0) 2017.01.02
실낙원(失樂園, Paradise Lost)  (0) 2017.01.01
Bongta LicenseBongta Stock License bottomtop
이 저작물은 봉타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행위에 제한을 받습니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