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명지성(好名之性)
호명지성(好名之性)
앞의 글에서, 사람은 이익에 집착하는 성품이 있다 하였다.
(※ 참고 글 : ☞ 호리지성(好利之性))
헌데, 이와 더불어 또 하나, 크게 의지하는 것이 있다.
오늘은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련다.
어떤 왕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와 관련된 이야기 하나가 여기에 있다.
화려한 깃발을 휘날리며 수많은 배들이 강위에 떠 있었다.
그 왕이 참 배도 많다고 감탄하였다.
이 때 곁에서 시종하던 어떤 중이 말하였다.
“소승 눈에는 단 세 가지 이름의 배만 보입니다.”
“그게 무엇인고?”
“명예, 재물, 권세란 깃발을 단 배, 오로지 그 셋만 보이옵니다.”
하니까,
이 셋은 곧, 名, 利, 權이 되겠다.
사람이 새벽에 일어나, 장바닥을 누비며,
바삐 설치는 까닭은 실로 이 셋을 찾아 나섬이 아니겠음인가?
헌데, 여기 잠깐 멈추고,
한비자(韓非子)의 울분을 먼저 듣고 이야기를 잇자.
聖人之所以為治道者三:一曰利,二曰威,三曰名。夫利者所以得民也,威者所以行令也,名者上下之所同道也。非此三者,雖有不急矣。今利非無有也而民不化,上威非不存也而下不聽從,官非無法也而治不當名。三者非不存也,而世一治一亂者何也?夫上之所貴與其所以為治相反也。
(韓非子 詭使)
“성인의 치도 수단은 세 가지다.
하나는 이(利, 이익)고,
둘째는 위(威, 위엄, 위세)이며,
셋째는 명(名, 명예)이다.
대저, 利는 백성(민심)을 얻기 위한 것이며,
威는 법령을 행하기 위함이며,
名은 상하가 함께 하는 도리이다.
이 셋이 아니라면, 비록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있다한들, 급하지 않다.
지금, 利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백성이 감화되지 않고,
위에, 威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랫사람이 듣고 따르지 않으며,
관에, 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치적이 名에 걸맞지 않는다.
셋이 없는 것이 아닌데,
세상이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워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무릇, 위가 귀하게 여기는 것과 그 다스리는 것이 상반되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여기서 利, 威, 名을 지적하며,
이에 의지하여 사람들을 다스린다 하였다.
이는 이것들이 사람들의 기본 본성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헌데, 지금 이것에 벗어난 자들이 세상을 횡행하며,
간악한 자들이 이 그늘로 숨어들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그 까닭은 사대부들이, 제 잇속을 노려,
법령을 어기고, 재물을 모으고, 군주의 위엄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군주 또는 나라에 귀속될 것을,
중간에서 간신, 사대부들이 가로 채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한비자는 이를 분석하며,
세상이 어지럽혀지는 현실을 정밀하게 그리고 있다.
오늘 글은 이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양대 축인, 명리(名利)를,
한비자가 깊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그 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궤사(詭使)편을 더는 따라가지 않겠다.
조국 그는 호리지성(好利之性) 발현 단계를 넘어,
지금 호명지성(好名之性)의 전형적 모습을,
직접 세상을 향해 가르쳐주고 있다.
好名之人,能讓千乘之國;苟非其人,簞食豆羹見於色。
(孟子 盡心)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은 천승의 나라도 사양할 수 있으나,
진실로 그러하지 않는 사람은,
한 그릇의 밥과 국에도 탐내는 낯색을 보이고 만다.”
지금 여기서의 名은 한낱 개인의 명예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의와 염치를 가진 고상한 인격의 덕성을 지칭하고 있다.
그는 sns를 통해 정의를 팔고, 명예를 크게 샀다.
하지만, 이제, 그의 실체가 나날이 새로 거듭 밝혀지고 있다.
그는 땅에 실추된 헛된 명예임에도,
단사두갱(簞食豆羹)조차 내려놓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 簞食豆羹
글자로는 대나무 그릇에 담긴 밥과 제기(祭器)에 담긴 국인데,
변변치 못한 음식을 의미한다.)
古今士率有三品 : 上士不好名, 中士好名, 下士不知好名。
上士宜道德, 中士重功名, 下士重辭章, 斗筲之人重富貴。
(呻吟語 品藻)
“고금 불문, 사람은 세 등급으로 나눌 수 있다.
상사(上士)는 세상의 명예 따위는 관심조차 없으며,
중사(中士)는 명예를 크게 의식하며,
하사(下士)는 명예가 무엇인줄조차 모른다.
상사(上士)는 도덕을 중시하고,
중사(中士)는 공명을 무겁게 여기며,
하사(下士)는 사장(문장, 그 기교)을 무겁게 여긴다.
두서지인(보잘 것 없는 사람)은 부귀를 중시한다.”
신음어(呻吟語)는 명(明)의 여곤(呂坤)이 지은 것인데,
관리들의 지침서로 널리 읽혀지던 명저이다.
그런데, 책 이름이 왜 하필 신음어인가?
呻吟,病聲也。呻吟語,病時語也。病中疾痛,惟病者知,難與他人道,亦惟病時覺,既瘉,旋復忘也。
予小子生而昏弱善病,病時呻吟,輒志所苦以自恨曰:「慎疾,無復病。」已而弗慎,又復病,輒又志之。蓋世病備經,不可勝志。一病數經,竟不能懲。語曰:「三折肱成良醫。」予乃九折臂矣。㽸痼年年,呻吟猶昨。嗟嗟!多病無完身,久病無完氣,予奄奄視息,而人也哉?
....
(呻吟語 序)
“신음이란 병이 들었을 때 내는 앓는 소리이다.
신음어란 병이 들었을 때 내는 말이다.
병이 들면 아픈데, 이는 오로지 병자만이 알 뿐,
남들은 이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또한 병이 들었을 때만 알고,
다 나으면, 다 잊고 만다. .... ”
평생, 사람들이 아팠을 때의 기억을 잊지 않는다면,
시련을 다시는 겪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여곤은 삼십년간의 깨달음을 신음어란 책으로 만들어,
약(藥)으로써 지녔다 하였음이다.
사람 하나가 있어,
sns에서, 매양 정인군자인 양,
늘상, 피를 토하듯, 외쳤으되,
실제 행동은 스스로 뱉은 말을 배반한 삶을 살았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노릇인가?
이 이중 복선(複線)의 삶을 되돌아본다면,
그야말로 신음이 절로 토해져 나올 판이다.
이제라도, 그가 다시 바른 길로 되돌아오길 바란다.
有過是一過,不肯認過又是一過。一認則兩過都無,一不認則兩過不免。
彼強辯以飾非者,果何為也?
“잘못이 있으면 그것은 하나의 잘못이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다시 또 하나의 잘못을 보태는 꼴이다.
한번 인정하면, 두 가지 잘못이 모두 없어진다.
한번 인정하지 않으면, 두 가지 잘못을 면할 수 없다.
강변하며 잘못을 꾸며 숨기려 하는 자는,
과연 무엇 때문인가?”
진중권은 정의당 당원이다.
한 때, 故노회찬, 유시민과 함께, 이야기 모임을 주도한 적이 있다.
(※ 노유진의 정치카페)
노회찬은 돌아가셨지만,
유시민 그가 이재명을 싫어하고,
조국을 옹위하기 위해 변설을 늘어놓는 일은 하나도 이상할 것도 없다.
그의 인격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진중권의 침묵은,
아무리 조국과 평소 친했다한들 납득할 수 없었다.
헌데,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고,
정의당에 탈당계(脫黨屆)를 제출하였다.
......
다음은 진 교수와의 일문일답.
탈당계를 언제 냈나.
“최근에 냈다.”
탈당 처리는 된 건가.
“모르겠다. 아마 안 해줄 거 같다. 저에게 당에서 설득 중이다.”
조 장관 적격 판정 등 정의당이 보인 일련의 조국 사태 대응 방식에 대한 불만 때문인가.
“그런 것 다 포함해 이것저것 세상이 다 싫어서 탈당계 낸 거다.”
[출처: 중앙일보] 진중권, 정의당 탈당계 제출 "조국 데스노트 제외 실망“
나도 세상이 싫다.
촛불 정신 네다바이 한 현 정권이 싫다.
저들이 그리 외쳤던 세월호, 가습기, 사자방 ...
뭣 하나 시원하게 해결된 것이 없다.
박주민은 세월호 팔아 국회의원 되었는데,
과연 그는 지금 누구를 위해 싸우고 있는가?
이제 집권 세력의 일원이라면, 무엇인가 과시적 성과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가 뱉은 말과 행위가 다르다면,
어찌 그를 신뢰할 수 있으랴?
虛則知實之情,靜則知動者正。有言者自為名,有事者自為形,形名參同,君乃無事焉,歸之其情。
(韓非子)
“마음을 비우면 실제의 정황을 알 수 있고,
고요히 머무르면 움직이는 것의 정체를 알 수 있다.
말할 것이 있는 자는 스스로 말하게 되고,
일하려는 자는 스스로 업적이 드러나게 된다.
말과 실적의 일치 여부를 대조하면,
군주는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그 실정을 바로 알게 된다.”
여기 형명참동(形名參同)이란,
명분과 실적의 일치 여부를 대조한다는 뜻이다.
하니까, 신하가 내세운 말,
즉 주장한 명분과,
실제 그 말대로 실현된 실적.
이 둘을 대조한다는 뜻이다.
이게 제대로 아니 되면,
어찌 하는가?
신상필벌(信賞必罰)
따지고 보면 한비자의 변설 중 현실적 실천 요술(要術)은 바로 이 네 마디로 집약된다.
形名이 함께 맞으면 상을 주고,
다르면 벌을 줄 뿐이다.
나는 진중권이 그 동안 입을 다물고,
비겁하게 숨어 있는 줄 알았다.
헌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 동안 정의당 보고, 비굴한 짓을 그만 두라 하였던 모양이다.
그가 다시 귀환하였은즉,
세상이 다 싫어졌다는 그의 말을,
이제 지전(紙錢) 삼아 허공중에 사르며,
復其精神,延其年壽
“그 정신을 다시 부르고, 수명을 이어”
초혼(招魂)
혼을 불러내볼꺼나?
헌데, 아시는가?
본디 초혼의식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작은 살아 있는 자를 위로하기 위한 장치인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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