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의 대도를 뺏어 손에 들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What we cannot speak about we must pass over in silence.
비트겐스타인의 유명한 말이다.
하지만, 내겐 이게 그리 놀랍지 않다.
이미 이런 정도는 불교에서 일상으로 다루던 것이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순간 그것은 nonsense가 되고 만다.
불교에선 진작부터 불립문자(不立文字)라며,
언어를 통해 진리를 전달할 수도 없고,
진리에 도달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하니까, 이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말길이 끊어진 자리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사물의 이치를 곧잘 감각이나 감정에 의지하여 판단하곤 한다.
때론 이성적으로 분석, 추론하고 판단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데는,
지력내지는 지성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하며,
판단하는데 일정분 노고가 또 따른다.
이에 따라, 미치지 못하는 바,
곧잘, 남의 의견이나 판단에 의지하여,
제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이는 너무 쉽다.
그저 박수를 치고 열광하면 되니까.
보아라,
팬티 내려라 할 때,
팬티 내리면 내 신도라는 말을 하는 저 천박함에도,
여전히 모여들지 않는가?
이성은커녕 감정에 복속하여,
그저 좆아 따르는 것처럼 쉬운 일이 어디에 있는가?
게다가 그 무리에 들면, 의지처가 생기며, 안전이 확보되고,
턱 맡기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만다.
게다가, 잘하면 절로 천당 가는 티켓도 확보된다.
여간 수지 맞는 장사가 아니다.
그러함이니, 홀로 판단하고, 외부의 저항 세력과 다투며,
골머리를 앓을 일이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남의 의견이나 판단을 무조건 믿는 것엔 위험이 따른다.
그가 늘어놓는 자료를 점검하고, 그의 판단이 옳은지 따지지 않으면,
자칫 그가 편 그물에 걸려, 팔딱 거리는 물고기 신세가 되거나,
화살에 맞은 가여운 새가 되어 바르르 떨며 오늘 이후를 곧 지우게 될 수도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감각에 내맡기거나,
이성을 동원하여,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넘은 것은 누구도 확실한 말을 할 수 없다.
혹간 확실한 척 말을 한다 한들,
그럴 양 들릴 뿐, 그것을 논증할 수 없다.
이러한 경우, 사람들은 곧잘 미신에 빠지거나,
신화의 세계로 끌려 들어간다.
이때엔 말을 잘하는 인간에 속아 넘어가거나,
사기꾼의 농간에 혹하여 자신을 내맡기곤 한다.
하기에, 무당을 찾고, 교주 발밑에 복속하고,
말빨에 속고, 권위에 털리며, 겁에 질려,
제 재산을 탕진하고, 영혼을 저당 잡히곤 만다.
(유시민, 이재명 - 김인성 )
내가 ‘유시민, 이재명’이란 책을 읽고 문득 떠오른 바,
임제선사(臨濟禪師)의 다음 말씀이다.
道流!爾欲得如法見解,但莫受人惑,向裏向外逢著便殺——逢佛殺佛、逢祖殺祖、逢羅漢殺羅漢、逢父母殺父母、逢親眷殺親眷——始得解脫。不與物拘,透脫自在
(鎮州臨濟慧照禪師語錄)
“도를 닦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법다운 견해를 얻으려면,
다만, 세상 사람의 미혹에 들지 마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모조리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겨레붙이)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래야 해탈할 수 있으며,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철저히 벗어나 자유로우리라.”
최소한 뉴스만 제대로 대하여도,
유시민과 이재명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굳이 저 책을 읽지 않아도,
진작에 다 알고도 남음이 있다.
고도의 지성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저 마음을 맑히고 있으면,
가을 물에 비춘 달처럼 절로 떠오는 일에 불과하다.
다만, 저 책은 철저하니 이성에 기대어,
이들 인격 내용을 절개하고, 분절하여 적나라하게 그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헌데, 어찌하여 사람들은 유빠가 되고, 이빠가 되며,
요설에 미혹하여 털빠가 되어,
사물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入此門來 莫存知解
절집 일주문을 들어서다 보면 턱하니 걸린 저 글을 대할 때가 가끔 있다.
‘이 문을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내지 마라’
이것 글자 그대로 알게 되면,
큰 탈이 난다.
(풋)불교도들의 병통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저, 시시비비 가리며,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비판하지 말며,
선한 마음을 품으면 극락에 간다고 생각한다.
이게 다 옳은 줄 알고,
삿된 자들이 날뛰는데도 오불관언 모른 척 한다.
세상은 함께 공업(共業)으로 일궈지는 것.
나만 착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회적 책무를 저버리고,
오로지 제 안일만 구하는 비겁한 짓이다.
知解를 내지 말라는 것은,
언어도단, 불립문자의 세계를 두고 하는 말일 뿐,
이 피비린내 나는 현상계에선,
철저하니 이성에 입각하여 재단하고,
시시비비를 따져,
굽은 것을 바로 펴고,
악한 이를 배척하여야 한다.
이게 사회 속에서 사는 이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다.
산에 들어가 도를 닦는다한들,
최종적으로는 입전수수(入廛垂手)라,
저잣거리 장바닥으로 돌아와,
이는 곧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
중생을 구제하는 일에 종사하여야 하는 법.
만약, 죽을 때까지 산 속에 처박혀,
시줏 쌀이나 축내고,
참선합네 하며, 애꿎은 좌복에 구멍이나 내고,
아무런 도를 일구지 못하였다면,
어찌 그에게 죽어 지옥불이 기다리지 않을쏜가?
아니면, 명진 스님처럼,
세상의 목탁이 되어, 세상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깨우치거나,
야차가 되어, 삿된 무리들의 목을 따는 일에 종사할 일이다.
이런 그가 어찌 산속 도인보다 못할쏜가?
임란 당시 살생계 받은 중도 칼과 창을 들고,
왜적을 무찌르려 일떠 일어났다.
명진은 이 시대의 영원한 승병이다.
그의 도를 어찌 산 속에서 쌀이나 축내는 땡중과 비교할 수 있으랴?
如奪得關將軍大刀入手 逢佛殺佛 逢祖殺祖 於生死竿頭 得大自在 向六道四生中 遊戱三昧
(無門關)
“관우의 대도를 뺏어 손에 들고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
생사간두에 대자재를 얻어,
육도사생 중 유희삼매하리라.”
부처만 죽이면 해탈하는 줄 아는가?
제 잇속을 위해 세상을 속이고,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를 만나면,
관우의 대도를 빼앗아 죽일 일이다.
이러고서야,
장부라 할 수 있는 법.
차라리,
해탈은 그 다음의 일이다.
하여,
요석공주가 외로울 것 같으면,
중도 품어줄 수 있는 법.
길을 가다 목이 마르면,
곡차도 들이킬 수 있는 법.
지가 원효도 아니며,
청정승(淸淨僧)도 못되면서,
고결한 척, 착한 척 폼을 잡지만,
이게 다 허당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뭐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나, 상제보살(常啼菩薩)이라도 된단 말인가?
제 호주머니에서 동전 한 닢만 새어나가도,
바르르 떠는 인격이면서 말이다.
(※ 참고 글 : ☞ 코인 보살)
세상일을 보고도 모른 척,
오로지 자신만 돌보면,
혼이 빠져,
허수아비가 되며,
제 판단을 버리고,
남의 말에 혹하여 빠지면,
유빠, 털빠가 되어,
육도윤회하며,
빠돌이, 빠순이, 박수 부대, 태극기 부대원이 되고 만다.
혹은 가족이란 동굴 속에 박혀,
제 살붙이 안일만 구하는 비열한 박쥐가 되고 만다.
(유시민, 이재명 - 김인성 )
아직도 유시민이 민주투사며, 진보를 지키는 선봉자라 생각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리고 이재명을 보확찢지사로 여기고 있다면,
저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는 단순히 사실 내용을 확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안목이 찌그러진 대롱처럼 협착되어 있고,
판단이 얼마나 엉터리였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ⅱ (1) | 2019.11.09 |
---|---|
물고상루(物固相累) (0) | 2019.11.08 |
죽공예(竹工藝) (0) | 2019.11.04 |
말 (0) | 2019.10.19 |
주곡(酒曲) (0) | 2019.10.15 |
벼 (0) | 2019.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