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즈 염불
째즈 염불
내가 최근 며칠 간 연일 북한산을 올랐다.
겨울산의 극도로 절제된 풍광은,
은밀하게 감춰진,
그 존재의 근원인,
그 곳으로 나를 이끈다.
以深為根,以約為紀 ...
(莊子)
“깊은 것을 근본으로 삼고,
간략함을 기준으로 삼아서 ...”
겨울산은 장자에 나오는 이 구절처럼,
절제와 깊이를 동시에 아우르며,
지금, 천년 침묵 속에 잠겨 있다.
겨울 금강산(金剛山)을 개골산(皆骨山)이라 한다.
겨울산은 이파리 다 떨구고 앙상하게 서 있는 나무 외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리 골체(骨體)만 드러내고 있는 산을 골산이라 일컫는 것이다.
석산(石山)도 골산이라고 하나,
이 경우엔 애초부터 아예 초목이 자라지 못한다.
허나 개골산은 여름산의 무성함을 알기에, 그 극적인 반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기에 사물 실상(實相)의 무상성(無常性)을 뼈저리게 증인(證認)할 수 있다.
개골산(皆骨山)은 골산(骨山) 앞에 개(皆)를 더하여 골산을 그 궁극으로 몰아간다.
허나, 이미 골산(骨山)일지언대,
굳이 이리 개(皆)를 끌어 붙이는 수고를 더함은,
도시(都是) 부질없는 짓이다.
개(皆)는 허사(虛辭)에 불과할 터인데,
중생은 어리석기 짝이 없으니, 이리 다 아는 일을 애써 더하며,
어둠에 등불 심(芯)을 돋는 것임이리라.
구차하다.
이런 골산에 들면,
우리는 꾸미지 않은 순수 근원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부러라도 인적이 드문 등산길을 택함은,
외부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겨울산을 전격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헌데, 며칠 내내 염불 소리가 골골을 쑤시며 돌아다닌다.
특히 어제는 산 위에 있는 영.추.사(靈.鷲.寺)란 절로부터 염불 소리가 요란하게 쏟아져 내려온다.
여느 염불과는 다르게 방정스러울 정도로 박자가 재빠르다.
그래서 그런가 바삐 등마루를 넘어 내가 서 있는 곳,
바람에 쓸려 눈더미가 쌓인 바로 그 골짜기까지 급히 흘러들며 내리깔린다.
염불도 요즘엔 시속(時俗) 따라 이리 방정스러운 모습으로 나투고 있음인가?
내 결코 째즈를 비하하려 함이 아니나,
부지불식간 저것을 째즈 염불이라 부르고 만다.
아니, 산길에서 툭하면 마주치는 염치없는 노인들,
그들이 틀고 다니는 라디오에서 들려 나오는,
그 하나같은 뽕짝에 상사(相似)하여 뽕짝 염불이라 하여도 가하겠다.
국립공원이 일개 절집의 앞마당인가?
소리가 제 경내 안에 머무르며, 거기 든 대중(大衆)에만 미치면 족할 것이언대,
어이하여 고출력 스피커로써 산 넘어 골 건너 중생(衆生)까지 감히 키질을 하려 함인가?
내 이미 개골산의 염불을 듣고 있음인데,
저들은 어이하여 내 소맷자락을 잡아 끌고, 내 귀를 애써 붙잡아 비틀며,
어느 뽕짝승인줄 모를 이의 염불을 들으며 깨춤을 추라고,
강권(强勸)을 하고 있는가 말이다.
내 마음의 뜨락엔,
이미 낙락장송(落落長松) 하나가 자라고 있음이라,
색주가(色酒家) 앞,
이미 쭈굴쭈굴해진 면상에 박가분 덕지덕지 바른 늙은 호객꾼은,
지나는 이 아무나,
소맷자락 끌어 들여,
술 멕이고,
돈 앗을 궁리를 튼다.
내 이르노니,
네 집 불사(佛事)에,
나를 동원하지 말지라.
一日僧問趙州。如何是祖師西來意。州云。庭前柏樹子。
(佛果圜悟禪師碧巖錄)
“어느 하루 중이 조주 스님에게 여쭙다.
‘조사가 서쪽으로부터 오신 뜻이 무엇이옵니까?’
조주 스님이 말씀 하시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는,
낱낱 개개인의 주체적인 체험으로 실증(實證)하는 것임이라,
즉 냉온자지(冷暖自知) 냉수 먹고 차고 뜨거운 것은 스스로 알 수 있을 뿐인 것을.
어째서 저들 뽕짝승들은 온 산이 떠나갈 듯 뽕짝 염불 틀어대고는,
꾀어내며, 지나는 객손의 일에 참견을 하려 함인가?
오지랖도 넓다.
산승(山僧)은,
산에 들은 까닭을 알아야 한다.
만약 잘못 들었으면,
차라리 하산하여,
모리를 탐하는,
장사꾼이 되는 것이 낫다.
僧海州參。師問曰。汝出家為甚麼。曰。為求出苦。師曰以何法而求出苦。曰。我資鈍。但念佛。師曰汝念佛常間斷否。曰合眼睡時。便忘了。師震威呵曰。合眼便忘。如此念佛。
(念佛警策)
“해주(海州)란 중이 진위(震威) 스님을 뵙다.
스님께서 물으시다.
‘너는 무엇을 위해서 출가하였는가?’
답하여 아뢰다.
‘괴로움으로부터 빠져 나오려 함입니다.’
스님이 어떤 수로 그리하려는고 하고 물으시다.
답하여 아뢰다.
‘제가 아둔하니, 다만 염불만 하렵니다.’
스님께서 네 염불할 때, 쉬지도 않고 하느냐고 물으시다.
답하여 아뢰다.
‘눈을 붙이고 잘 때는 잊습니다.’
진위(震威) 스님께서 꾸짖어 말씀 하시다.
‘눈을 붙이고 잘 때, 이때야말로 염불을 해야 하느니라.(염불에 좋은 때, 마땅한 때니라.)’”
내 고하노니,
북한산 정릉골을 내리 점령하며,
째즈 염불, 뽕짝 염불송을 틀어재끼며,
대낮에 지나는 선량한 이들을 그만 괴롭히고,
그대 자신을 위해 홀로 염불하라.
허나,
진위(震威) 스님은,
과연 잠잘 때 염불하라 하심인가?
정작은 잠을 자지 말고 염불을 하라 하심인가?
이게 가능한가?
이 말은 결국 염불을 아예 하지 말라는 말씀이시런가?
庭前柏樹子。
뜰 앞의 잣나무
조주 스님의 이 말씀을 아무리 붙잡고 씨름을 한들,
결코 땡중은 답을 얻을 수 없다.
祖師西來不賣瓜
달마대사가 서쪽에 온 것이,
기껏 외(瓜)나 팔려고 하였음인가?
툭하면,
석가모니 팔고,
달마대사 거들며,
불사(佛事)나 일으키며,
골산(骨山)에 든 이를 괴롭히려고,
방금 벼린 시퍼런 칼보다,
더 푸른 머리카락 자르고 중으로 나섰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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