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의 인간
한 마리의 인간
기억한다.
오래 전, 거리에, 자선냄비가 등장하고,
모두들 총총 걸음을 걸으며,
살짝 들뜬 세모의 풍경을.
그 어느 날,
모금함을 어깨에 멘 인간이 나타났다.
이 자가 모금함을 열고 뒤집더니만, 모금한 것을 쏟아내더라.
그러더니, 거침없이 동전을 집어 들고 공중전화통에 넣고는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추접스런 이야기들이 마구 튀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바로 옆에서 이를 목격하였다.
모금한 돈이 제 것이더냐?
녀석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야말로 등짝을 손바닥으로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이 일고 만다.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겼다’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충분한 표현이 아니다.
바로 말하자면,
‘생선가게를 맡기면 대개는 고양이가 된다.’
이리 하는 게 보다 충실할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직격탄을 날린 윤미향 더불어시민당 국회의원 당선인은 97년부터 정대협을 이끌어온 지도자로, 2018년 정대협과 정의기억재단을 통폐합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10일 정대협이 국세청 홈페이지에 공시한 ‘공익법인 결산서류 공시’를 분석한 결과, 2014년부터 6년 동안 걷은 기부금은 총 33억4,904만원이다.
지출 내역을 보면 이상한 대목이 많다. 우선 수혜자 규모에서 2014년 50명이던 수혜자는 49명, 10명, 999명, 9,999명으로 급증한다. 2019년은 1,003명으로 대폭 감소했다.
(출처 : viewsnnews)
사실이 온전히 밝혀진 게 아니니,
나의 위치로선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지금은 판단중지.
이게 내 태도다.
허나,
이 기사를 읽자,
이내 저 모금함 생각이 났을 뿐이다.
한 성직자가 있다.
그가 신자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하였단다.
어떤 신자가 양로원에 들어가면서,
전세금 35,000,000원을 기부하고 갔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신자들에게 이를 널리 알리고,
착한 일이라도 하였다는 듯,
한껏 닦아세웠을 것임을.
하며, 은근히 압력을 넣지는 않았을까?
이것은 전혀 상상이 아니다.
내가 살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다.
재벌도 아닐 터인데,
마지막 생의 강을 건너갈 자량(資糧)이 될 것을,
저리 털어버려도 되는가?
모르겠다.
생각은 각각이 다르니까?
하지만,
돌아가시고 나서,
남은 것이 있을 시,
기탁한다면 모를까?
전세금을 헐어 종교단체에 모두 기부하는 것이 과연 마땅한 것인가?
이런 의문을 거둘 수 없다.
혹, 저것으로 천당 갈 표를 구할 작정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듣건대, 전 재산 종교 단체에 기부하고,
늘그막에 폐지 주우면서 살아가는 할머니도 있다 한다.
이쯤 되면,
종교가 종교가 아니고,
앵벌이 부리는 왕초 격이 아닌가 싶다.
저 이야기를 나누며,
처에게 말했다.
종교는 직거래를 틀일이지,
중간 새에, 무당 같은 매개를 둘 일이 아니다.
예수나, 부처를 직접 상대할 일이지,
목사, 신부, 스님을 두고,
그에게 나의 신앙생활을 전적으로 맡길 일은 아니다.
내가 가진 뜻이 있으니,
적당한 때가 이르면,
유기견을 돌보는 시설을 만들고 싶다.
저들 가여운 영혼을 품고 싶다.
또는 바둑 대회를 열고 큰 상을 내거는 일도 하고 싶다.
바둑의 저 순수한 기하학적, 수리학적, 논리적 열정, 추구를 좋아하니까.
혹, 어떤 이라면 음악을 좋아하여,
훌륭한 연주자를 직접 후원할 수도 있으리라.
무슨 이야기인가?
기부가, 후원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기부를 하려면,
매개, 중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할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저 신자의 뜻을 존중한다.
하지만, 나라면, 생존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일에 직접 희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게 교단에 투척하는 것이었다면, 더는 참견할 일은 아니다.
중간에 생선 다 뜯어 먹고, 삥 뜯고, 조직 운영하는데 줄줄 새게 할 일은 아니다.
인간 중엔 개나 고양이가 적지 않은 바, 나는 이를 경계한다.
둥그렇게 단(團)을 짓고,
동도(同道)들끼리 밀어주고 끌면서,
앞길을 개척하는 것 아름답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중심은 내가 되어야 하지,
남의 지팡이에 언제까지 의지할 것인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그래서,
이 가르침은 언제나 위대하다.
영매자(靈媒者)든, 성직자든,
그 허실, 진위를 잘 살필 일이다.
(※ 참고 글 : ☞ 서문표와 하백 귀신 & 도로공사)
자칫,
저들은 한 마리의 개가 되기도 하고, 고양이도 되기도 하는 법이다.
하여 나는 저들을 두고, 한껏 겸양 차려, 한 마리의 인간이라 부른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르침을 구할 사부도 필요하고,
바른 인도자로써, 성직자도 요긴하다.
이런 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생의 커다란 복이며, 즐거움이다.
하지만, 이는 한 때의 일인 것.
궁극적으로,
혹자의 請처럼 하늘나라에 가던가,
혹자의 願처럼 도를 이루는 것은,
아니 또 혹은 구함을 구하지 않든가 간에,
그 일의 주인은,
절대 고독 단독자 자신일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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