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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귀

상학(相學) : 2017. 4. 23. 18:35


내가 관상 공부를 한 지는 좀 된 폭이다.

하지만 미아리에 또아리를 트려 작정하며,

주력할 형편은 아닌 일개 농부에 불과한즉, 그 공부에 충실치 못하다.

만약 죽자 사자 덤벼들면,

미아리 한 귀퉁이 외진 곳이나마,

내 차지가 될 수는 있었으리라.

지금은 어디 특별히 모신 선생이 계신 것도 아니오,

그저 틈이 날 때에 서책을 들추며 더듬기 때문에,

아직은 한참 모자란다.

 

여기 시골에 오면서 많지 않은 사람을 겪었지만,

평생 대하였던 것보다 몇 곱은 더 많은 풍파를 만났다.

여긴 생(生)으로, 발가벗겨진 사람들이 태반이더라.

그야말로 적나라(赤裸裸) 걸친 옷 하나 없이 붉은 몸뚱아리로,

거리를 횡행(橫行)하는 인격들을 무시로 마주하게 되었다.

 

본능에 충실한 이.

충동을 제어할 수 없는 원시인.

제 잇속을 위해 사람의 도리를 벗어난 불한당.

이 생생한 사람들을 만났다.

 

君子喻於義,小人喻於利。

 

군자는 의에 밝지만, 소인은 이를 밝힌다.

 

君子有舍生而取義者,以利言之,則人之所欲無甚於生,所惡無甚於死,孰肯舍生而取義哉?其所喻者義而已,不知利之為利故也,小人反是。

 

"군자는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利)를 두고 말한다면,

즉 사람의 바라는 바가 삶보다 더 심한 것이 없고,

싫어하는 바가 죽음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누가 기꺼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는가?

밝게 아는 것이 의일 뿐,

이(利)가 이(利)임을 아지 못할 뿐이다.

소인은 이와는 거꾸로다."

 

내가 시골에 들어가 뼛속 깊이 깨달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구절이다.

인걸(人傑)은 찾아보기 어렵고 시뻘건 잇속만 밝히는 사람을 실로 많이도 만났다.

시골 땅에 들어가서 그 요의(要義)를 깨우쳤으니,

여기 시골은 공부 터로서는 수승(殊勝) 길지(吉地)라 하겠다.

 

하여, 지금까지의 내 공부가 사뭇 설익고, 한참 모자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서발 깊은 우물 밑바닥보다 더 아래에 숨겨진 사람 마음을 알기는 어렵다.

게다가 막연한 거죽 모양으로 사람을 대하여서 자칫 차질이 생긴다.

옛 사람들은 곧잘 상(相)을 살펴 앞일을 헤아리고, 미래를 개척해나갔다.

이에, 이 분들의 행로를 따라가 보기로 하였다.

 

그래 자료를 모으고, 시간을 내서 한 철 겨우내 이에 매달린 적도 있다.

지금 내 컴퓨터에는 평생 걸려도 다 읽지 못할 정도로 많은 서책이 저장되어 있다.

중국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거둔 것으로 고전 위주로 날줄을 삼고,

현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강석(講釋), 경험을 씨줄로 엮어

틈틈이 꺼내 읽는 가운데 내 공부는 조금씩 나아가리란 기대가 있다.

 

오늘 이야기는 칼귀에 대하여 미치기로 한다.

상학(相學)에선 이를 계취이(鷄嘴耳)라 이른다.

이 상은 무이주(無耳珠)라 하여 소위 귓불이 없는 상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 참고 글 : ☞ 청문회와 관상 1)


기실 일견 이런 귀를 가진 상이라 하여도,

일반 논이(論耳) 이론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아래 여러 경우가 복합적으로 섞인 때도 있다.

잘 살필 일이다.

 

가령 솔풍이(兜風耳)라 하여,

귓바퀴가 길긴 하되 아주 작은 경우,

이럴 경우 好勝 叛逆이라,

즉 승부욕이 강하고, 반역 기질이 있으며,

체면을 중히 여기며, 남에게 승복하질 않는다 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감정 방면으론 적극적이고 진취적이지 않아,

여러 사람의 연애 대상이 되곤 한다.

 

귓바퀴가 뒤집힌 듯한 모습을 한 경우,

이를 상학에선 반이(反耳)라 한다.

大起大落, 出外謀生較好.

풍파가 많다.

관외로 나가 새로 생을 도모하는 것이 비교적 좋으리라.

 

내가 정치에 대하여는 거의 문외한이다.

그 쪽에서 요즘엔 활극보다 더 희한한 일이 많이 일어나,

눈을 닫고 살아도 절로 보게 되고,

귀를 막고 살아도 절로 들리게 된다.

 

오늘 동영상 하나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 등장하는 이 가운데 칼귀를 여럿 보게 되었다.

 



(출처 : 파파이스#142, youtube)

 

김종인, 문재인, 김어준, 이해찬

 

이리 여럿을 한 번에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사실 앞의 글에서 인물을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이제야 밝히거니와, 박근혜, 우병우 역시 이들과 같이 계취이(鷄嘴耳)이다.

 

이 시대 정치 관심 무대엔,

유난히 이 관상을 사진 이들이 많다.

과시 닭상들의 전성시대인가 싶다.

 

이 상에 대하여는 앞에서 잠깐 살펴보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바이니 차제에,

오늘은 다른 관점에서 조금 더 보태보련다.

 

대저 일득일실(一得一失)이며, 일장일단(一長一短)인 바라,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이며,

하나의 장처가 있으면 하나의 단점이 있는 법.

 

대개 이 상을 나쁘게 보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이 상을 가진 이는 어떠한 문제에 임하면, 그 뿌리까지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

만약 마땅한 해결책이 나타나지 않으면, 맹세코 쉬지 않고 찾아내리라 다짐을 한다.

 

그래서 김어준이 더플랜을 끝까지 만들어내었을까?

그는 얼굴을 양 손으로 훑곤 한다.

애를 쓰고 있구나.

내가 가까이 있으면,

이에 대하여 그에게 한 마디 부주를 하여 줄 수는 있겠는데,

그와 나는 천리 먼 길 사이로 갈려 있다.

 

나이가 들면서 귓불이 생기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경우 운명이 획기적으로 바뀐다.

이 말씀을 듣고 혹여,

요즘 성형 수술 기술이 발달하였는데,

이에 의지하려는 분이 계실까 싶기도 하다.

 

세상에 완벽한 상을 가진 이는 거의 없다.

혹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를 지닌 부처라면 모를까?

 

부처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외쳤다.

중생이 곧 부처인데,

나라고 이리 외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으랴?

(※ 참고 글 : ☞ 중동(重瞳))

 

부처의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는 서책에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각자는 일백팔상(一百八相) 일만종호(一萬種好)를 갖추고 있음이다.

 

각자는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제 상호(相好)를 제 각각 자랑할 일이어다.

내가 상학 책을 읽다 혹 내 상이 나쁘게 나온다한들 그게 대수가 아니다.

 

내가 상학을 공부하는 짓은,

할 일없이 그에 매이려 함이 아니다.

다만, 저이들이 상(相)을 분류하고, 체계화하고, 조직하며, 평가하는,

그 방법론, 태도, 그리고 고심참담 노력하는 모습을 배우고 참고하려 함이다.

 

선인들의 각고면려(刻苦勉勵)하심에, 존경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어 언제나 내 사뭇 미치지 못함에 부끄럽다.

 

하지만,

각자는 자기 상(相)을 사랑할 일이다.

최대한 자기 상의 잠재된 능력을 자기 창조적으로 끌어낼 일이다.

다만 그것이 소아(小我)에 매몰되지 않고,

대아(大我)로 나아가고 있는가는 간단(間斷)없이 점검하여야 한다.

이것만 제대로 갖추고 있다면,

세상에 좋은 상은 밖에 별도로 있지 않고,

오직 내 상 만이 제일 좋을 뿐인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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